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6화 (49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6화

    107. 악성(6)

    배도빈 콩쿠르 2조 경합이 일으킨 파란이 무르익을 무렵.

    팬들과 언론이 배도빈이 조 2위로 진출했단 사실에 집중하고 있는 반 면, 음악가들은 다른 이유로 심각해 져 있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프로 피아니스트로서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한 김소망사랑에게는 특히나 충 격이었다.

    ‘어떻게?’

    그녀는 배도빈과 가우왕의 연주를 반복해 들을수록 알 수 없는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완벽.

    너무나 완벽했다.

    가우왕과 배도빈 중 누가 더 멋진 연주를 했는가는 540만 9,117명의 선택이었을 뿐.

    600만 명이었으면 어땠을까.

    혹은 1,000만 명이었으면?

    김소망사랑은 그 가정에서도 가우왕이 앞설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가우왕의 탁월한 기교와 진정성.

    배도빈의 폭력과도 같은 표현력.

    이만한 수준의 피아니스트를 두고 우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평소에 대체 뭘 하고 지내는 거야.’

    특히나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배도빈이 이만 한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배도빈과 가우왕의 재대결에 집중했던 다른 피아니스트와 음악가들도 오늘의 연주를 곱씹을수록 좌절을 거듭해야 했다.

    “완벽해.”

    위대한 피아니스트 밀스 베레조프스키의 아들 다닐이 배도빈의 연주를 듣고는 중얼거렸다.

    그의 매니저가 격려하기 위해 애써 웃었다.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네가 밀스 베레조프스키의 재능을 물려받은 뛰 어난 피아니스트라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야.”

    “최선을 다하면 돼. 너도 충분히 결승에 오를 수 있다고.”

    매니저의 응원에 다닐은 말 없이 코를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아니.”

    이미 가우왕과 배도빈은 피아니스트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높고 먼 곳에 있어, 그가 비집고 들어갈 만 한 틈이 없었다.

    지금껏 그가 겪었던 콩쿠르와는 달랐다.

    ‘아버지만큼. 어쩌면 그보다.’

    다닐은 이미 완벽한 그들을 상대로 대체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곡을 다루는 일도 건반을 다루는 일에서도 도저히 그들보다 나은 연주를 할 자신이, 아니, 따라갈 엄두 조차 나질 않았다.

    그를 평생 동안 가로막았던 아버지를 대할 때의 느낌 같았다.

    “대체 이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냐고.”

    “다닐……

    “배도빈이 한 번 진 게 중요한 게 아냐. 듣고도 모르겠어? 가우왕이나 배도빈이나 완벽해. 너무나 완벽하 다고. 배도빈의 패배는 단지 몇 명 의 변덕 때문에 발생한 일이야. 내 일 막심과 최도 마찬가지겠지.”

    “이미 완성된 사람들이 네 명이나 있어. 오늘 가우왕이나 배도빈의 연주에서 부족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전혀. 그럴 리가 없어. 두 사람은 완벽하다고.”

    “다닐.”

    “그런 사람이 내일 둘 더 나와. 이 대회는…… 내가 나올 곳이 아니었어.”

    다닐의 매니저는 그의 아티스트에 게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너무나 완벽한 아버지를 두고 평생을 괴로워한 다닐이, 아버지 못지않은 네 명의 경쟁자를 둔 지금.

    얼마나 절망하고 있을지.

    얼마나 괴로워할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닐 베레조프스키는 고개를 저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고.

    배도빈 콩쿠르에 참가하려 했던 다른 모든 피아니스트도 그와 같이 좀 처럼 가만있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두 사람의 연주에 답답해하면서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연습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 후 자택으로 돌아온 배도빈은 늦은 밤까지 피아노 앞에 앉아 가우왕의 연주를 곱씹었다.

    그리고 본인이 남긴 수많은 질문에 정답만을 제시하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해.’

    단단하고 정확한 타건도, 민첩하면서도 박자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교도 탁월했으나.

    배도빈은 그의 진가가 집착에 있다고 결론 지었다.

    ‘분명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테지.’

    오직 완벽한 연주를 위해.

    악보와 작곡가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끝끝내 악보에 담긴 진의를 이끌어내는 고집.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보다 귀찮을 수 없는 성격이 음악에 있어서만큼 은 그를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최고라 불리기에 손색없다.’

