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7화 (49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7화

    107. 악성(7)

    “그럼 열심히 해.”

    예나가 입을 맞추고 침실로 향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오늘의 연주를 되짚어 보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딩이가 결국 일을 내버린 것이다.

    막심의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고 한층 더 무르익은 연주력을 선보였다.

    그럼에도 5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순딩이를 선택했다.

    이 나를 위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결국 막심 그놈을 제쳐 자신을 증명 한 것이다.

    무시해선 안 된다고.

    더 이상 마음 놓고 있으면 안 된 다고 경고한 것이다.

    “ 하.”

    기가 찰 노릇.

    재작년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 했지만 이렇게 빨리 쫓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게 사실이다.

    배도빈이 여전한 것이 다행이라면 순딩이 녀석의 발전은 조금 놀랍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녀석과 달리 순딩이는 가장 아래에서 시작 했다.

    항상 붙어 다녀 어쩔 수 없이 눈 에 들어온 녀석이었지만 어느 순간 훌쩍 커버려 고개를 내리지 않아도 내 시야에 들어와 버린 놈.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외관과 달리 그 가슴속에 어떤 괴물을 키우고 있을지 모를 놈이다.

    그래.

    오늘은 꽤 충격이다.

    할망구나 나와 같은 타건을 가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속주는 들어본 적 없다.

    나도 배도빈도 속주라면 빠질 수 없건만, 아니, 단순 빠르기라면 나와 배도빈이 녀석보다 낫다.

    그러나 오늘의 연주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하다가 손가락이 망가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노트 수를 따지면 비슷하나 배열은 전혀 아니다.

    불가능한 연주다.

    손가락이 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기형적인 움직임으로 가능케 한 것 이었다.

    ‘말이 되는 일이야?’

    말이 될 리가.

    그러나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실 제로 해내고야 말았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면 놈이 무 슨 짓을 했는지 알 터.

    최지훈의 연주 영상을 반복해 보았다.

    ‘……미친놈이야.’

    보고 따라 해보려 해도 순간 망설여졌다.

    숨을 짧게 내쉬고 녀석의 연주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니 어설프게나마 가능은 하다.

    그러나 30초 가까운 즉홍 연주를 이렇게 지속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

    순딩이 녀석은 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 연주하던 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고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일을 해낸 것이다.

    마치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했을 때의 나처럼 말이다.

    “뭐 하는 놈이야?”

    안 그러냐.

    무슨 짓을 하는지 오늘 콩쿠르장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은 배도빈 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모하고 불가능한 도전.

    그러다 손가락을 망가뜨려 놓고도 결국엔 완성시킨 기이한 연주법.

    분명 이것만이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결정 짓진 않지만.

    남이 하는 걸 내가 못 하다니.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을 리 없다.

    이 또한 배도빈도 같은 생각일 터.

    최지훈의 연주를 반복해 연습하고 또 반복하다 보니 예나가 슬쩍 목을 감쌌다.

    “먼저 잔다며.”

    “아침이야.”

    분명 한두 시간 정도 흘렀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니 예나가 커튼을 쳤다.

    [제1회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진 출자가 확정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클래식 음악을 사랑 하시는 모든 여러분. 배도빈 콩쿠르 운영위원회 입니다.

    2월 4일부터 개최된 배도빈 콩쿠르 1라운드가 성황리에 종료되었습니다.

    누적 3억 명의 시청자께서 시청해 주고 계신 배도빈 콩쿠르는 2라운드 에서 다음과 같은 양질의 서비스로 더욱 훌륭한 연주를 제공해 드릴 예 정입니다.

    • 2라운드부터는 연주된 곡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더 보기 탭을 이용 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참가 피아니스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으시다면 프로필 사진을 클 릭 또는 탭 해주시기 바랍니다.

    •2라운드부터는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완전무결의 비르 투오소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해설 전문이 웹상에 공개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 훌 구독자 분이시라면 무손실 음원을 무료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앨 범 발매 시까지 적용).

    •매일 실시간 투표 참가자 중 100분을 선정해 2026 베를린 필하모닉 발트뷔네 온라인 시청권을 제공해 드립니다.

