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88화
106. 베를린 대전(3)
【베를린 대전 드디어 개막!]
【왠지 피곤해 보이는 마왕】
【가우왕 충격적인 이미지 변신!】
【화제의 베를린 대전 어떻게 진행 되나?】
전 세계 3만여 명의 피아니스트가 신청했던 배도빈 콩쿠르가 오늘 개막되었다.
전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의 첫 번째 경합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오늘 오전 조 추첨을 통해 아래와 같이 조가 편성되었다.
1 조
소망사랑 킴(한), 엘리자베타 툭타 미셰바(러), 토니 로모(영), 레오폴드 미아즈가(미), 량 사오(중).
2 조
도빈 배(한), 가우왕(독), 루리얼 부르상(프), 니나 케베리히(독), 프란츠 페터(독).
3 조
카 잔(브), 리망 한스(프), 지훈 최 (한), 성신 최(한), 막심 에바로트(크).
4 조
다닐 베레조프스키(러), 마리 스크 워도프스카(폴), 볼프강 파울리(오), 제임스 맥스웰(영), 나나리 수완포티 프라 (태)
각 조에 편성된 다섯 피아니스트는 룰에 구애받지 않고 경쟁하게 된다.
주최자 배도빈는 장르와 시간에 구 애받지 않도록 프리룰을 채택했으며 결과는 오직 관객과 온라인 시청자에 의해 결정돈!다.
시청자들은 마음에 든 연주를 한 피아니스트 두 명에게 표를 줄 수 있고, 그렇게 가장 많은 표를 획득 한 두 명이 진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조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단연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살아 있는 전설 사카모토 료이치를 사사한 러시아의 재녀는 열세 번의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항상 우승 권에 들었으며 최근에는 더욱 발전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조 1위 진출권을 확보한 거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1 조는 나머지 진출권을 두고 김, 로 모, 미아즈가, 사오 네 명이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2조는 강약 격차가 극심한 조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로 명실 상부 정상에 오른 가우왕과 항상 기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배도빈, 북미 제일의 피아니스트 니나 케베 리히까지 가히 죽음의 조라 불릴 만 하다.
그럴수록 루리얼 부르상과 프란츠 페터에게는 가혹한 대진운이 아닐 수 없다.
전문가들은 그간 배도빈이 기량을 얼마나 유지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3조 역시 2조 못지 않은 최악의 대진운으로 편성되었다.
황제 가우왕과 피아노계를 양분하는 혁명가 막심 에바로트는 물론, 쇼팽, 드뷔시, 브람스의 스폐셜리스트 최성신, 그리고 최근 부상에서 복귀하며 무서운 저력을 뿜어내는 태양 최지훈까지.
카 잔과 리망 한스 모두 전도유망 한 피아니스트지만 2조의 부르상, 페터와 마찬가지로 2라운드 진출은 불가능해 보인다.
4조는 다닐 베레조프스키와 나나리 스완포티프라가 주목받고 있다.
다닐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밀스 베레조프스키의 아들로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머쥔 신예.
나나리는 태국 출신 피아니스트로 아시아에서 넘어서 미국에도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는 베테랑 피아니스트.
그러나 주목받는 것과 달리 4조는 다섯 명 모두 해볼 만한 경쟁으로 여길 거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전 세계가 배도빈 콩쿠르를 기대하는 밤, 배도빈 저택에서는 그를 위한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만 20세 생일을 맞이한 배도빈을 축하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축사가 전달되었고 배도빈 저택의 정원 한쪽은 그가 받은 선물로 가득했다.
“짐! 이게 얼마만인가!”
“하하. 격조했습니다. 사카모토.”
한스 짐을 발견한 사카모토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한스 짐도 반갑게 다가가 포옹을 나누었다.
영화 음악의 두 전설이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정세 윤 기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얘는 나 버리고 어디 간 거야.’
배도빈 콩쿠르를 취재하기 위해 출장 나온 정세윤 기자는 차채은 덕분 에 배도빈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지 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실례.”
“아, 네. 죄송…… 히익!”
