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2화 (492/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2화

107. 악성(2)

‘녀석.’

해설을 맡은 푸르트벵글러는 ‘배도빈 콩쿠르’를 몹시 못마땅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배도빈의 연주를 듣는 순간 그런 마음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장성한 후계자의 박력 넘치는 연주에 오래 전 모습이 떠올라 그저 즐 거울 뿐이었다.

이런 연주를 하는 녀석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시금 접하니 그 재능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녀석을 악기로 지휘하고 싶은 욕구 마저 일고 있었다.

‘한번 알아봐야겠어.’

그는 어떤 곡이 적당할지 찾아 제 안해 볼 생각으로 어떤 평을 남길지 적어두었다.

한편 그 옆에 앉아 있던 완전무결 한 피아니스트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완벽하다 고 정평이 나 있고 실제로 그녀 본 인도 완벽주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배도빈과 그녀가 추구하는 방향은 너무나 달랐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악보 내에서 완벽을 추구했다. 감정은 절제하고 필요하다면 얼음처럼 차갑게 정제하 여 표출했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내 온전히 현신시키는, 그야말로 완전 무결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배도빈은 달랐다.

완벽을 추구했지만 그의 표현력은 강요와 같았다. 무자비한 힘으로 듣는 이를 짓밟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럼에도 조금도 부담스럽거나 거 부감이 들진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진솔하여, 아니, 절박해 보인 탓이다.

음악은 대화.

배도빈의 절규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알 수 없는 동정심을 유발했다.

처절하게 내뱉는 번뇌의 외침.

지독한 좌절 속에서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포효는 언뜻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을 듣다 보면 어느새 자신을 투영하게 되었다. 좌절했던 경험, 절망했던 과거를 떠올리 게 되며 응원하게 되었다.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에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배도빈을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여겼으면서도 또 한 번 그의 기량에 감탄할 수밖 에 없었다.

배도빈이 일어섰다.

그를 향한 환호에 루트비히홀이 떠 나갈 것 같았다.

순종적이게 된 백성들을 바라보며 마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무대 뒤로 고개를 돌려 가우왕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연주를 들려주었음에도 건 방진 지상의 황제는 투지를 보이고 있었다.

배도빈은 그럴 줄 알았다며 싱긋 웃어 보였고 가우왕에게 그의 행동 은 자극이 될 뿐이었다.

“다음은 가우왕 씨의 무대가 준비 되어 있습니다.”

이자벨 멀핀이 다음 순서를 안내하 자 가우왕이 계단에 올랐다.

“꺄아아아!”

“진짜 가우왕이다!”

붉은 재킷과 가죽 팬츠, 같은 색상 의 셔츠를 풀어헤친 가우왕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이 열광했다.

ㄴ 이게 무슨 호사야 ㅠㅠ 배도빈 뒤에 가우왕이라니 ㅠㅠ

ㄴ 가짜 가우왕이 사라졌다!

ㄴ 이게 가우왕이지.

ㄴ 어우. 가슴 좀 여미지. 보긴 좋다만…….

관객들을 향해 건방진 미소를 보인 가우왕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반지를 빼내 보면대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어떤 곡이어야 할까.’

그의 주 레퍼토리인 이고르 스트라 빈스키의 페트루슈카도 좋을 테고, 파가니니 변주곡도 괜찮은 선택지일 테지만.

가우왕과 배도빈 사이에 ‘베토벤 소나타’보다 특별한 곡은 없었다.

가우왕은 배도빈의 ‘비창’으로 자 신의 부족함을 깨달았고 베토벤의 소나타야말로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종합적으로 선보이기에 가장 적절한 곡이기 때문.

가우왕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다 는, 발표 당시 베토벤 본인을 제외 하곤 아무도 연주해내지 못했던 29 번 소나타를 준비했다.

작품 번호 106. 부제 함머클라비어.

가우왕이 건반을 누른 순간, 배도빈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1818년 빈.

“이야, 이거 완전 물건이네요. 그렇죠 선생님?”

이것이 새로운 피아노인가.

안쪽을 살펴보니 작은 망치가 건반 과 이어져 있어, 누르면 현을 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과연 하머클라비어 1)

< 1)하머클라비 어 (Hammer(망치)+K1 a vier (피아노)): 하프시코드, 클라비 코드와 달리 강약 조절이 가능한 현 대식 형태를 갖춘 피아노.>

런던의 브로드우드가 보내온 새로 운 피아노는 붉은빛을 띄는 갈색으로 제법 고혹적인 자태를 내고 있다.

“음량도 크고 페달 활용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르디난트 리스가 뭐라 말하는 듯해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뭐라 떠들 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 뒤에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테냐.”

