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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86화 (48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86화

    105. Her(5)

    진달래와 아리엘을 내보낸 배도빈이 작게 웃었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아이들이 하 나둘씩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음에 더할 나위 없이 흡족스러 웠다.

    “우리도 가죠.”

    “네. 아!”

    배도빈이 일어서는 순간 휘청이고 말았다.

    죠엘 웨인이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고 배도빈은 잠시 그녀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 보스••••••

    “괜찮아요. 잠시 앉게 해주세요.”

    죠엘 웨인이 배도빈을 조심스레 앉혔다.

    “너무 무리하셨어요.”

    배도빈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혀 소파에 기댔다. 마치 빈혈이 온 듯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2년 전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겪는 후유증이었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피곤해지면 심한 빈혈이 오는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

    배도빈의 주치의는 눈 주변에 난 상처 때문이라 추측하면서도 정확 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간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다녔으나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충분히 안정을 취하면 후유증이 길게 이어지지 않고 시력도 회복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치의는 현재로선 크게 문제될 것 없으나 반드시 무리하면 안 된 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배도빈은 대교향곡을 비 롯한 작곡 활동과 악단 운영, 베토벤 기념 콩쿠르, 타마키 히로시의 장례, 평단과의 일 최근 여러 사람 과의 관계 정리 등을 이유로 신체 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게 쌓였고.

    이런 방식으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루 쉬면 괜찮아지니까 걱정 마요.”

    배도빈의 말대로 충분히 휴식하 고 무리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테 지만, 그의 비서 죠엘 웨인은 배도빈이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하는 지 알고 있었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직원들 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헌신적이나.

    죠엘의 눈에는 현재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배도빈 이었다.

    “역시 주변에 알리시는 게……

    “그러지 마요. 걱정하니까.”

    “그래도……

    현재 배도빈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그의 비서였던 이자벨 멀핀과 현 비서 죠엘 웨인 그리고 담당 주치의뿐이었다.

    배도빈이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킨 탓이지만 죠엘은 배도빈을 철 인으로 여기는 단원들이나 심지어는 신으로 여기는 팬들이 그의 상 태를 인지하고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쁜 일만 해결되면 괜찮아지니까 괜한 걱정 끼칠 생각 없어요. 죠엘도 그리 알고 더는 묻지 말아요.”

    배도빈은 단호할 뿐이었다.

    그가 잠시 간격을 두고 중얼거리 듯 말했다.

    “5분만 잘게요.”

    한편.

    애지중지 키운 자랑스러운 딸이 중국인과 결혼했단 소식에 브라움 부부는 크게 충격받았다.

    그토록 말렸건만 일언반구도 없이 서약을 했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했으며.

    그 분노는 가우왕에게로 향했다.

    “잘도 그 더러운 낯짝을 들이미는 구나!”

    크로프트 브라움이 인사를 하러 찾아온 가우왕을 향해 분노를 쏟 아냈다.

    “아버지!”

    “시끄럽다!”

    크로프트 브라움은 딸의 손목을 잡아 방으로 이끌었다.

    “내일 당장 돌아가자.”

    “돌아가도 제 발로 돌아갈 거예요. 아버지가 이러신다 해도 변하는 건 없어요.”

    “대체 왜 이러는 게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놈이랑 결 혼한단 말이야?”

    크로프트 브라움의 노성 뒤에 에 리얼 브라움이 딸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예나가 그럴 리 없어요. 그렇지? 착한 아이잖니. 실수였을 거야.”

    “어머니.”

    “엄마랑 아빠 놀리는 거지? 응? 그런 거지?”

    “어머니!”

    예나왕이 에리얼 브라움을 뿌리 쳤다.

    “그만하세요. 놀리는 것도 실수도 아니에요.”

    “예나!”

    에리얼 브라움이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이러지 마렴. 아버지가 정 혼 상대를 정해둔 것도 아니잖니.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만나서 결혼했어요.”

    “자꾸 거짓말할 거니? 네가 어떻게 중국인이랑 결혼해! 응?”