멍하니 있다가 길을 비켜준 정세윤 기자는 그녀 앞으로 브루노 발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평소라면 인터뷰조차 따기 힘든 인물을 코앞에서 마주하니 침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음? 내가 뭔가 실수라도?”
“아, 아, 아, 아, 아뇨.”
정세윤은 고개를 세차게 젓곤 자리를 피했다.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차채은과 약속했지만 적어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안면이라도 틀 생각이었던 정세윤으로서는 통탄할 일이었다.
‘이러려고 독일까지 왔냐.’
정세윤이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자 그녀 앞에 크리스틴 지메르만 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편해 보이네요. 사람을 불러 드릴까요?”
“혹시 영어를 못 하나요? 독어?”
또 한 명의 전설을 눈앞에 둔 정 세윤의 영혼이 그녀의 육체에서 벗어나려 할 때였다.
“아, 세윤 씨.”
한이슬이 다가와 정세윤과 눈인사를 한 뒤 지메르만에게 예의를 갖췄다.
“안녕하세요, 마담. 평론가 한이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인사를 받곤 정세윤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이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네요.”
“제 일행이에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한이슬이 정세윤 곁에 서자 지메르만이 안심하고 돌아섰다.
“어디 불편해요?”
“아…… 아뇨. 괜찮아요.”
한이슬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신기하죠?”
그 말대로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 이라 정세윤은 한이슬에게 이끌려 연회장 한쪽에 몸을 기댔다.
한이슬이 챙겨준 물을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리고 대화도 나눠봐요. 이 런 기회 많지 않으니까.”
“아.”
정세윤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음악가뿐만이 아니었다.
WH 그룹에 잘 보이고 싶은 재계 유명인사는 물론, 베를린 시장을 포함한 독일의 정계 인물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음악 잡지 기자 생활을 제법 해왔지만 이 정도 수준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윤 씨, 잠깐.”
한이슬이 어리둥절하는 정세윤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연회장을 빠져나와 정원으로 나선 한이슬은 배도빈에게 보내온 선물들 이 쌓인 장소를 찾았다.
집사가 한이슬 앞에 섰다.
“편지를 깜빡해서 그런데 잠깐 살펴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죠.”
용무를 확인한 집사가 길을 비켜주었고 선물 더미로 다가간 한이슬은 정세윤에게 눈짓을 주었다.
독일 총리의 이름이 적힌 편지.
그라모폰의 로고가 찍힌 박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모두 아는 이름들이 보내온 선물이었고 국가와 업계를 가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찾아오진 않았지만 저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대강 파악할 순 있어요.”
“그러네요.”
“그러면 뭘 해야 하는지 알겠죠?”
“ 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앞으로도 유럽은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로 있을 테고 정세윤 본인도 클래식 음악업계에 몸담을 생각이었다.
당장 기사거리는 만들 수 없지만 연회장 안에서 안면을 틀어둬야 나중에 한 번이라도, 아니, 단 한 마 디라도 더 말을 붙일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선배로서 당연한 일인데요 뭘.”
정세윤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이자 한이슬이 미간을 좁혔다.
“혹시 나 부담스러워요?”
정세윤이 고개를 들자 한이슬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세윤 씨 좋은데. 일도 열심히 하고. 그 빡빡한 곳에서 세윤 씨 위치까지 올라오는 거 쉽지 않잖아요. 같은 경험 있어서 마음이 가는데 세윤 씨는 나 꺼리는 거 같아서요.”
정세윤이 몸을 뒤로 빼자 한이슬이 웃으며 물었다.
“말해봐요. 독일에서 한국 사람끼 리 말할 수 있는 게 어디야. 앞으로도 그럴 건데 이 기회에 털어놓고 싹 잊자고요.”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정세윤으로서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편집장님하곤 무슨 사이세요?”
“어머.”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번에는 한 이슬이 놀라고 말았다.
“혹시 대리님하고 그런 사이에요?”
“머, 먼저 대답하세요.”
정세윤의 반응에 한이슬은 그녀가 이필호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좋아했던 사람?”
정세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하하하. 세윤 씨 표정 너무 재밌다. 오해 마요. 그런 관계 아니니까.”
“진짜래두? 봐요. 나 여기서 활동 하고 대리님은 한국에 있는데 어떻게 만나.”