“아, 죄송합니다. 너무 들떠서.”

녀석이 가르친 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 들떠서 이것저것 말했던 모양.

더 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드니 이 새로운 피아노의 특징을 설명하 기 시작한다.

음량이 훨씬 더 크고 울림도 좋으며 음을 닫고 여는 기능을 가진 서 스테인 페달과 댐퍼 페달(울림)의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연주를 보다 풍성하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인데.

빌어먹을.

그러한 피아노를 들을 수 없다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귀를 탓할 뿐 이다.

“이런 느낌은 어떤가.”

하머클라비어 앞에 앉아, 상상력을 발휘해 몇 번 연주하니 페르디난트가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좋아하지 말고 설명을 하라고. 설명을!”

“이 부분은 선생님 생각과 조금 달라요. 말씀하신 대로 연주되려면 아마 이렇게……. 아, 맞네요.”

“좋아.”

페르디난트가 곁에 있어 다행이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녀석 덕분에 막막했던 점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악기로 선생님의 곡을 연주하 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네요.”

마찬가지.

지금 만들고 있는 29번째 소나타를 이 악기로 연주할 것으로 상정하 고 완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나는 듣지 못하더라도.

페르디난트나 체르니 같은 녀석들 이 훌륭히 연주해 준다면 그것으로 괜찮겠지.

“이제 가 봐.”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페르디난트가 떠나고 악보를 펼쳤다.

개량된 페달이라.

타건과 함께 피아노의 표현력을 한 층 더 끌어올릴 수 있을 테고, 비로 소 내가 원하던 형태를 이룰 수 있을 듯싶다.

“후.”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길 바랐건만, 세상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할 수 없는 소리가 태어나고 있다.

귀가 닫히기 전, 어떻게든 모든 소리를 기억하고자 반복했던 일들도 조금씩 그 빛을 잃고 있다.

언제까지 곡을 계속 쓸 수 있을 것인지 모를 일.

언젠가는 내 곡들이 흔하디흔한 곡으로 취급당할 수도, 고루한 음악가 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페르디난 트와 체르니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음악가 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소리를 듣고 그들만의 영역에서 음악을 발전시키고 있다.

나는 이대로 유물이 되는가.

“……아니. 아니지.”

루트비히의 이름이 용납할 수 없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나갈 후학들을 위한, 또 이 나의 한계를 박살내버리기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1년 후.

악보를 받아든 페르디난트와 체르 니의 표정이 만족스럽다.

“세, 세상에……

“믿을 수 없습니다. 이건 연주할 수 없는 곡이에요.”

두 녀석 모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 면서도 고개를 젓는 걸 보니 더욱 즐겁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으셔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페, 페르디난트의 말이 맞아요. 이 런 곡을 연주할 수 있을 리가……

적당히 놀랐으면 내 제자답게 기개를 보여주길 바랐건만, 앓는 소리나 내어 하머클라비어 앞에 앉았다.

1악장만을 연주하고 돌아보니 아니 나 다를까.

“맙소사, 하나님.”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요, 선생님! 장담컨대 지금 유럽에서 선생님 같은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체르니의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흥분한 것만은 확실하다.

저 유약한 녀석이 목에 핏대를 세우니 말이다.

페르디난트가 악보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어. 피아노가 이렇게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다니. 이건 마치.”

“맞아. 마치 10개의 악기가 팀을 이룬 것 같지 않나. 그래! 하나의, 하나의 오케스트라였어!”

“그래! 정확한 표현이야.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어.”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은 피아노의 가능성을 여신 거예요!”

“천천히들 말해! 그러지 못하겠으면 적어!”

흥분한 녀석들이 뭐라는지 알 수 없어 다그치자 허겁지겁 종이를 찾아 글을 휘갈긴다.

기다리며 다시 연주를 잇다가 2악장을 끝내고 돌아보니 쓰던 글은 내팽겨 쳐놓고 또 손뼉을 치고 있다.

못 말리는 놈들이다.

“다시, 다시 봐도 믿을 수 없어요.

이 파격적인 해체. 이런 소나타는 없었습니다.”

“서주, 서주가 좋아요. 맙소사!  이런 게 가능하다면 혹시.”

“그래. 선율이 중요한 게 아니야. 높이도 음색도 더욱 확장시킬 수 있어. 아니, 이미 선생님께서 완성본을 보여주시니 않았나!”

녀석들이 뭐라 떠드는지 모르겠으니 답답해서 결론부터 물었다.

“그래서.”

