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8화 (49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8화

    107. 악성(8)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부장님.”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하루 앞둔 날, 이자벨 멀핀이 배도빈의 집무실을 찾았다.

    내일 아침 A팀 참가자들을 상대로 순서 추첨과 개인 인터뷰를 진행하려는 일이었고 그에 관련해 간단히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죠엘 웨인이 악단주 집무실을 보다가 어색하게 시선을 끌고 왔다.

    “오늘 안 나오셨어?”

    “네. 콩쿠르에 집중하신다고 악단 일은 사무국에 맡기시겠다 하셨습니다. 인트라망에 공지 막 올린 참이에요.”

    “부지런해도 손해 본다니까.”

    이자벨 멀핀이 한숨을 내쉬자 죠엘이 작게 웃었다.

    멀핀도 큰일이 아니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배도빈이 콩쿠르 에 집중한단 소식에는 무척 반가워 했다.

    ‘그나저나 독을 품은 모양이네.’

    그간 악단 운영과 관련한 일로 알 게 모르게 시간을 빼앗겼던 배도빈 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이 반갑 지 않을 리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직원이기 전에 클래식 음악과 배도빈의 팬이었기에 이자벨 멀핀은 그가 음악에 매진할 수 있게 됨에 가슴이 뛰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하시면 좋을 텐데.”

    멀핀이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죠엘이 공감했다.

    “정말 그래요. 사실 음악만 해도 바쁘신데 악단 운영으로 고생하시는 거 보면 조금 안타깝기도 해요.”

    멀핀이 고개를 돌렸다.

    죠엘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보좌하려고요.”

    “나도 우리 모두 그래야겠지.”

    두 사람이 다짐하듯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해.”

    “네. 참, 어제 진행도 멋지셨어요. 완전 프로페셔널.”

    죠엘이 멀핀을 향해 주먹을 쥐고 힘을 불어넣듯 흔들었다.

    멀핀도 화답하곤 민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 * *

    기술을 익혔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 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매번 반복하면서 몸에 익고 그 행동이 자연스러워져야만 완전히 익혔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미묘한 움직임의 차이로 달 라지는 건반의 깊은 세계를 탐구하 여 체득하는 이 일은 너무나 흥미로워 잠시라도 멈출 수 없다.

    “정말 안 가?”

    “어차피 결승에서 볼 텐데 뭐 하러.”

    “요즘 좀 무리하는 거 같은데.”

    “걱정 마. 최고로 좋으니까.”

    채은이와 지훈이가 A조 경합을 보 러 가자고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기에 거절했다.

    상대가 누구든 가우왕은 결승에 오를 것이고 그때 그 높은 코를 눌러 주기 위해선 이것을 완전히 체화시 켜야 한다.

    두 사람을 보내고 다시금 건반을 눌렀다.

    ‘좋아.’

    의도한 대로 소리가 나는 이 완벽 한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고 싶지 않다.

    지금이라면 베를린 환상곡을 더욱 완성도를 높여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게 해서 연주해 볼까.’

    분명 즐거운 일이리라.

    푸르트벵글러가 펼치는 묵중하고 광활한 평야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는 것을 떠올리니 괜스레 옛 생각이 떠 오른다.

    그러는 한편 내 지휘에 가우왕은, 또 최지훈은 어떤 연주를 할지 궁금 해 미칠 지경이다.

    그 배경에서 찰스가 어떤 바람을 일으킬지, 나윤희는 또 어떤 엉뚱한 말을 꺼낼지.

    소소는 아마 나무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존재감을 내리겠지.

    이승희 역시 특유의 무게감 있는 연주로 활력을 불어넣어줄 터.

    그래.

    이보다 행복할 순 없다.

    나의 사람. 나의 악기.

    그들만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음악을 할 수 있으리라.

    사색에 잠겨 건반을 두드리다 보니 또 하루가 지나 있다.

    환기를 하고자 창을 여니 새벽의 쌀쌀한 공기가 폐부를 채워나간다.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기분에 도취되어 숨을 내쉬니 하얀 입김이 나온다.

