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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94화 (49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4화

    107. 악성(4)

    “좋아.”

    루리얼 부르상이 연주를 마치자 손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니나 케베리 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배도빈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힘차게 무대 위로 올라갔는데, 그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이상한 녀석.”

    “그런 모습이 보기 좋은 거예요.”

    가우왕도 더는 말하지 않고 니나를 지켜보았다.

    배도빈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녀가 얼마나 뛰어난 피아니스트인지는 가우왕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 과정을 밟은 것도 아니면서 그 까탈스러운 찰스 브라움이 반주를 의뢰했고 니나 케베리 히는 그때부터 이미 가우왕과 배도빈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독특한 박자 감각과 통념에 얽매지 않은 신선한 해석.

    피아노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니나 케베리히의 재능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니나 케베리히가 환하게 웃으며 관 객들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 티 없는 모습에 몇몇 관객이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신을 꾸미는 데 서툴었으나 그것 이 그녀의 본 모습이었고 모든 사람 에게 환영받진 못했다.

    “미국에서 활동한다고 하더니 교양 없네요.”

    “그쪽이 원래 그런 편이죠.”

    브라움 부부는 그들과 함께한 이들 과 함께 니나 케베리히를 정숙하지 못한 이로 치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대화를 들은 유진희는 얼마나 교양 있는 인간이 그런 말을 하는지 의심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나. 지훈 아버님.”

    최우철도 뜻하지 않은 만남에 반가 워했다.

    “이런. 같은 곳에 계실 줄은 몰랐군요. 반갑습니다, 진희 씨.”

    “아는 분이신가요?”

    그때 브라움 부부와 영국 상원의원 부부가 유진희에 대해 물었고 최우 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신표현주의를 이끌고 계신 화가 아니십니까. 마에스트로 배 의 모친이기도 하고요.”

    “마에스트로……

    두 부부는 눈인사를 할 뿐 금방 유진희에게서 시선을 떼 그들끼리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최우철은 유진희에게 정중히 인사 했고 유진희는 그가 왜 저런 인간들 과 함께 있는지 의아해하고 불편해 하면서도 그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편.

    그러거나 말거나 니나 케베리히는 관객들과 놀 생각으로 잔뜩 고무되 어 있었다.

    ‘이번에도 재밌게 놀아야지.’

    순박한 시골 출신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자리했다.

    그녀가 준비한 곡은 생기발랄한 베토벤 소나타 18번, E플랫 장조.

    노을 지는 무렵에 별이 창문을 두 드리듯.

    연주가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섯 남매는 조잘대며 뛰어다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엄하게 꾸짖어 도 그때만 얌전할 뿐.

    종일 함께 있었으면서도 무엇이 그 리 즐거운지 서로를 보며 꺄르르 웃 는다.

    결국은 부모도 아이들의 천진난만 함에 못 이겨 오늘도 저녁 식사 자 리는 시끌벅쩍하다.

    ‘아빠! 내일 우리 소풍 가죠?’

    ‘어디로 가요?’

    ‘계곡으로 가요!’

    ‘아니야! 옆 마을로 가요!’

    니나 케베리히의 손이 통통 튄다.

    피아노 소리가 아이들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처럼 울린다.

    밤이 깊어 조금씩 졸음이 몰려들어도 끝까지 그 생기발랄함을 잃지 않는다.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아이들이 집 안을 뛰어다닌다.

    ‘소풍이야!’

    ‘아빠! 양말!’

    ‘엄마! 모자 주세요!’

    ‘빵이다! 이거 먹어도 돼요?’

    아침부터 부산스레 준비를 마친 가 족은 일렬로 걷기 시작한다.

    막내는 아빠에게 업혀서 가고 가장 의젓한 첫째는 엄마와 함께 제일 뒤 에서 동생들이 길을 잃지 않는지 확 인하며 들로 산으로 향한다.

    ‘엄마! 뱀이야!’

    ‘아빠! 저 구름 좀 봐! 토끼 닮았어!’

    ‘와! 시냇물이야!’

    ‘개구리다!’

    아이들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겁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긴장감조차 생길 정도다.

    니나 케베리히는 힘찬 스타카토로 아이들의 발걸음을, 반복되는 포르 테로 시냇물을 발견해 깜짝 놀라는 아이, 구름을 발견해 좋아하는 아이 들의 목소리를 그려냈다.