페르디난트와 체르니가 호들갑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어때. 영국에서도 통할 것 같나?”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당장, 당장 미팅 날짜를 잡겠습니다. 아르타리아라는 사람이 좋겠어요. 런던에서도 알아 보겠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정말이 지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의 위업을 넘어서 피아노의 역사를 새롭게 쓰 신 거예요!”

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15년에도 내 곡을 런던에 소개했던 페르디난트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그곳에서 오래 활동하기도 했으며 인맥도 여럿 두고 있으니.

“내일, 내일 당장 그를 불러오겠습다."

페르디난트가 갑자기 뛰쳐나갔고 체르니는 악보 위에 코를 박고 이리저리 탐독하고 있다.

“ 해봐.”

녀석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예?”

“뭘 그러고 있어. 연습을 해봐야 칠 수 있을 거 아니야.”

“제, 제가 이걸 연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시끄럽다.”

녀석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자니 만족스럽지 못한데, 천재인 이 녀석 이라면 언젠가 분명.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연주를 분명 넘어서리라.

무척 기대되고, 체르니가 이 곡을 완벽히 연주해내는 것을 듣고 싶어 참을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건방진 제자들에게 스승의 위대함을 알려준 것으로 만족 해야 할 듯하다.

다음 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에스트로.”

페르디난트가 전부터 언급했던 출판업자 아르타리아를 데려왔다.

예의 바른 모습이나 페르디난트의 소개도 있기에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상당히 고양되어 있는 느낌이다.

“어디 불편하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편히 계시오.”

“하하. 실은 부끄럽게도 몹시 흥분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는 길 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지요. 위대한 베트호펜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아첨이나 하는 인간은 경멸하나 솔 직하고 바른 친구로 보인다.

“어디, 내 곡을 어떻게 팔 건지 말 해보시오.”

“예.”

아르타리아가 자기가 출판했던 몇 몇 악보를 펼쳐 보였다.

상당히 깔끔하였고 종이 질도 좋다.

“최고급품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당연하지만 출판 전 미팅을 자주 가져 혹시나 발생할 오류도 방지할 테 고요.”

내 예술적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오기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것을 염두하고 있다는 태도로 보인다.

페르디난트에게 조언을 받았든, 스스로 조사한 내용이든 대략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선은 합격점을 주었다.

“다만 런던에서는……

막힘없이 설명하던 그가 말끝을 흐려 인상을 쓰자 페르디난트가 대신 입을 열었다.

“선생님, 런던에서 출판할 땐 곡을 분리해 발표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뭐라고?”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는 완벽합니다. 완벽하지만 그 웅장함과 방대함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진가를 잘 아는 빈과 본토에서는 받아들여질 테지만 런던에서는 아직 명성이 덜 퍼졌으니, 4악장만 떼서 따로 발표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두 곡을 내는 거니 수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쓰읍.”

이 내가 돈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사실이나 곡을 분절해 발표하는 이유가 돈을 위해서라니.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떠벌린 아르타리아를 노려보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페르디난트가 다급히 나섰다.

“런던 사람들은 아직 선생님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차피 나중에는 하나의 곡이란 걸 알게 될 테니 지 금은 그들과 소통하는 느낌으로 진 행하시죠.”

그러나 페르디난트의 말은 옳다.

런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면 쉽게 접근해야 할 터.

그렇게 하라 이른 뒤 악보를 꺼냈다.

그것을 페르디난트에게 넘겼고, 녀석이 다시 아르타리아에게 보였다.

“하머클라비어 소나타. 멋진 이름 입니다. 최신 피아노를 활용한 소나 타란 느낌이 물씬 느껴지네요.”

“미래를 위한 소나타요.”1)

1)베토벤은 아르타리아에게 하머클 라비어 소나타 악보를 넘기며, 50년 뒤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곡이라 소개했다.

그만큼 기존 소나타의 룰을 파괴하는 혁신적이면서도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인데 출판 당시 베토벤 이외에는 아무도 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천재이자 체르 니의 제자, 베토벤의 열렬한 팬이었던 프란츠 리스트가 연주해내는 데 성공했다(리스트는 베토벤 하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오마주한 작품을 내 기도 했다).

그러나 하머클라비어 소나타의 진 정한 의미는 그의 사후 100년이 흐른 시점에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예측을 뛰어넘은 천재와 그의 진가가 전해지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예?”

“여기 있는 페르디난트나 체르니라 든가. 내가 죽은 이후에도 기량을 갈고 닦을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소나타라 했소.”

피아노의 가능성을 펼치기 위해 만 든 이 곡은.

미래의 피아니스트들이 음악을, 피아노를, 그들의 기량을 어디까지 갈고 닦을 수 있을지 시험하는 곡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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