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91화 (49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1화

    107. 악성(1)

    ‘ 부활.’

    난데없이 발표된 그 곡을 듣는 순 간 직감했다.

    엉터리 곡만 나돌던 시시껄렁한 세 상에 마침내 작곡가다운 작곡가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곡이었다.

    지금껏 나를 이렇게 뒤흔들었던,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끼게 했던 작곡가는 오직 그뿐이었다.

    건반 위의 구도자.

    악보 위에 잠언을 적어 놓았던 위 대한 베토벤. 그가 마치 살아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 뭐?’

    ‘정말이야. 네 살이더라니까.’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대의 그 어떤 이도 나를 충족시 킬 수 없었건만, 고작 네 살 꼬마가 ‘부활’과 같은 곡을 썼다고 믿을 수 없었다.

    불가능한 일로 여기면서도 ‘부활’ 이 전해준 충격만은 사실이었기에 그 꼬맹이가, 혹은 엑스톤이 사기를 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부활’을 누가 썼는지만이 중요했다.

    시간이 흐르고.

    꼬맹이는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해 나갔다. 그럴수록 녀석에 대한 갈망 은 짙어져만 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이 가우왕이 녀석의 곡을 연주한다면 분명 이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에요. 음 표현이 덜 됐어요.’

    그러나 녀석은 내게 만족하지 않았다.

    녀석만이 내 실력을 완전히 드러낼 곡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녀 석에겐 내가 유일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 빌어먹을 엉터리 세상에서 겨우 발견한 희망이, 나를 다른 떨거지들 과 같이 보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피아니스트 가우왕은 최고다.

    글렌 영감, 사카모토 영감, 미카엘, 막심 그리고 크리스틴 할망구마저도 결코 내 앞에 있을 수 없었다.

    최고가 아니어서야 어떻게 관객들 앞에서 자랑스레 연주할 수 있을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최고다.

    최고의 나를 거부하다니.

    다른 이유도 아니고 실력이 부족해 서라니 참을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말하는 법.

    경합을 벌였고.

    재능의 차이를 느꼈다.

    고작해야 여덟 살 먹은 꼬맹이가 펼치는 베토벤 C단조 소나타는 지 금껏 알고 있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상식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내가.

    이 가우왕이 틀렸던 것이다.

    화가 났다.

    지금껏 부족함을 모르고 최고라 자 부했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여덟 살 꼬맹이도 아는 걸 몰랐다 니, 내 공연을 찾았던 이들을 무슨 낯짝으로 볼 테며 어떤 연주를 할 것인가.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피아니스트로 살 아갈 면목이 없었다.

    내 연주를 즐기는 이들을 위해서라 도 지금까지의 나를 버려야 했다.

    자신(自新).

    스스로 다시 올라서야 했다.

    자존( 自尊).

    피아노 없이는 살 수 없었기에 그 래야만 했고 쓸데없는 아집 따위 버 려야 했고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한 마음이 자신(自信).

    피아노를 처음 대했던 다섯 살 무 렵부터 그 마음만으로 이 자리에 올 라섰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로 과 거 그 어떤 이도 이르지 못한 곳에 발을 내디뎠고.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 나를 제대 로 세울 수 있었다.

    한 번 좌절하게 만들고, 끝내 나를 완성시킨 남자.

    오늘은 그에게 나를 증명하는 날이다.

    배도빈이 어떤 연주를 하든 반드시 그보다 좋은 연주를 펼쳐, 녀석이 마음 놓고 지휘봉을 휘두를 수 있게, 악보를 채워나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더욱 완벽해질 테 고 위대한 음악가는 넘치는 재능으로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줄여, 온전해질 터.

    ‘뭐든 해봐.’

    네가 아무리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 해도 기필코 쫓아갈 것이다.

    너가 내게 그랬듯이.

    너를 보다 완전하게 만드리라.

    ***

    “보스, 준비되시면 입장해 주세요.”

    “네.”

    피로한 눈을 감았다.