    2라운드 진출자와 조 배정은 다음 과 같이 결정되었습니다(연주 순서는 당일 추첨으로 결정됩니다).

    다닐 베레조프스키

    (러시아, CAA. 29세, A조)

    가우왕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40세, A조)

    막심 에바로트

    (크로아티아, 엘 부쉬 엔터, 39세, A조)

    소망사랑 킴

    (한국, 라이징스타 엔터, 24세, A조)

    도빈 배

    (한국, 베를린 필하모닉, 20세, B조)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러시아, 빈 필하모닉, 28세, 으조)

    지훈 최

    (한국, 베를린 필하모닉, 21세, B조)

    나나리 수완포티프라

    (태국, EMI, 30세, B조)

    각 참가자는 이틀에 걸쳐 프리룰로 연주를 펼치며, 1라운드와 마찬가지로 각 조에서 상위 득표한 두 사람 이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할 자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관객, 시청자 여러분을 위한 여러 장치를 마련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배도빈 콩쿠르 2라운드 진출자가 확정되었다.

    팬들은 니나 케베리히와 최성신과 같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진출하지 못했음에 아쉬워하기도.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으로 여겨지는 최지훈이 거장 중의 거장 막심 에바로트를 넘어섬에 경악하기도.

    또 진노한 마왕 배도빈이 앞으로 어떤 연주를 펼칠지, 가우왕이 황좌를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ㄴ 차라리 전체 투표로 하지. 케베 리히나 최가 못 올라간 건 정말 말이 안 됨.

    ㄴ 그러니까. 내년 오케스트라 대전 처럼 했으면 얼마나 좋아.

    ㄴ 급조된 이벤트라 어쩔 수 없는 듯. 그래도 배도빈, 가우왕, 막심, 최지훈은 들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ㄴ 난 소망사랑과 나나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어. 그녀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는 건 인정하지만 케베 리히나 성신의 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진 않음.

    ㄴ 너무 그러지 마. 지금 우승권 네 명 빼곤 다 기권하고 싶은 심정일 걸?

    ㄴ 가우왕이랑 막심이라니. 둘이 이렇게 맞부딪힌 적이 대체 얼마만이야?

    ㄴ 20년 가까이 되었을 듯. 애초에 이런 데 나오는 것부터가 손해인 인 간들이니 마지막일지도.

    ㄴ 엘리자베타는 또 떨어지게 생겼네. 배랑 최라니.

    ㄴ 그녀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어. 오늘 인터뷰에서 “모두 배, 초1, 왕, 에바로트를 우승 후보로 보고 있지 만 저 또한 우승할 자격이 있어요.” 라고 말했어.

    ㄴ 대단한 자부심이네.

    ㄴ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뜻이것!지. 개인적으로 난 그녀를 지지해.

    “느어.”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팬들의 반응을 살피던 차채은이 책상 앞에 엎드렸다.

    잡지사 리드로부터 배도빈 콩쿠르에 관한 특집 기사를 의뢰받은 그녀는 각 피아니스트에 대한 자료를 구 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배도빈, 최지훈에 관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고 가우왕, 막심, 니 나, 최성신과 같은 유명인사들에 대 한 자료 역시 널리고 널렸으나 그 외에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태국 출신의 나나리 수완포 티프라에 대해서는 기사조차 몇 없었고 한국어는커녕 영어나 독일어로 된 기사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자연스레 포럼이나 커 유니티 사이트에서 팬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다.

    엎드려 있던 차채은이 답답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인터뷰라도 따면 좋은데.’

    지난 사건 이후로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나 아직 외부 활동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으며.

    한이슬과 같이 붙임성 있게 인터뷰를 따고 다닐 깜냥도 없는 어린 칼 럼니스트는 원고를 준비하느라 며칠 째 감지도 않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 아는 사람 없으려나.’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고 답은 나오 지 않을 때 누군가 차채은의 방문을 두드렸다.

    “ 엄마?”

    “ 나야.”

    최지훈의 목소리였다.