    에리얼 브라움의 애원이 예나왕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이미 혼인 신고도 했어요.”

    “너!”

    철썩-

    이성의 창이 깨지는 소리였다.

    크로프트 브라움이 딸의 뺨을 때렸고 그녀의 고개를 힘껏 돌아가 있었다.

    가우왕은 쓰러진 아내에게 다가 가려 했지만 크로프트 브라움은 비켜주지 않았다.

    “어딜 들어와!”

    가우왕이 장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가우왕은 장인 부부가 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딸이 말도 없이 결혼했으니, 더군다나 그 상대가 하등하게 여기는 동양인이었으니 충분히 화 낼 만하다고 여겼다.

    자존심 하나로 정상에 오른 그에 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치스 럽고 모욕적인 일이었으나.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용서해 주 십시오.”

    그에게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고 그것은 장인 부부도 마찬가 지였다.

    “행복? 행복이라 했나! 네놈 때문 에 내 딸이 잃은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때.

    예나왕이 아버지를 밀치고 복도 로 나섰다. 남편의 팔을 붙잡아 이 끌며 말했다.

    “됐어. 가자.”

    “가긴 어딜 가! 당장 들어오지 못 해!”

    크로프트 브라움이 노발대발했고 가우왕도 아내를 말렸다.

    “용서 받기로 했잖아.”

    “대화가 안 되잖아. 당신 이럴 필 요 없어. 저런 말 들을 필요 없고 출신 때문에 상처받을 필요 없어.”

    예나왕의 말에 크로프트 브라움 이 충격받았다.

    “지금껏 바르게 자랐다고 생각했거늘 이제와 늙은 애비의 뒤통수를 치는구나.”

    예나왕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뇨. 저야말로 존경하던 부모님 께 배신당한 기분이에요.”

    “예나!”

    가우왕이 예나를 말렸다.

    그러고는 잔뜩 화가 난 장인에게 다시 한번 용서를 빌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썩 나가라! 오늘부터 넌 내 딸이 아니다!”

    “장인어른!”

    “누가 네 장인이란 말이야! 썩 꺼 지지 못해!”

    크로프트 브라움이 가우왕을 매 몰차게 몰아냈다.

    큰 소리를 내며 방 문이 닫혔고 예나왕은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려 했다.

    부모를 향한 원망과 배신감.

    넝마처럼 찢긴 남편의 가슴을 떠올 리면 도저히 이성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

    가우왕도 생전 처음 당해보는 모 욕감을 애써 누르며.

    그보다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내일 다시 오자.”

    부부가 서로를 끌어안고 상처를 보 듬었다.

    잠시 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두 사람이 가우왕의 저택을 찾았다.

    그의 가족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예나왕은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소중한 아들과 결혼했으니 결코 그 시선 이 좋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잘해야 해.’

    중국의 문화는 잘 모르고 이해하 기도 쉽지 않았지만 예나왕은 그 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가우왕이 문을 열었다.

    “엄마. 나 왔업.”

    가우왕은 문을 열자마자 부모와 고모들에게 치여 마당을 뒹굴어야 했다.

    “아이고 어서 와라. 어서 와.”

    “허미. 정말 머리가 노랐네.”

    “어디서 이런 예쁜 애가 왔을까.”

    “배고프지? 밥은 먹었고?”

    쏟아지는 질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예나왕이 당황했다.

    “무슨 짓이야!”

    가우왕이 벌떡 일어나 가족들에 게 소리쳤다.

    “이런 각시를 두고 그동안 모른 척했어?”

    “그런데 우리 말은 알아 듣나?”

    “아가, 캐, 캔 유 스피쿠 차이니 즈?”

    너무나 살가운 태도에.

    예나왕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국말 할 줄 알아요.”

    가우왕의 가족들이 입을 틀어막 고 울기 시작한 며느리를 어르고 달래 안으로 들였다.

    2026년 2월 4일.

    배도빈의 생일과 함께 그가 주최 한 피아노 콩쿠르가 열렸다.

