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89화 (48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89화

106. 베를린 대전(4)

ㄴ 빨리! 연주! 빨리! 시작!

ㄴ 오늘은 누구누구 나옴?

ㄴ 엘리자베타.

ㄴ 다른 사람은?

ㄴ 잘 모름.

ㄴ 유명한 사람 다 모였다면서 1조 왤케 빈약해?

ㄴ 조 추첨이 잘못 됐음. 적어도 가우왕 막심, 배도빈, 최지훈은 다 다른 조로 됐어야지.

ㄴ 미친놈들아 1조 사람들도 대단한 거야. 엘리자랑 소망사랑 빼곤 다 국제 콩쿠르 우승 경력 있음.

ㄴ 여기서도 고통받는 엘리자.

ㄴ 근데 왜 엘리자베타가 유력하다는 거야? 우승 한 번도 못했다며.

ㄴ 상대가 배도빈, 최지훈이었어.

ㄴ 아…….

ㄴ 솔직히 엘리자베타가 우승 한 번 못한 콩라인이라고 해도 1조에서는 젤 낫지.

ㄴ 김소망사랑? 한국 사람이야?

ㄴ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ㄴ 검색해 보니 라이징스타 소속이네.

ㄴ 도빈이 대체 몇 명을 잡고 있는 거야ㅋㅋㅋ 포켓몬 도감 완성할 기세넼ㅋㅋㅋ

2월 5일.

배도빈 콩쿠르는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에서만 감상할 수

있다는 패널티를 안고도 동시 시청 자 56만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2조와 3조 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 면 더욱 많은 시청자를 기대할 수 있었기에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은 뜻하지 않은 수입에 기뻐하고 있었다.

“연초부터 스타트 좋네.”

카밀라 앤더슨 사무국장겸 전무가 음악원 설립 계획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악단주께선 욕심도 많으셔.”

최근 베를린 필하모닉은 한 가지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베를린 필하모닉만의 음악원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세계 각지에 클래식 음악을 교육하는 학교를 세우 려는 배도빈 악단주의 욕심이었는 데, 전문가 양성뿐만이 아니라 일반 교양을 위한 코스도 준비하고 있었다.

작년 평단의 언론 통제 사건은 클래식 업계를 크게 뒤흔들었고 그에 따라 배도빈은 음악을 보다 대중적으로 전파하고자 이 일을 기획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이 들도 보다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인재 육성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교육자이기도 한 찰스 브라움은 큰 역할을 해주었다.

사업의 실효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악단주 배도빈은 사업성 이전에 필요에 의한 일이라 며 필요 예산을 책정하라 지시.

최근 부담되기 시작한 크루즈 사업 과 더불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막강 한 재정에도 큰 지출이 발생할 예정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 진행할 걸 그랬어. 광고도 좀 더 받고.”

“결승까지 좀 더 알아볼게요.”

“응. 부탁해. 저렇게들 열심히 하는데 우리도 한몫 거들어야지.”

“네.”

이자벨 멀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배도빈, 최지훈, 프란츠 페터는 나란히 앉아 1조 경합을 듣고 있었다.

“잘한다.”

1조 첫 번째 순서로 나선 김소망 사랑이 연주를 마치자 최지훈이 박수를 보냈다.

“나쁘지 않네. 처음 보는데.”

턱을 괴고 있던 배도빈도 수긍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잖아.”

“그랬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인수한 뒤로 샛별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히무라 쇼우에게 맡겨두었던 탓에 배도빈은 김소망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번에 졸업하셨을 거야.”

“어딜?”

“한국대.”

WH 그룹이 후원하는 대학이었다.

“저번 퀸 엘리자베스에도 나오셨는 데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 실력도 좋고. 사람도 솔직하고 괜찮은 거 같았어.”

“왜 그렇게 잘 알아?”

최지훈이 대답하려는데 배도빈이 옆자리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에 짜 증을 부렸다.

“가만히 좀 있어.”

“끄으우우.”

프란츠 페터가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최지훈이 걱정스레 묻자 배도빈이 심드렁하게 대신 답했다.

“어디안 좋아?”

“신경 꺼. 조 추첨 때문에 그런 거니까.”

“아.”

아픈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안해 보이는 프란츠 페터가 사실 긴장 하고 있다는 걸 파악한 최지훈은 웃고 말았다.

역사가 오래되거나 큰 대회는 아니지만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경연 이니 부담스러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 저 그만 가볼게요.”

“어디 가.”

“조금이라도 연습해야……

“벼락치기로 될 일이었으면 뭐 하러 매일 몇 시간씩 연습해? 얌전히 있어. 듣는 것도 공부야.”

“하지만 2라운드 진출 못 하면 혼낸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나한테 배우면서 1라운드도 못 넘길 생각이었어?”

“그 1라운드에 형이랑 가우왕 님이랑 니나 케베리히 님까지 있잖아 요!”

“그건 네 운이지.”

어제 조 추첨 결과 이후로 프란츠 페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북미 제일의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니나 케베리히와 같은 조가 된 것도 황당한데.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한 손에 꼽으면 반드시 들어갈 두 사람.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과 가우왕과 한 조에 편성되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지훈이 혀엉. 도와주세요오.”

최지훈은 엄격하다 못해 잔인한 스승에게 괴롭힘 당하는 프란츠를 귀여워하면서도 괜스레 놀리고 싶어졌다.

“그럼 나랑 바꿀래?”

