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3화 (49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3화

    107. 악성(3)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 클라비어’.

    피아노가 청명히 울렸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종 소리처럼 탄탄하고 맑게, 건반은 종 안쪽의 공처럼 현을 때리며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가우왕은 비장하게 종을 때린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힘 있고 완벽 한 타건으로 다시 한번 종을 울렸다.

    시민들은 어리둥절하다.

    평생을 들어오던 종소리가 아니라 당황한다. 난해하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내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귀 기울였다.

    또 한 번의 종소리.

    치밀하고 집요하게 반복되고 변형 되는 가운데 이어지는 연타.

    범접할 수 없는 트릴과 옥타브 행진.

    포르티시시모(fortississimo: 매우 세게), 포르티시시모, 포르티시시모.

    베토벤이 강요해 놓은 패시지에 접 어들며 가우왕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단순히 근육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 라 단단하게 고정한 손목과 유연한 어깨 그리고 몸을 이동하며 무게를 더한 타건.

    가장 완벽한 자세.

    가우왕의 함머클라비어의 1악장이 끝난 순간, 관객들은 그간 그들이 함머클라비어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곡이었어?’

    ‘좀 난해한 느낌이었는데……

    그들의 의아함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가우왕이라는 걸출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했으며 하물며 그 가우왕은 배도빈의 곡과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그에 의해 비로소 온전히 표현된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200년도 전에 베토벤이 말하고 싶던 바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장성하여, 이 제는 자신을 뛰어넘은 제자의 연주에 흡족하게 웃었다.

    ‘50년 뒤라고 했으나 200년 뒤에 제대로 연주되었네요.’

    가우왕이 2악장을 시작했다.

    진중하고 격렬하며 비장한 베토벤 의 장난스러운 면모가 부각된다.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가 연속되며 또다시 집요한 변화로 익살스러움을 보인다.

    배도빈은 그가 만들었던 2악장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1악장과 대비되게 배치한 단 2도 하강. 그가 생각해도 완벽한 구조였다.

    짧은 2악장이 끝나고 마침내 3악장.

    함머클라비어에서 베토벤의 가장 솔직한 심정을 연주해야 했기에.

    가우왕의 눈빛이 달라졌다.

    ‘슬펐나.’

    그는 이미 오래 전 죽은 위대한 음악가에게 물었다.

    무거운, 소리보다 진중한 무엇인가 가 관객들의 가슴을 헤집었다.

    악성은 미래의, 새 시대의 음악가 들을 치하하며 응원하고 그들의 앞날에 영광이 비추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고 이미 오래 전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분했나.’

    가우왕은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의 가슴을 흔들었던 남자에게, 그를 피아노 앞에 앉히게 했던 남자에게 물었다.

    대체 그 고독 속에서 어떻게 싸워 왔냐고. 그 투쟁의 삶 속에서 어찌 단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냐고.

    위대한 악성이 진솔하게 담아낸 함 머클라비어 소나타 3악장.

    가우왕은 미래 피아니스트를 위해 남긴 이 파격적이면서도 완벽한 구조의 소나타를 어루만지며.

    악성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 고 있었다.

    가슴속으로 떨어지는 고독.

    낭만이라는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 어젖힌 장본인이면서 그 시대를 함께할 수 없었던 위대하고 고독한 음악가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베토벤을 향한 가우왕의 마음이 관 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놀랍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어느새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그 난해함 때문에 베토벤의 다른 소나타에 비해 그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다.

    그 완전하고 후대 소나타의 모든 경향을 뒤집어버린 음악성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었다.

    베토벤 이전까지의 모든 소나타의 경향을 박살 내버리고, 피아노에 선율 악기가 아닌 하나의 작은 오케스트라로서의 가능성을 부여했던 베토벤의 29번 소나타.

    그가 없었다면 리스트, 쇼팽, 브람 스, 슈만도 없었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특히 3악장을 음악의 정점 이자 시작으로 여기고 베토벤 역사 상 가장 장대한 모놀로그라 평하면 서도 대중에게는 사랑받지 못했다.

    푸르트벵글러는 그것을 함머클라비 어 소나타의 한계라고 여겼으나 그 간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 에 없었다.

    적어도 가우왕이 연주하는 함머클 라비어 소나타 3악장만은 이 순간 모든 이의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위대한 베토벤이 느꼈던 좌절과 절 망과 그럼에도 음악을 향한, 앞으로 의 음악을 위한 사명감과 갈증을 고 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이 소나타가 대중에게 덜 알려졌던 이유가 함머클라비어 소나 타의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한계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깊을 수 있나.’

    그 누가 이 연주를 듣고 십여 년 전만 해도 연주에 깊이가 없다는 평을 들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50년 뒤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곡'

    비록 2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렀으나.

    푸르트벵글러는 만약 베토벤이 신 이 되어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면 무척이나 흡족해하고 있으리 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대한 3악장이 끝나고.

    연주는 격정의 4악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우왕의 강력한 라이벌 막심 에바로트조차 멍하니 그의 연주에 매료 되어 있었고.

    최지훈은 다시 한번 그의 우상에게 감격했으며, 프란츠 페터는 두 볼을 감싸고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 이게 진짜 형이랑 가우왕 님.’