    우승자에게는 배도빈이 직접 곡을 헌정해 주기로 되어 있었고, 그 의 곡을 받기 위해.

    또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 전 세계 피아니스트들이 칼을 갈고 있었다.

    참가 신청자 수는 3만 명.

    본선에 오른 사람이 20명뿐인 것을 감안했을 때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빛나는 이름 이 있었으니 대체 누가 최고의 영 광을 얻어낼지 예상할 수 없었다.

    배도빈 피아노 콩쿠르 본선 진출자 명단

    배도빈

    (베를린 필하모닉, 20세)

    가우왕

    (베를린 필하모닉, 40세)

    막심 에바로트

    (IMG 아티스츠, 41세)

    니나 케베리히

    (샛별 엔터테인먼트, 29세)

    최성신

    (솔레아 매니지먼트, 33세)

    최지훈

    (베를린 필하모닉, 21세)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빈 필하모닉, 27세)

    ㄴ 와 진짜 참가자 미쳤다ㅋㅋㅋ

    ㄴ 도빈이 21살 아님?

    ㄴ 저런 표기는 당연히 만 나이지.

    ㄴ 누구 하나 빠지는 사람이 없넼거

    ㄴ 어차피 우승 배도빈.

    ㄴ 이건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배도빈 최대 위기임. 가우왕이랑 막 심은 말할 것도 없고 니나랑 최성신, 최지훈도 만만치 않음.

    ㄴ 살아 있는 전설들 상대로 우승했는데?

    ㄴ 그건 배도빈이 지휘자로 충실하니까 그런 거고. 솔직히 피아니스트 로는 활동 오래 못 했잖아.

    ㄴ 가우왕 우승이 거의 확정적이지.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연주할 수 있는 사람 없잖아. 막심도 못 친다고 했음.

    ㄴ 가우왕은 확실히 미친놈임.

    클래식 음악 팬들은 가우왕의 우 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랜 라이벌인 막심 에바로트가 그의 적수였고 니나 케베리히, 최 성신, 최지훈 등이 훌륭한 기량을 보여주었지만 불가능의 영역을 유일한 피아니스트를 향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번 경연에 열 광하는 이유는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니아 발그레이와 파울 리히터를 제치고 우승한 아리엘 얀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타마키 히 로시의 분전.

    어린 나이로 3위에 오른 프란츠 페터와 같이, 이변을 기대하기도 했고 또한 박준수, 제니 헤트니와 같이 결승 진출은 못 했어도 감동 적인 곡을 들려준 이들이 있는 탓이었다.

    과연 누가 우승하여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는지도 궁금했지만 그에 앞서 보다 순수한 기대가 있었다.

    좋은 연주를 듣기 위해.

    팬들은 누가 우승할 거라는 의견을 나누면서도 지금껏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피아니스트들이 이 번에는 또 어떻게 세상을 놀라게 해줄지 기대하며.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의 채팅창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ㄴ 오오 나온다 나온다

    ㄴ 막심 너무 잘생겼어 ㅠㅠ

    ㄴ 니나 케베리히는 여전히 밝네.

    ㄴ 쟤는 진짜 뭐든 즐기더라.

    ㄴ 엘리자베타 독기 오른 거봐ㅋㅋㅋㅋ 가우왕 도발 진짜 신경 쓰나 봨ㅋㅋㅋ

    ㄴ 6개월 동안 도전했는데 실패했으니까 짜증 나겠지.

    ㄴ 가우왕 오늘은 또 무슨 옷 입고 나오려나.

    ㄴ 이젠 기대됨 ㅋㅋㅋㅋ 어떤 신박 한 차림으로 나올짘ㅋㅋㅋㅋ

    ㄴ 어?

    ㄴ 헐. 저게 누구야?

    ㄴ ㄹㅇ 가우왕임???

    취재차 한국에서 베를린까지 날 아온 정세윤 기자는 참가자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따고 있다가 깜 짝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탓에 고 개를 돌렸는데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나오고 말았다.

    “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과 새빨간 재킷과 가죽 바지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가우왕이.

    머리를 짧게 치고 멀쩡한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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