“거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하하.”

뛰어난 재능으로 어린 나이에 프로들과 같은 무대에 뛰어든 프란츠 페 터는 매일매일이 힘겨웠다.

처음에는 종이 피아노로 연습해 지역 예선(칸토)와 크리크 국제 콩쿠르에 참가해 간신히 우승했고.

배도빈에게 거둬진 뒤로는 1년도 안 되어 그를 보조해야만 했다.

최근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참가한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분전 했고 이제는 전설들을 상대하게 생겼으니.

어린 프란츠 페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것은 음악에 진지해진 소년의 태도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최지훈이 프란츠를 달랬다.

“그래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도빈이랑 가우왕 씨, 니나 누나랑 경 쟁하는 거 흔치 않잖아.”

“지훈이 형 같은 천재는 이해 못 하세요.”

“……뭐라고?”

최지훈이 되물었다.

프란츠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죄송해요. 절대 절대 나쁜 뜻이 있던 게 아니라 답답해서……

“다시 말해봐.”

거듭된 추궁에 프란츠가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지, 지훈이 형처럼 천재는 이해 못 하실 거라고……

“천재?”

“네, 네……

최지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배도빈이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노력가인 최지훈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자각을 갖 추며 천재라는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마다 버릇처럼 덧붙이던 ‘천재니까’라는 말을 더 이상 언급지 않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배도빈은 그러한 변화를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한참 어린 후배에 게 천재 소리를 들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냐.”

“프란츠가 해주니까 좋지. 누구보다도 멋진 재능을 가진 애가 천재라고 하잖아.”

프란츠는 최지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란츠가 납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자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15살에 크리크에서 우승하고. 작년에는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3위나 했잖아. 지금도 베를린 필하모닉 이 뽑은 20명 안에 들었고. 너야말로 천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만 15세에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자격으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천재 중의 천재 최지훈은 프란츠에게 있어 배도빈과 별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너가 나보다 천재야’ 라고 말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란츠가 배도빈을 보자 그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 너 놀리는 거야.”

“히 잉.”

역시나 싶은 마음과 함께 프란츠가 또다시 울상이 되었고 최지훈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무대에 오른 탓에 영문을 모른 채 침묵해야 했다.

“다음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양의 차례입니다.”

진행자의 안내 목소리에 엘리자베타가 눈을 떴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항상 앞서 나가던 최지훈을 추월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할 수 있어.’

계단을 올라서서 무대 중앙으로 나섰고 익숙한 분위기를 느끼며 가슴 설레였다.

작게 전해지는 기대 어린 대화들.

눈부신 조명 때문에 눈으로 볼 순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과 셀 수 없이 많은 이가 보내는 기대.

그러나 피아노를 앞에 두면, 악보 와 소리에 집중하면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에 즐길 수 있었다.

‘우승해도 돼.’

엘리자베타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단 한순간이라도 피아노를 잊어본 적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피아노를 칠 때도 사람과 만나고 TV를 볼 때도 언제나 피아노를 생각했다.

이 달콤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사람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이 감정은 어떻게 전달 할까.

그랬기에 누구보다도 노력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우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가리는 이 무대에서 가장 빛나기 위해, 철 저하게 준비한 연주.

“흐읍.”

엘리자베타가 건반 위에 손을 가져간 뒤 숨을 들이마셨다.

건반이 빗발치는 총탄처럼 소리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 나타 7번, 스탈린그라드.

반복과 변형. 점층되는 악상.

불안 혹은 요동.

전쟁의 공허함을 알리는 듯한 주제가 펼쳐지고, 이윽고 인퀴에토(Inguieto: 불안, 요동)라는 지시어와 같이 곡은 점차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치 닫는다.

전쟁을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은 무 엇이 옳은지 생존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엘리자베타의 손은 ‘스탈린그라드’ 가 내포하고 있는, 프로코피예프의 고뇌와 번민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돌출하는 새로운 음들.

열 개 손가락과 두 손목, 두 팔꿈 치, 두 어깨가 모두 독립되어야만 소화할 수 있는, 철저히 훈련되어야만 가능한 연주가 완벽히 이뤄지고 있었다.

각자의 역할을 맡아, 10개의 악기 가 하나의 연주를 하는 듯 각 손가 락이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다 악장이 바뀌어.

오른손이 낭만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한편 왼손이 대조를 이뤄 점차 감정을 고조시킨다.

‘ 아.’

최지훈은 엘리자베타의 연주에 감탄하고 말았다.

이렇게나 명확한 스탈린그라드는 여태 들어보지 못했다.

각 음들이 너무나 정확하여 그 불안한 음형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녀의 연주는 전개될수록 점차 흐드러졌다. 거대한 힘 앞에 파괴된 개인의 상태를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이성이 바스러진 뒤.

3악장 프레치피타토(Precititato: 맹렬하게).

양손이 동시에 펼쳐내는 화성이 전장의 총탄을, 곳곳에 삽입된 분절이 포탄의 파편을 그렸다.

온몸의 힘을 실어 연주하여 관객들을 전장의 한복판으로 이끌었고.

그 압도적은 음량에 당황한 관객들은 비로소 앞선 1악장과 2악장의 화자에 공감했다.

승리. 승리를 갈구하는 몸부림.

무게를 실어 격렬한 연주를 하면서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난곡, 스탈린그라드를 연주해 낸 엘리자베타를 향해.

관중 모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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