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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90화 (49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90화

    106. 베를린 대전(5)

    절망하고 있던 프란츠 페터도 엘리자베타의 연주에 감격하여 전력을 다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대단해요! 진짜! 지이이인짜 대단해요!”

    “정말.”

    최지훈도 맞장구를 쳤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프로코피 예프 소나타는 고도로 훈련된 피아니스트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 지 알려주는 듯했다.

    “손을 어떻게 저렇게 쓸 수 있어요? 막 다, 다 따로 움직이는 거 같아요.”

    표현력이 부족한 프란츠 페터로서는 최선의 해설이었고 또 정확한 말 이었다.

    ‘사카모토가 점찍은 이유가 있었어.’

    배도빈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제1회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이후 사카모토는 엘리자베타를 제자 로 들였다.

    당시에는 크게 생각지 않았던 배도빈으로서도 사카모토의 눈이 정확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애가 왜 우승 경력이 없는 거야?”

    “형들이 다 하셨잖아요.”

    “아.”

    페터의 말에 배도빈이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차채은, 한이슬, 정세윤도 나란히 앉아 감탄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한이슬이 박수를 보낼 때 정세윤은 알 듯 말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고 민했다.

    “뭔가 난해하네요. 대단한 건 알겠는데……

    정세윤 기자의 의문에 차채은이 고 개를 돌렸다.

    “엄청 대단한 거예요. 저렇게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에요.”

    “실제로 연주해 보면 정말 어려운 곡이에요.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 않으면 더더욱. 그런 곡을 퍼펙트하게 연주했으니까.”

    한이슬도 거들었다.

    “독립이요?”

    정세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독립.”

    한이슬이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움 직였다.

    “우리가 생각할 땐 다 따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움직여 보면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은 한정적이에요.”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탓이고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인 탓이었다.

    엄지부터 검지 중지 약지 소지를 차례로 움직이는 일은 쉽지만 순서 가 바뀌고 규칙성이 옅어질수록, 또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손가락이 많아질수록 어려워진다.

    음형이 복잡하고 다양한 곡일수록 난이도가 높은 이유는 인지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고, 손가락을 따로 쓰는 데 익숙하지 못 하기 때문.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그럼요!”

    차채은이 펄쩍 뛰었다.

    “연습곡을 왜 연습하는데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 구나 하농과 같은 스케일 또는 연습곡을 반복해 연주한다.

    여러 곡에서 반복되어 사용된 음형을 연습하기 위함인데 대개 연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기 때문.

    그러나 모든 곡이 연속적일 수 없다.

    도레미파솔이 일반적이라면 도레미 도파솔과 같이 변형이 일어났을 때 연주자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다양한 패턴을 미리 숙달하기 위해 하농과 같은 연습곡이 필요한 것이다.

    정세윤이 좀 더 설명을 바라는 듯해 차채은은 엘리자베타의 기량을 좀 더 쉽게 비유할 방법을 떠올렸다.

    “기자님 타이핑 하실 때 손가락 몇 개 쓰세요?”

    “다 쓰는 거 같은데.”

    “그럼 키보드 처음 다루는 사람은요?”

    “아.”

    정세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키보드를 처음 다루는 사람은 심하 면 검지 두 개로 하나하나 찾아가며 눌러야 했고 익숙한 사람일수록 여 러 손가락을 사용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아무리 익숙 한 사람이라도 열 손가락 모두 동시 에 다른 걸 찾아 두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정확한 문장을 적을 수 있는.”

    “……그럴 수가 있어요?”

    한이슬이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열 개의 손가락이 각자 다른 악기, 연주자처럼 움직여야 가능한 연주.

    “피아노는 작은 오케스트라예요. 피아니스트는 지휘자가 되어 10개 악기를 연주하고.”

    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한 엘리자베타의 기량은 과연 정상을 노릴 만했다.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정세윤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대단한지는 알겠는데 여기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 만 모였잖아요.”

    “맞아요.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전부 모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연주 하면서 건반마다 표현력을 담아, 단 한 번의 미스도 없이 연주하는 사람 은 저 중에도 흔치 않죠.”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라고 해도 미스 터치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것조차 공연의 일부로 여길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테크닉은 정말 드물어요.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과소평가 받는 피아니스트예요.”

    “하지만 결국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에는 실패했잖아요.”

    “그건 가우왕이……

    한이슬이 적당한 표현을 찾고 있을 때 차채은이 나섰다.

    “미친놈이래서 가능하대요.”

    한이슬과 정세윤이 황당하여 쳐다 보자 차채은이 웃으며 답했다.

    “도빈 오빠가 한 말이에요.”

    【완벽한 연주를 선보인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로 무관의 불 명예를 불식시키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최고 수준 의 테크니션.]

    【크리스틴 지메르만, “힘도 기교도 뛰어났다. 탄탄한 타건은 스탈린그 라드를 정교하게 표현해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37.4퍼센 트의 득표율을 보이며 조 1위로 2 라운드 진출]

    【라이징스타 엔터테인먼트 소속 소 망사랑 킴. 20.1 퍼센트를 기록하며 조 2위로 2라운드 안착.]