    “ 아.”

    무심코 떠오른 악상.

    악보.

    다급히 그랜드 심포니의 5악장을 찾아 펼쳤다. 도저히 시작할 수 없었던 첫 주제를 적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시작은.

    그래, 푸르트벵글러다.

    그에게 어울리는 악기로 튜바보다 나은 것도 없을 터.

    호른의 보조를 받은 튜바는 만인 앞에 당당히 그 고귀하고 높은 기상을 과시한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제1바이올린과 첼로가 움직이고 제2바이올린과 비 올라가 정신을 이어받는다.

    10년 가까이 멈춰 있던 악보가 순 식간에 채워진다.

    나의 성채. 나의 방패.

    그리고 나의 안식처.

    노이어가 빠질 순 없지.

    제국을 지켜온 기사들의 위용을 떠 올리며 음표를 적어두고 주제가 순환되니 가장 먼저 떠오른 악기는 찰스의 파이어버드와 나윤희의 블러드 와인.

    이 곡은 악장단 전체가 달려들어야 할 듯싶다.

    전개를 이어나가다 클라이막스는에는 역시 가우왕과 최지훈이 어울리겠다 싶은데.

    두 사람의 기량을 최고로 뽑아내기 위해선 아무래도 고민을 좀 더 해야겠다.

    화려하게 치장한 사자와 그를 약 올리듯 나풀거리는 나비.

    ‘이런 식으로?’

    ‘아니. 이쪽이 더.’

    어떤 곡이든 훌륭히 연주해낼 두 사람이라 자꾸만 욕심이 더해진다.

    욕심과 망설임이 얽히는 가운데 신 기하게도 가우왕과 최지훈을 떠올리니 또다시 펜이 움직인다.

    사명감도 명예도 없이.

    오직 음악을 향한 순수한 갈망으로 살아온 이들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목소리가 악보에 내려 앉는 듯하다.

    그리고.

    이 가슴에서 터질 듯이 솟아오르는 감정을 조금도 거르지 않아 끼얹으니.

    창문을 통해 여명이 들어왔다.

    그 따스한 빛에 감정을 추스르고 보다 효과적으로 악상을 전개하기 위해 과도하게 사용된 음표를 생략 하고 붙이고 또 추가하기도 한다.

    조금씩 그랜드 심포니가 완성되어 간다.

    이 고양감.

    ‘세상에 없던 음악을 들려줄 테니.’

    푸르트벵글러와 했던 약속을 비로소 지킬 수 있을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을 때.

    마지막 지시문을 적어 놓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육신과 정신이 충족되어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과 피로가 물 밀 듯이 들이닥쳤다.

    ‘빨리 듣고 싶다.’

    이 생생한 두 귀로.

    그런 생각조차 조금씩 수마에 이끌 려 잠을 청하는데 알 수 없는 소리 가 먼 곳에서 들려온다.

    ‘시끄럽다.’

    음..

    지금은 일단 한숨 자도록 하자.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첫째 날.

    막심 에바로트가 첫 번째 순서로 정해지고, 그의 얼굴이 스크린을 채 우자 객석이 떠나갈 듯이 요동쳤다.

    일찍이 크리스틴 지메르만을 사사 하며 이름을 떨친 가우왕의 즉위가 늦어진 이유.

    가우왕 못지않은 화려함과 정열로 그는 서정적 풍조가 주를 이루었던 피아노계를 평정, 가우왕과 함께 이분했었다.

    그의 고혹적인 연주는 국가와 성 별, 연령을 가리지 않고 큰 사랑을 받아 왔다.

    크로아티안 랩소디, 엑소더스, 파가 니니를 주제로 한 랩소디, 집시 메이드 등.

    그 외에도 여러 명 연주를 펼치며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아름다운 음악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인 그는 현재 주류 ‘라이든샤프트’ 세대의 전조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가란 별명은 왜 붙은 거야?”

    정세윤 기자가 차채은에게 물었다.