    배도빈은 그 외에 가우왕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여겼다.

    사카모토와 글렌 골드, 미카엘 블 레하츠, 크리스틴 지메르만 등 손에 꼽을 피아니스트를 수도 없이 접했으나 지금의 가우왕을 넘어서는 이는 없었다.

    간절함.

    그의 화려한 연주 뒤에는 알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러지 않다면 음 하나하나를 이렇게까지 소중히 다룰 수 있을 리 없었다.

    배도빈은 오늘 가우왕의 연주를 반 복해 듣는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오후부터 스무 번 넘게 반복해 들 은 뒤에야 비로소 가우왕이 자신을 넘어서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 뒤, 그는 미세하게 굳었던 손을 계속해서 풀어냈다.

    느리고 반복적인 아르페지오로 시 작해 조금씩 박자를 빠르게 가져갔고 변화를 주었으며 보다 복잡한 형 태를 그려냈다.

    아무리 반복해도 족할 수 없었다.

    시력을 상실하면서 얻었던 예민한 청각과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음감이 어울리며,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에게 피아노는 새 악기였다.

    그가 다루던 옛 피아노와 현대의 피아노는 너무나 달랐다.

    현대 피아노의 초기 형태, 하머클 라비어조차 그가 청력을 완전히 잃은 뒤에 나온 물건.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이라 해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특유의 야성미와 폭력적인 전달력 만으로도 최고 중 하나로 꼽히기 충분했으나.

    그 역시 자신의 연주에 불만을 가 지고 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부족해.’

    일찍이 파악했던 일이었다.

    청력이 예민해지면서 배도빈은 자신이 크리스틴 지메르만, 가우왕, 최지훈이 가지고 있는 단단하고 명확 한 타건을 갖추지 못했음을 인정하 고 있었다.

    오래된 사람이기 때문.

    옛사람이기 때문.

    그리고 오래전부터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작곡가 지휘에 집중했기에 남았던 과제.

    ‘안일했어.’

    그것만이 피아노 연주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현대 피아노를 다루는 일에 익숙하 지 않다 해도 어렸을 적부터 감과 연습량으로 조금씩 잡아나가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부족한 이유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

    피아노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명 연주자들에 비해 건반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일에 미숙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내가 갖추지 못한 유일한 일이다.’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음악성.

    완벽한 박자 감각과 음감.

    악상을 전개하는 능력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만으로도 정상급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기 전혀 무리없으나.

    건반을 완벽히 다루는 기교.

    현대 피아노의 가능성을 연 베토벤 본인이 청력 상실과 200여 년이란 공백 때문에 건반을 온전히 다룰 기 회가 없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어.’

    어렸을 적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을 때는 그보다 팔 길이, 손가락 길이 의 부족으로 생기는 어려움을 보강 하는데 힘써야 했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몸을 보다 적 극적으로 쓰게 되었고 연주는 화음을 늘여서 연주하는 방식으로 대체 했다.

    타건에 집중할 수 있을 리 만무.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온전한 신체를 얻은 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상대하게 되면서 더 이상 미룰 필요 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조금도 갑작스럽지 않았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단점이었기 에 배도빈은 그저 기쁠 뿐이었다.

    ‘더 나아갈 수 있어.’

    연습곡을 연주하며 배도빈은 자신 이 보다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에 차 미소 지었다.

    두려운 것은 멈춰 섰을 때.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를 때다.

    그러나 지금은 바쁜 일정 때문에 미뤄두었던 일을 마음껏 다룰 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

    이미 정점에 이른 음악가는 마치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무 렵과 같은 천진함으로 손가락을 움 직였다.

    이미 그는 시간에서 벗어나 있었다. 애초에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긴 할까. 냉철한 머리와 풍부한 가슴.

    민첩한 손가락과 묵직한 건반, 망 치, 현 그리고 소리.

    오직 그것들만이 모든 사고를 지배

    하여 조금씩 조금씩 정제되었다.

    C. C. C. C.

    청력을 잃기 전 영혼에 각인했던 음들을 다시금 새겨넣었다.

    같은 음이라도 손가락의 각도를 바 꾸며 손목을 들어보며 페달을 눌렀다 떼며 그 작은 차이를 답습해 나

    마치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 럼 기초부터.

    오직 피아노를 다루는 데 더 익숙 해지기 위한 행위였다.