    대교향곡을 비롯한 서너 개의 곡을 만드는 일과 크루즈와 음악원 설립 등 악단 운영, 경조사 등으로 너무 나 바쁘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어리고 젊은 음악가들이 음악을 향 한 순수한 열정으로 성장하고 그들의 음악을 수십, 수백만 명이 즐기 고 있으니 참으로 바람직하다.

    몇몇 호사가들은 당분간 음악의 흐름이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지만.

    보라.

    아리엘 얀스는 ‘아마데우스’로 지금껏 인류가 상상해 보지 않았던 왈 츠를 선보였고.

    가우왕은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로 감히 그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경지에 도달했다.

    최지훈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프란츠도 모두 각자의 길을 걸어 자 신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갈 터.

    그렇게 음악은 또 한 번 변화하고 성장해 나갈 것이다.

    신이니 마왕이니.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이들이 나를 추앙하고 독보적인 위치에 두고 싶다 한들 음악은 대화.

    내 목소리만이 진실로 진리로 유일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향 대한민국과 일본 등에서 나를 악성으로 여기며 신적인 존재로 추 켜세우나 결국 그 뒤에 뛰어난 음악 가들이 무수히 나왔듯.

    음악은 단 한 사람의 역량으로 발전하진 않는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류하며 보다 완전한 방향으로 걸어나갈 뿐.

    수없이 많은 음악가가 그들만의 방 향으로 뻗어나가야만 아름다운 구 (球)를 이룬다.

    음악이라는 둥근 보석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슈베르트와 부르크뮐러와 멘델스존, 쇼팽, 슈만, 리스트, 바그 너, 브루크너, 브람스, 생상스, 차이 코프스키, 드보르자크, 말러, 드뷔 시,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라흐마 니노프,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쇼 스타코비치, 번스타인을 듣고 경악 과 환희에 찼던 것이고.

    사카모토를 만나 행복했던 것이고.

    푸르트벵글러를 접해 기뻤고 단원 들을 마주해 흡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우왕, 찰스, 나윤희, 왕소소, 아 리엘, 최지훈, 마르코, 프란츠, 타마 키, 료코와 같은 벗들이 각자의 분 야에서 나를 뛰어넘는, 나를 벗어나는 지금이 무척이나 기분 좋다.

    그들로 인해 멋진 음악을 감상할 수 있고 또한 더욱 멋진 음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기특한 후배, 아니, 벗들이.

    특히 가우왕과 최지훈이 최근 상당 히 건방져진 것도 사실이다.

    눈을 떠 대기실을 나섰다.

    “보스 힘내세요!”

    이 내가 언제부터 경연에 나서서 힘내라는 말을 들었을까.

    응원의 말을 던진 직원에게 물었다.

    “이번에 누가 우승할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히 보스죠!”

    아첨이다.

    이런 아첨이 아니다.

    “그렇죠?”

    “그, 그럼요.”

    이런 아첨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 에서부터 솟아나는 존경과 경의의 말이어야 한다.

    “저 말고 누가 우승하겠어요.”

    “맞아요!”

    통탄스럽게도 이 사람뿐만이 아니 라 많은 이가 나를, 이 배도빈을 의 심하고 있다.

    기가 찰 노릇.

    무대로 향해 발을 재촉했다.

    “와아아아아!”

    “마에스트로!”

    무대에 오른 순간 폭음과 같은 크기로 관객들이 환호했다.

    그들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곧 최고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늘은 열정을 다해 이 자리에 모인 벗들을 치하함과 동시에 다시 한 번 각인시킬 것이다.

    내가 누군지.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 그 가슴에 새겨 넣으리라.

    작품 번호 57. 도단조 소나타.

    진중하게. 이어서 날아가듯이.

    배도빈이 연주를 시작한 순간.

    그 진중한 분위기에 기대와 설렘으로 수선스러웠던 루트비히홀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한 음, 한 음 심상을 고조시켰고 마왕이 펼치는 마성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음산하면서도 진중한 분위기를 이 끄는 주제와 그 뒤에 반음을 올려 이어지는 변화와 함께.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백성들은 절망처럼 내리는 빗속에 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때때로 빗발이 거세지고 대지가 요 동친다. 간간히 방 안을 비추던 촛 불마저 이내 꺼지고 만다.