    차채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서둘러 문을 잠갔다.

    문을 열려던 최지훈은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자 의아히 물었다.

    “들어가면 안 돼?”

    “안 돼!”

    “왜긴 왜야! 내가 올 거면 연락하고 오랬지!”

    “불편해.”

    “불편하긴 뭐가 불편해? 나야말로 불편해!”

    차채은이 잔뜩 어질러진 방과 자신 의 몰골을 보곤 씨잉 하고 혀를 찼다.

    “지금까지 안 그랬잖아. 갑자기 왜 그래?”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거야! 아무튼 빨리 가!”

    “심심해.”

    “심심하면 무작정 찾아오는 곳이냐!”

    “그럼?”

    “아아아아악! 진짜!”

    차채은이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비 명을 지르자 최지훈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나 뭐 잘못했어?”

    “어!”

    차채은이 방 안에 널린 옷가지를 세탁 바구니에 쑤셔넣으며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말해줘.”

    “시끄러워!”

    최지훈이 뭐라 하든 차채은은 다급 히 방을 정리했고 우울해진 최지훈은 문을 여는 걸 포기했다.

    샤워를 하고 대충 머리를 말린 차채은이 문을 열었다.

    “••••••갔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채은이 잔뜩 인상을 쓰고 핸드폰을 찾으려는데 1층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계단을 내려가자 곧 모친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최지훈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제가 뭘 잘못한 거 같아요.”

    “아니야. 좋으면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매일 방에만 틀어박 혀 있어서 얼마나 걱정인지 아니? 정리도 안 하고 씻지도 않고.”

    “ 엄마!”

    잔뜩 약이 오른 차채은이 소리를 질렀고 모친 이은지는 그런 딸의 반 응에 더욱 크게 웃었다.

    “빨리 와.”

    차채은이 최지훈을 붙잡아 이끌었다.

    “이제 들어가도 돼?”

    “너 진짜 죽을래? 알면서 이러지!”

    “진짜 몰라.”

    “니가 자꾸 이상한 짓 하니까 그러잖아!”

    “양말 치우는 거?”

    차채은이 최지훈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신경질을 내며 방으로 들어간 차채은은 최지훈이 무신경함을 믿을 수 없었다.

    ‘둔해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둔할 수 있어?’

    반면 최지훈은 차채은을 놀리는 게 즐거울 뿐이었다.

    ‘아, 너무 재밌다.’

    생전 누구에게 장난 한 번 하지 않았던 그였으나 차채은이 발작을 일으키면 그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이제 양말 안 치울게.”

    차채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락하고 올게.”

    거듭된 말에도 차채은이 반응하지 않자 최지훈이 슬쩍 문을 열었고 잔 뜩 화가 난 차채은은 애써 그를 무시하며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최지훈이 다가와 그녀가 모니터를 같이 살피니 그제야 그를 밀어냈다.

    “ 나가.”

    “수완포티프라 씨네? 기사 쓰고 있었어?”

    “그러든 말든!”

    “예전에 같은 대회 나간 적 있었는 데 깜짝 놀랐거든. 그때만 해도 아 시아에서만 활동해서 잘 몰랐는데 대단하더라.”

    차채은이 눈을 크게 떴다.

    “아는 사이야?”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연주풍이 독특해서 찾아본 적 있어.”

    “어디서 찾았어?”

    “도빈이한테 말했더니 히무라 대표 님이 파일을 보내주셨어. 필요해?”

    “필요해!”

    차채은이 다급히 대답했다.

    최지훈이 개인 서버에 접속해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넘겼고, 그것을 확인한 차채은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대박!”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달라진 태도에 최지훈이 웃고 말았다.

    “이번 칼럼은 언제 나와?”

    “결승까진 내려고.”

    “ 바쁘겠다.”

    “응. 엄청 바빠.”

    원고 파일을 연 차채은이 고개를 홱 돌려 최지훈과 눈을 마주쳤다.

    “툭타미셰바한테 지면 안 돼.”

    “응.”

    최지훈이 방실방실 웃으며 답했다.

    “아무한테도 안 질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