    그 연주를 듣고 있던 배도빈이 무 심코 웃고 말았다.

    ‘재밌단 말이야.’

    니나 케베리히의 재능은 무척 희귀 했다.

    무용수의 탄탄하고 가벼운 스텝 같은 타건도, 그녀만의 독특한 박자 감각도 모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었다.

    꾸며낸 화려함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의 발랄함.

    배도빈은 니나 케베리히보다 자신 의 18번 소나타를 더 즐겁게 표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여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연주를 듣는 수백만 명의 사람 모두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떠 올리며 즐거워했다.

    마치 익살스러운 동화를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구연동화를 펼친 니나 케베리히가 연주를 마쳤을 때.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은 수천 명의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프란츠 페터도 바로 뒤에 무대에서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라 했다.

    “들으셨어요?”

    배도빈은 당연한 질문을 하며 좋아하는 프란츠 페터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대단해요! 엄청! 어어엄청! 이런 연주는 처음 들었어요. 연주가 꼭 만화영화 보는 기분이에요!”

    “그래.”

    배도빈은 잔뜩 흥분한 프란츠의 기 분을 가라앉히고자 입을 열었다.

    “2라운드 진줄 못 하면 한동안 피아노 앞에서 살아야 할걸.”

    효과는 대단하여 프란츠의 어깨가 잔뜩 쳐졌다.

    그 모습이 배도빈을 또 한 번 즐 겁게 했는데, 죠엘 웨인이 배도빈을 찾았다.

    “보스.”

    그녀가 배도빈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찰스 왕세자가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배도빈이 의아해하자 그녀가 다시 금 배도빈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브라움 악장님 말고 찰스 아서 조 지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웨일스 공작이 연락도 없이 찾아왔단 말에 배도빈이 우선 그녀와 함께 복도로 나섰다.

    “무슨 일이에요?”

    “보스의 팬인데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언제쯤 괜찮으시 냐며. 어떻게 할까요?”

    굳이 만나볼 이유는 없었지만 배도빈은 자신을 만나 보기 위해 베를린 까지 나온 찰스 왕세자의 수고와 친 인척인 찰스 브라움의 면을 고려했다.

    “오늘 저녁에 별일 없죠?”

    “네.”

    “그럼 저녁에 보죠. WH호텔에 자 리 마련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온 배도빈은 프란츠의 연주를 듣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가우왕이 투덜댔다.

    “어떻게 된 거야? 나아진 게 없잖아?

    분명 수준급 연주였으나 3년 전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실력에 배도빈도 적잖이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배도빈과 가우왕은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페터를 탓했다.

    정작 관객들은 프란츠 페터의 연주를 즐겁게 들었지만, 두 기형적 천재가 작곡과 지휘 그리고 음악 전반 에 대한 공부로 하루하루 치였던 프

    란츠 페터가 실력을 유지하는 것만 으로도 대단하다는 걸 이해할 리 없었다.

    잠시 후.

    프란츠 페터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G장조 피아노 소나타 연주를 마치자 또 한 번 열렬한 반응 이 튀어나왔다.

    관객들은 오늘 누린 호사에 대해 저마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사 회를 맡은 이자벨 멀핀이 단상으로 나섰다.

    “이로써 다섯 참가자의 연주가 모 두 마무리되었습니다. 투표가 집계

    되는 동안 해설위원께서 오늘의 감 상을 전해주시겠습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먼저 마이 크를 잡았다.

    “베트호펜 기념 콩쿠르 심사를 맡으며 그만한 경연을 또 볼 수 있을 까 싶었는데 반년도 안 지나 그 예 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해설에 앞서 오늘 참가자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 지.”

    관객들이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동 조하여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먼저 도빈이. 말할 필요가 있나?

    지메르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푸르트벵글러라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입을 열었다.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가늠하는 기준은 여럿 있지만 글쎄요. 그렇게 압도적인 심상은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였습니다.”

    푸르트벵글러와 지메르만의 극찬에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다음은 가우왕인데…… 나는 감히 함머클라비어 소나타가 오늘에야 완 성되었다고 평하지.”

    “같은 생각이에요.”

    지메르만이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받았다.

    “지금까지 베토벤의 B 플랫 장조 소나타는 명확한 선율 대신 구조적 음악성을 지닌 소나타로 인식되었습니다. 감상보다는 분석이 앞섰죠.”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신약 성경으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였으니 까.”