    【엘리자베타, “2라운드에서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해 기대감 고취]

    【내일. 배도빈. 가우왕. 니나 케베 리히 격돌!]

    배도빈 콩쿠르 1라운드 1차전이 종료되었다.

    압도적인 표 차이를 보인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조 1위로, 김소망 사랑이 치열한 접전 끝에 조 2위로 2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유망한 피아니스트들의 뛰어난 연주는 크게 호응받았고 특히 엘리자 베타의 연주는 지금까지 그녀가 조

    명받지 못했던 것이 의아스럽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모두 2월 6 일 2조 경합의 전야제로 취급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음악 팬들은 배도빈, 가우왕, 루리 얼 부르상, 니나 케베리히, 프란츠 페터의 대결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봐?”

    왕가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 신을 바라보는 아내에게 물었다.

    “못생겨 졌어.”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슨 말이야?”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런다고 알아줄 리도 없고.”

    왕예나의 말에 왕가우가 입을 샐죽이곤 물을 마셨다.

    장인, 장모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 이고 싶었던 왕가우는 그들이 지적 하던 ‘꼴사나운 모습’을 조금이나마 고치고자 했다.

    장인, 장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면, 그리하여 아내가 가족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평소 아끼던 새빨간 슈츠도 선글라 스도 평생을 관리해 온 장발도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냥 이미지에 변화도 주려고 했을 뿐이야.”

    “거짓말.”

    아내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에 거짓 말을 했지만, 왕예나가 그의 진심을 모를 리 없었다.

    “당신이 그럴 리 없잖아.”

    피아니스트 가우왕을 공격하는 이 들이 가장 먼저, 쉽게 들먹이는 것이 그의 도를 지나친 패션이었다.

    엄격한 룰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품위를 지키려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우왕의 패션은 종종지 적당하곤 했다.

    그는 가죽 재킷을 입고 연주를 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망사 셔츠를 입 고 나와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가우왕’은 그것이 곡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심오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격당했고 비하당했다.

    그럼에도 가우왕은 예술가로서의 고집을 꺾지 않고 끝끝내 정상에 오른 것이었다.

    왕예나는 그런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버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모습으로 인정받는다고 해도 자기 모습이 아니잖아. 평생 그러고 살 거야?”

    가우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이혼해.”

    “뭐?”

    “나 때문에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사라지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보고 살아?”

    “예나.”

    “난 그런 꼴 못 봐.”

    왕예나의 단호한 태도와 진실된 눈

    빛에 왕가우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배운 사람은 다르다니까.”

    “그럼.”

    왕예나가 콧대를 높인 뒤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즐거워하 다 지쳐 눕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당신 입을 옷 구해놨어.”

    “ 옷?”

    “응. 잠깐만.”

    왕예나가 벌떡 일어나 남편의 드레스룸 한쪽에 숨겨두었던 옷을 가져 왔다.

    “어때?”

    왕가우가 그것을 보더니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완벽해.”

    배도빈 콩쿠르 두 번째 날을 맞이 해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 일대는 심각한 교통체증을 겪고 있었다.

    배도빈과 가우왕이 재대결을 직접 보기 위해 클래식 음악 팬들이 집결 한 탓이었다.

    몇 해 전 대규모 확장 공사를 하여 3,500석을 확보한 루트비히홀조 차 그들을 모두 감당할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도빈홀과 실내악 공연장, 제1연습실, 제2연습실, 대강당까지 자리를 마련해 찾아온 이들이 화면과 스피커를 통해서라도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게 배려했지만 그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대체 뭔 난리야?”

    취재를 나온 이시하라 린이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질겁하고 말았다.

    빼곡하게 들어찬 인파에 도저히 무 엇을 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배도빈 콩쿠르를 찾은 유명 인사들 로부터 어떻게든 인터뷰를 시도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새벽부터 나와 있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길이나 터. 자기도 푹 잤으면서.”

    이시하라 린이 다른 취재진들과 몸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

    “와아아아아!”

    “뭐야, 뭐야?”

    이시하라 린이 제자리에서 뛰고 낑 낑대며 앞으로 나섰고 한참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아!”

    그러나 이미 배도빈은 포토라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고 이시하라 린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때였다.

    웅성이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이시하 라 린이 고개를 돌렸고 그녀 역시 어떠한 반응도 낼 수 없었다.

    붉은 페라리가 서 있었다.

    가우왕의 차였고 평소라면 모두 조 금 전과 같이 비명과 환호를 질렀을 터였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가우왕은 그의 애마처럼 선명하게 붉은 셔츠와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고 겉에는 얼룩말 무늬의 펄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징 박힌 구두와 네 겹으로 두른 금목걸이.

    짧고 단정하게 손질했던 머리는 투 블럭으로 자른 뒤 포마드로 넘기고 있었다.

    차분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했던 가우왕이 마약왕 같은 포스를 내뿜 고 있었다.

    “가우왕이 돌아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 환호 이전에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고 가우왕은 그러한 반응에 만족해하며 한쪽 입술을 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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