    “보통은 크리스틴 지메르만과 가우왕으로 이어지는 정통파와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차채은이 고개를 돌리자 한이슬이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초창기 테러리스트라 불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전한 느낌도 있지.”

    “테러리스트?”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많은 혁명인 이 테러를 수단으로 삼는 것은 사실 이니 억지로 연관시킬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그의 준수한 외관과는 그리 어울리 지 않은 이름이기도 했다.

    “그게.”

    “와아아아아!”

    한이슬이 연 순간 막심 에바로트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관객들 은 함성을 내질렀다.

    댄디하게 짧게 자른 머리.

    190cm의 장신과 균형 있는 근육질 몸매, 선이 굵은 남성적 외모조차 정세윤 기자의 시선을 빼앗을 순 없었다.

    가죽바지는 고사하고 맨몸에 조끼만 입고 복근과 문신이 훤히 드러나는 통에 정세윤은 벌어진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야?”

    “테러리스트라 불린 이유.”

    한이슬의 말에 정세윤은 곧장 납득 할 수 있었다.

    크로스오버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 척하며 고전 서양 음악과는 다른 노 선을 가고 있었기에.

    또 1라운드에서는 멀쩡한 연미복을 입고 참가했기에 정세윤으로서는 그 의 진짜 모습을 처음 본 것이었다.

    “원로 음악가들이 가우왕이랑 막심을 인정 안 했던 거 조금은 이해되 지?”

    “……네.”

    정세윤과 몇몇 관객, 많은 시청자 가 막심 에바로트의 충격적인 비주 얼에 얼이 나가 있을 때.

    대기실에 있던 가우왕은 눈을 가늘 게 뜨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법인데.”

    또 사교 모임으로 배도빈 콩쿠르를 방문한 과거 영국의 귀족들은 눈을 가리고 혀를 차기 바빴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교양 있는 콩쿠르라 해서 찾았더 니 정말 못 어울리겠네요.”

    그들이 콘서트홀을 나서려 하자 최 우철이 싱긋 웃으며 그들을 막았다.

    “저기 찰스 왕세자께서도 계시지 않습니까. 다음 만남 때 좋은 대화 거리가 될 테니 조금 더 마음을 넓 게 가지시는 게 어떠실지.”

    최우철의 말에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ㄴ 어엌ㅋㅋㅋㅋㅋ 저게 뭐얔ㅋㅋㅋ 눈 ㅠㅠ 내 누운 ㅠㅠ

    ㄴ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임? 저딴 식으로 입고 나와도 도어?

    ㄴ  막심 콘서트 본 적 없지? 원래 저런 사람임.

    ㄴ 애초에 클래식계 떠났던 사람임. 그냥 대중 음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됨.

    ㄴ 가우왕 같은 인간이 또 있었다니.

    ㄴ 내 생각에 음악 하는 인간, 그중 에서도 천재들은 좀 미친 부류가 많은 듯.

    ㄴ 듯이 아니라 실제로 많음.

    ㄴ 약이랑 범죄만 안 저지르면 되지. 저런 것도 다 자기 표현임. 막심 표정 안 보여? 완전 진지하잖아.

    한 시청자의 의견과 같이 혁명가 막심 에바로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1라운드에서 어린 피아니스트에게 패배한 탓이었고.

    2라운드에서 숙명의 라이벌과 조우 한 탓이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예를 두 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전위적 음악가는 클래식이 아닌, 본인의 음악으로 승부할 생각으로.

    최선의 상태를 갖추고 나선 것이었다. 곤혹스러워하는 관객도, 차마 무대를 보지 못하는 관객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연주를 시작한 순간 그들 모두 본인의 팬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이 그를 위해 반주를 준비했고.

    그들과 시선을 교환한 막심 에바로트가 건반을 눌렀다.

    첫 번째 곡은 크로아티안 랩소디.

    고혹적인 멜로디가 퍼지며.

    과연 그가 자신한 대로 루트비히홀과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을 찾은 모든 이의 가슴이 요동치 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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