    지메르만이 푸르트벵글러의 도움에 눈인사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나 왕이의 오늘 연주는 그것을 보다 예술적인 경지로 이끌어냈 습니다. 베토벤이 만약 오늘의 연주를 들었다면 무척이나 기뻐했겠죠.

    그가 바라던 연주였을 테니까요.”

    가우왕의 연주에 감동했던 관객과 시청자들은 두 전설의 해설로 가우왕이 어떤 일을 해냈는지 보다 명확 히 인지할 수 있었다.

    객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차채은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곧 모든 관객이 위대한 비루투오소 가우왕을 향해, 또 그를 알아본 해설 위원과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만들 어낸 위대한 베토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흥.”

    무대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가우왕은 콧대를 세우며 의기양양한 표 정으로 배도빈을 보다가, 평소 그답 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김 이 새고 말았다.

    “왜 말이 없어?”

    “사실이니까요.”

    “드디어 날 인정하는구만.”

    “예전부터 그랬다니까요.”

    “아니. 그랬으면 날 쫓아내려 하지 않았겠지.”

    “자꾸 지난 이야기 꺼낼 거예요?”

    배도빈과 가우왕이 투닥거리는 와 중에도 두 해설위원의 평은 계속되었다.

    “부르상의 연주는 자신감이 부족한 게 흠이었어.”

    “미스 터치도 잦았죠. 어쩌면 앞선 두 사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이 들었는데, 혹시나 그렇다면 마 음을 달리 먹어야 할 거예요.”

    “최선은 공연을 보러 온 관객에게,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다. 그러지 못 할 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해.”

    푸르트벵글러와 지메르만의 조언에 루리얼 부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니나 케베리히. 멋진 연주였지.”

    푸르트벵글러가 드물게 미소 지었다.

    “아주 재밌는 해석을 했더군. 여기에 사냥이란 별명을 붙이는 사람도 있는 걸 알고 있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연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 들판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전경.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목소 리와 따뜻한 분위기까지. 앞으로도 자신의 목소리로 연주해 주길 바라 지.”

    푸르트벵글러가 말을 마치며 당부하자 니나 케베리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따뜻하게 보던 지메르만 이 다음 차례에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페터 군은 크리크 콩쿠르에서 우 승했을 때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는데 오늘은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프란츠가 덜덜 떨었다.

    “재능 있는 사람이 노력하지 않는 것만큼 큰 죄도 없다. 저번 콩쿠르를 통해 기대가 컸다만 오늘은 실망 이구나.”

    “죄, 죄송합니다.”

    “뭐, 네 스승이 알아서 하겠지.”

    “끄으우.”

    프란츠 페터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 려 배도빈의 눈치를 살폈다.

    배도빈은 무척 화가 나 있었고 프 란츠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좌절했다.

    ‘난 죽을 거야.’

    배도빈의 특별 지도가 얼마나 자세 하고 넓은 범위를 다루는지 알기에 프란츠는 당분간 편히 지내는 건 포 기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섯 사람 모두 베트호펜을 연주했군.”

    “그러네요.”

    “케베리히는 자신만의 이야기로 잘 각색했고 가우왕은 그와 무척 깊이 대화한 느낌이었어.”

    “도빈 군은…… 본인이 나선 것 같고요.”

    배도빈이 당연하다는 듯 콧김을 내 뿜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을지 궁금하군. 이자벨.”

    푸르트벵글러가 신호를 주자 이자 벨 멀핀이 마이크를 잡았다.

    “네. 두 분 해설위원께 감사드리며 2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총 540 만 9,117분께서 참여해 주셨으며 가 장 좋았다고 생각하는 단 한 명의 피아니스트를 뽑아주신 결과입니다. 과연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영광이 누구에게 향할지! 결과 공개해 주시 기 바랍니다!”

    이자벨 멀핀의 힘찬 소개와 함께 무대 가운데 준비된 스크린에 2조 투표 결과가 나타났다.

    1st 가우왕(41.7%)

    2nd 배도빈(40.9%)

    3rd 니나 케베리히(15.1 %)

    4th 루리얼 부르상(12%)

    5th 프란츠 페터(11%)

    그 순간 오늘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배도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하핫하하하하!”

    가우왕의 웃음소리와 더불어 입술 과 눈썹을 꿈틀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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