정세윤이 묘하게 반말을 섞는 걸 신경 쓰고 있을 때 한이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많이 좋아했으면 한쪽이 포 기했겠죠. 그 정도 관계였을 뿐이에요.”
한이슬은 서로에게 같이 가자고, 남아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둘러 표현했다.
정세윤이 나름 납득하고 있을 때 한이슬이 싱긋 웃었다.
“대리님 엄청 둔하죠?”
“엄청 둔해요.”
“이봐. 그럴 줄 알았어. 진짜 사람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니까?”
정세윤은 어느새 한이슬의 말에 동조하며 그간 이필호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편.
배도빈은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전과 같았다면 정치가고 사업가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는 책임감이 그를 움직였다.
간신히 인사를 마친 그는 7층 라운지에서 가족과 함께하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
“도빈아.”
유진희가 첫째를 걱정스레 불렀다.
상류 사회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진 절머리 나도록 경험했던 그녀로서는 아들 배도빈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힘들면 들어가서 자. 피곤해 보여.”
“네. 좀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배도빈이 소파에 가로로 누웠다.
그때 밖이 요란스러워졌다.
“배도빈!”
가우왕, 최지훈 그리고 몇몇 단원 이 라운지로 찾아와 배도빈을 찾았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야단법석을 떨던 단원들이 배영준 유진희 부부를 보곤 정중히 인사했다. 부부도 웃으며 그들과 인사했다.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무심 하게 쳐다보았다.
“뭐예요.”
가우왕이 최지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자식이 아직도 지가 잘났다고 하잖아!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당장 해보자고!”
“그렇게 흥분하시면 더 힘드실 텐데요?”
“이 꼬맹이가?”
“키는 제가 더 커요.”
“워후〜”
잔뜩 흥분한 가우왕과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최지훈 그리고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기는 단원들까지 난리도 아니었다.
배도빈이 손을 휘휘 저었다.
“당신들끼리 해. 피곤해.”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가슴 위에 올려둔 배토벤과 놀기 시작하자 그 들도 어쩔 수 없이 와르르 내려갔다.
배영준과 유진희가 웃고 말았다.
“기운차네.”
“성가셔요.”
불평하면서도 상황이 웃긴 둣 미소 짓는 아들을 보며 배영준은 안심했다.
아들이 시기와 질투를 받을 위치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다행으로 여겼다.
유진희도 마찬가지였다.
“지훈이도 많이 밝아졌다.”
“능구렁이예요.”
배도빈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물었다.
“도진이는요?”
“요즘 엄청 바빠.”
배도빈이 몸을 일으켰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어 유진희가 기특한 듯 웃었다.
“단원 분들 머리카락이 없다고 엄 청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배도빈은 동생의 황당한 발상이 다 소 당황스러웠지만 목표를 가지는 건 좋은 일이라 여겼다.
어려서부터 배도진의 말은 이해하 기 힘들었기에 분명 동생만의 세계 가 있다고 믿었다.
“그보다.”
“네.”
“도빈인 누가 이겼으면 좋겠어?”
팬들만큼이나 베를린 필하모닉 드 라마에 심취해 있던 유진희는 아들의 진심이 궁금했다.
“최지훈이요.”
“정말? 가우왕 씨 서운하겠다.”
“둘 중에 고르라는 것부터 난감해요. 비교할 수 없는데 굳이 고르라면 지훈이인 거니까.”
유진희가 턱을 괴었다.
“그럼 다음 곡은 지훈이가 받겠네?”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 가우왕 씨가 우승할 것 같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유진희가 의아해하자 배도빈이 단호히 말했다.
“제가 참가하기 전이잖아요. 일을 이렇게 벌려두고 곡까지 써 줄 생각은 없어요.”
아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유진희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우리 아들이 최고지. 꼭 우승해?”
“걱정 마세요.”
배도빈이 다시 소파 위에 몸을 눕혀 눈을 감자 배영준이 아들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 쉴 땐 쉬고 실수해도 괜찮아. 그게 사람이야.”
그게 사람이야.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배도빈이라 아버지 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만큼은 분명 그에게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