    다시 태어난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쌓였던 경험들이 그의 기적과도 같은 음감과 청력에 어울려 하나의 목 적지로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C. C. C. C.

    창밖으로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를 깨우기 위해 찾아온 집사가 조용히 자리를 뜨고.

    학교를 다녀온 배도진이 문밖에서 배토벤과 함께 배도빈의 피아노를 듣다가 밥을 먹으러 가고.

    3조 경연을 마친 최지훈이 찾아왔을 때조차 배도빈은 멈추지 않았다.

    건반과 음악에 취해.

    조금씩 정제되는 자신의 연주에 도 취되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엇인 가를 탐하고 또 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랐던 음과 실제 소리가 완벽히 들어맞았을 때.

    그가 손을 멈추었다.

    땀에 젖은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침내 배도빈이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한 순간이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에 놀라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최지훈이 서 있었다.

    “왔으면 얘기를 하지 왜 그러고 서 있어?”

    “그러게?”

    문을 열고 들어온 줄도 모르고 계속해 집중하고 있던 배도빈이 도리 어 왜 기척을 내지 않았냐고 묻자

    최지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배도빈이 벽시계를 확인하고는 목 주변 근육을 풀었다.

    “나이를 먹긴 했나 봐. 좀 찌뿌둥 한데.”

    “그럴 만하지. 계속 연습하고 있었던 거야?”

    “어. 두 시간쯤?”

    “두 시간?”

    배도빈이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도 피로가 풀리 지 않아 스트레칭을 하며 일어섰다.

    “너도 빨리 돌아가서 자. 내일 제 실력 보이려면 컨디션 관리해야지.”

    “어?”

    “어는 무슨.”

    “나 끝났는데?”

    “……무슨 소리야?”

    배도빈이 눈썹을 좁히자 최지훈이 핸드폰을 꺼내 배도빈 콩쿠르를 검 색했다.

    펼친 핸드폰을 보여주자 배도빈이 눈을 비비고 화면을 다시금 살폈다.

    【배도빈 콩쿠르! 파란이 이어지다!]

    【최지훈, 조 1위로 2라운드 진출!]

    【혁명가 막심 에바로트 충격의 패 배! 조 2위로 진출!]

    【막심 에바로트. “팬들의 결정에 따를 뿐. 최지훈의 연주는 완벽했다.”】

    【치열했던 3조 경합!]

    【최지훈 37.1%. 막심 에바로트 37.0%, 최성신, 22.8%]

    잔뜩 인상을 쓴 배도빈이 날짜를 확인하더니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최지훈에게 따지듯 말했다.

    “나 몰래카메라 안 좋아하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이 신고식이랍시고 했던 잔악무도한 짓을 떠올릴 수밖 에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빨리 씻고 뭐라도 먹고 자. 두 시간이라고 하 더니 뭔 소린가 했네. 하루를 꼬박 그러고 있었던 거야?”

    최지훈이 배도빈을 샤워실에 밀어 넣었다.

    배도빈은 그제야 피로를 느끼며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고 최지훈은 형제가 허기를 달랠 수 있도 록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 역시.’

    그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방금까지 배도빈의 연주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배도빈 이 또다시 한 걸음 나아갔음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최지훈은 거듭 감탄하 며 미소 지었다.

    ‘가우왕 씨 연주에 자극받은 거야.’

    흠이라고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배도빈의 타건이 다소 거칠긴 했어도 도리어 그 격렬함과 힘 덕분에 연주가 보다 풍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끝내 완벽히 정제된 음을 내는 데 성공했으니, 지금껏 그를 지켜보았던 최지훈으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배도빈 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의 완벽한 연주에 감탄하고 좌절 하기 바빴을 터.

    최지훈조차 어제 배도빈의 연주를 듣고 그가 여전히 완벽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취향의 차이일 뿐.

    결과의 차이가 있었을 뿐.

    가우왕과 비교하더라도 배도빈은 분명 동등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완벽했던 배도빈이 자신에 게 없던 것을 하나 더 취했다는 사 실과 그 만족할 줄 모르는 과독한 욕심을 목도한 최지훈은 온몸으로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기쁨이고 전율이었다.

    ‘나도 더 나아갈 수 있어.’

    이미 정상에 오른 최지훈은 다시 한 걸음 내디딘 형제를 본으로 삼아 자신 역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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