    감히 출전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들에게 조금은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일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프란츠가 슬쩍 고개를 돌려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배도빈을 보았다.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는 데도 도리어 즐거운 듯,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이 얼마나 넓은 그릇이란 말인가.

    프란츠는 이런 사람들 뒤에 연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 부담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침내 가우왕이 연주를 끝내자 생전 처음 받아보는 감동에 북받친 관객들이 전원 일어났다.

    “브라-보!”

    “브라-보!”

    루트비히홀이 떠나갈 듯한 환호 속에서 가우왕은 반지를 집어 끼곤 두 팔을 벌려 황제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왜 그렇게 떨어?”

    감상을 끝내고 눈을 뜬 배도빈이 오돌오돌 떠는 프란츠를 탓했다.

    “어, 어, 엄청나잖아요. 진짜 엄청 나잖아요. 형도 가우왕 님도 진짜, 진짜 어마어마하잖아요.”

    “당연하지.”

    “그 뒤에 어떻게 연주하라는 거예요.”

    프란츠 페터가 울먹이는데 대기실에 있던 루리얼 부르상이 무대 뒤로 들어섰다.

    그는 넋이 나간 채 매니저에 의해 이끌리다시피 옮겨지고 있었다.

    프란츠 페터의 외침을 들었는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길고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다다음이라 다행이다.”

    니나 케베리히마저 한술 거드니 루 리얼 부르상이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달려들었다.

    “나, 나 안 나가면 안 될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기회에 확실히 알려야지. 베토벤 기념 콩쿠르 못 봤어?”

    “비교만 당할 게 뻔하잖아!”

    “아냐. 넌 할 수 있어. 난 믿어. 네 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거 모두 지켜 봤잖아.”

    “적당해야지! 저런 곡 뒤에 뭘 보 이란 말이야!”

    부르상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금 매니저에게 달라붙었다.

    “나, 나 배 아픈 거 같아. 아니, 아파.”

    “갑자기?”

    “갑자기!”

    부르상이 억지를 부리고 있을 때 무대에서 내려와 복도를 통해 뒤로 돌아온 가우왕이 방으로 들어섰다.

    “뭐야.”

    상황을 파악한 그는 부르상을 한심 하게 내려다보며 벌레 보듯 했다.

    그 경멸 어린 시선이 부르상의 가 슴에 더욱 큰 상처를 안겼다.

    지금까지의 그였다면, 동료를 가져 본 적 없었던 과거의 그였다면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을 터였으나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머저리.”

    “네, 네? 저, 저요?”

    “알면서 뭘 물어?”

    “네, 네. 머저리입니다……

    부르상이 잔뜩 쭈그러들었다.

    가우왕은 그 모습에 더욱 인상을 썼다.

    “지금 시비 거는 거냐?”

    “네?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왜.”

    “그럼 내 연주를 듣고도 이러는 이유가 뭐야?”

    부르상은 가우왕이 무엇을 말하는 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베토벤이 말하잖아. 더 멋진 연주를 하라고. 피아니스트란 놈이 그렇게까지 잘 전달해 줬는데도 못 알아 먹어?”

    “베트호펜이에요.”

    “아무튼간.”

    “너 같은 놈들 응원하는 곡이잖아. 우리가 연주하는 곡 모두 그 인간이 만든 곡에서 발전해 왔잖아. 더 높이 갈 수 있다고. 더 멋진 연주할 수 있다고 귀 먹은 양반이 응원해 주는데 이러고 있으면 되겠어 안 되겠어.”

    배도빈이 가우왕의 머리를 향해 목 도리를 집어 던졌다.

    가우왕은 목도리에 감긴 채 부르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개 들어.”

    부르상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가우왕의 부리부리한 눈에 또 다시 겁을 먹었지만 가우왕은 그의 양팔을 꽉 잡으며 흔들었다.

    “가슴 피고 올라가서 네 연주를 보여. 여기서 도망치면 넌 피아니스트 가 아니야. 떨어진 피아니스트를 무 시하는 비겁한 놈일 뿐이야.”

    “알아들었으면 빨리 올라가서 내 위대함을 강조해 봐. 이 나와 일반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지.”

    “네, 네!”

    루리얼 부르상이 어리둥절한 채 무대로 오르자 가우왕이 배도빈 옆에 앉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오지랖이 넓었어요?”

    “시끄러워.”

    가우왕이 팔짱을 꼈다.

    루리얼 부르상이 연주를 시작했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뽑은 스무 명의 피아니스트다운 훌륭한 기량을 펼쳤다.

    그 모습 지켜보다가 배도빈이 슬쩍 입을 열었다.

    “잘 들었어요.”

    무심한 듯 뱉은 그 말에 가우왕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씨익 웃는다.

    “이제야 인정하는구만. 퍼스트는 내 자리라고.”

    “그거 말고요.”

    “그럼 뭘.”

    “사교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제법 친화력이 있는 것 같다고요.”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에 대한 말이었지만 전말을 모르는 가우왕으로서는 부르상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요. 더 보기 좋으니까.”

    “흥.”

    가우왕이 다시 팔짱을 꼈고.

    배도빈은 턱을 괸 채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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