    마왕이 온다.

    강철의 육신으로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군.

    그를 향한 두려움이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어울려 절망으로 치닫는다.

    단순한 주제는 예측할 수 없이 변 화하여 백성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 지 알려주었고.

    배도빈의 강렬한 타건은 맹수처럼 뛰어들어 관객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려 댔다.

    빗발이 잠시 약해지고.

    이어서 내리치는 우레와도 같은 폭음.

    배도빈의 폭력적인 연주가 마왕의 재림을 알렸다.

    ‘미친놈.’

    대기실에 있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연주를 듣던 가우왕은 배도빈의 등을 보며 인상을 썼다.

    평범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타건은 야수와도 같았다. 폭력적이 고 저항할 수 없으며 무자비했다.

    같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다른 이의 배는 더 큰 소리를 내는 배도빈 의 연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도 그러했지만 몸이 성장 한 지금.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며 파괴력을 보였던 그의 연주는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가우왕도 최지훈도 그리고 그의 연주를 지켜보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백성들이 기억해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누구였는지, 누구에게 지배받고 있었는지.

    그가 허락한 순간의 평화에 젖어 감히 그를 의심하고 있었음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야수의 포효를 듣는 순간부터.

    의식할 수 없는 빠르기로 가슴을 난도질 당하고, 저항할 힘 따위 처 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에게 다시 영혼을 빼앗겨 있었다.

    20 분.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빠른 연주 가 절정으로 치달아 한줌 남은 이성 마저 짓이겼을 때.

    마왕의 손이 멈추었고.

    “브라-보!”

    “브라-보!”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그의 백성들 모두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연주를 마친 배도빈은 앉은 채 고 개를 들곤 무지한 백성들이 계몽되었음을 즐겼다.

    ㄴ 야잌 ㅋㅋ 개미친 ㅋㅋㅋㅋㅋㅋ

    ㄴ 중이염이 나았습니다.

    ㄴ 피아니스트 활동 안 해서 실력 줄었을 거라맼ㅋㅋㅋㅋㅋ 미쳤잖앜ㅋㅋㅋㅋ

    ㄴ 왤케 빠르냐? 원래 아무리 빨라 도 23~24분 정도 걸리는 곡 아님?

    ㄴ 그런 주제에 음 하나하나 때려박 히는 거봐 와 진짜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ㄴ 마왕님, 저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ㄴ 진짜 자비 없는 속주네.

    ㄴ 진짜 무서운 건 속주도 속주인데 20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임. 3분짜리 곡 듣는 기분이야.

    ㄴ 배도빈 음악 그만해야 한다.

    ㄴ 뭔 소리야?

    ㄴ 오직 ‘그’만 해야......

    ㄴ 앜ㅋㅋㅋㅋㅋㅋㅋㅋ

    ㄴ 미친 이런 애가 왜 지휘봉을 잡 고 있어? 어? 빨리 피아노 앞으로 못 가?

    ㄴ 지휘도 쩔어서…….

    ㄴ 그래서 나왔잖아.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피아니스트는 가우왕도 최지훈도 아니라 자기라고.

    ㄴ 대체 얼마나 프라이드가 높으면 내가 최고고 다른 연주는 버러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ㄴ 나 이제 열정은 다른 사람 연주 못 듣는다……. 비창, 월광, 열정까지 미쳐…….

    가우왕과 같이 배도빈의 피아노를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없어 무대 뒤로 나왔던 프란츠 페터는 무대와 가우왕을 번갈아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더 멋있어졌잖아!”

    마찬가지로 무대 뒤에 있었던 니나 케베리히도 박수를 보냈다.

    모든 이가 믿을 수 없는 연주에 고개를 젓는 도중 객석에 앉아 있던 최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던 그가 또 한 걸음 나아갔음을 확인했기에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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