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85화 (48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85화

    105. Her(4)

    “연애 한 번 못 해본 놈인 줄 알았더니 제법인데?”

    “시끄러워.”

    가우왕은 마누엘 노이어와 단원 들의 짓궂은 농담을 맞받아치면서도 즐거웠다.

    지금껏 집단에 소속되어 있던 적이 없었던 그에게 베를린 필하모닉은 특별한 유대감을 주었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을 자신의 동료로, 존중할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고독하고 오만한 천재에게 있어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 이었다.

    “신혼 여행은?”

    피셔 디스카우가 물었다.

    “콩쿠르 끝나고 천천히 생각해 보 려고. 처리할 일도 있고.”

    “처리할 일?”

    “그런 게 있어.”

    “크학. 사고를 쳤으니 양쪽 집에 도 인사 드려야겠지. 찰스 반응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닥쳐.”

    가우왕이 남성 단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있을 때 예나왕도 질문 세례를 받고 있었다.

    “성당에서?”

    만난 지 30분 만에 예나왕과 친 해져 버린 이승희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응. 반지 나눠 끼고 끝.”

    예나왕이 행복하게 웃었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생각 안 해 봤어. 웨딩 사진은?”

    “콩쿠르 끝나면 찍어볼까 생각 중 이야. 드레스 정돈 입어보고 싶어서.”

    “맞아. 꼭 찍어. 나중에 후회한다 니까?”

    “실은 어떤 콘셉트가 좋을지 고민 중이야. 중국 예복도 입어보고 싶은데 그이는 그리 내키지 않은 것 같아 하고.”

    예나왕과 이승희가 열띤 토론을 이어갔고 왕소소는 예나왕에게 달라붙어서, 나윤희, 료코, 진달래 등은 맞은편에 앉아서 그 대화를 경청했다.

    “그럼 살림은 어떻게 하게?”

    “아무래도 당분간 따로 살아야 할 것 같아. 직장이 런던에 있으니까.”

    “아, 그러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카무라 료코가 이승희에게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하게?”

    “나? 얘는 무슨. 상대가 있어야 하지. 결혼은 혼자 하니?”

    이승희의 말에 다들 말이 없어졌다.

    그녀와 한스 이안이 만나고 있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알고 있어.”

    나윤희의 말에 이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매일 웨딩 영상만 보면서 무슨 말이야. 누가 봐도 언니 결혼하고 싶어 하고 있는데.”

    “어머.”

    예나왕이 반색했다.

    모두 이제 그만 한스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라는 듯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기에 이승희는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비밀이야.”

    비밀이 될 리 없었다.

    “3 개월.”

    이승희가 조심하고 소중하게 자신의 배에 손을 얹었다.

    이승희의 말에 예나, 소소, 윤희, 달래, 료코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

    그들이 고개를 들어 얌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 한스 이안을 보았다가 확인하듯 이승희를 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꺄!”

    진달래와 예나왕이 기쁨과 놀람의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주변의 이목이 쏠리고 말았다.

    이승희가 두 사람의 입을 틀어막았다.

    왕소소는 눈을 튀어나올 것처럼 뜨 고 이승희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봤고 나윤희는 이승희의 손을 포개어 쥐었다.

    내일 큰 이벤트가 있기에 뒤풀이 파티는 이른 시간에 마무리되었다.

    다들 저마다 모여 귀가하고 있을 때 죠엘 웨인이 진달래를 찾았다.

    “달래 씨, 보스께서 찾으세요.”

    “도빈이 가요?”

    진달래가 아리엘을 보았다.

    “미안. 할 말 있나 봐. 먼저 가.”

    “한 잔 더 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나누고 와.”

    “가능하시면 얀스 씨께서도 모셔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죠엘의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해하 며 그녀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적한 방에서 배도빈과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이야?”

    “오늘 재밌었나 싶어서.”

    배도빈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연하지. 엄청 어어엄청 재밌었어.”

    진달래가 당연하다는 듯 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이나 묻자 고 따로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니라 고 생각했다.

    “뭔데 그래?”

    배도빈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간격을 둔 뒤에 물었다.

    “LA로 갈 생각 없어?”

    아리엘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

    “함께해서 시너지를 보이는 경우는 드물어. 너희 두 사람이 그렇고. 서로를 위해서도 좋은 일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진달래가 망설였다.

    아리엘이 찻잔을 들었다.

    진달래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 무엇보다 행복했지만, 이 일이 배도빈과 진달래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진달래가 망설이고 있기에 배도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돈이라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그래?”

    “갚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예전 이면 모를까. 지금의 너라면 어디서든 벌 수 있어. 저 녀석과 함께 라면 더더욱.”

    진달래는 어쩌면 배도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25년, 본봉과 인센티브를 포함 한 그녀의 한 해 수입은 대략 14만 유로.

    독일의 높은 세율을 적용해도 1 억 원 이상이었다.

    인지도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올해와 내년 그리고 그 이후의 수입은 더욱 늘어 날 수 있었다.

    그래도 내키지 않았다.

    “아직 계약 기간도 남아 있고.”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엘과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중성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그래서 고작 생각해낸 것이 계약 기간이었다.

    “파기해 줄게.”

    배도빈이 시선을 주자 죠엘 웨인이 진달래의 계약서를 꺼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보내려고 작정한 듯한 행동에 진달래의 기분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뭐야? 왜 이러는데.”

    섭섭했다.

    배도빈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알게 되었고, 베를린에 정착할 수 있었으며 다시 베이스를 칠 수 있었다.

    음악을 배울 수 있었고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지난 4년간의 노력과 추억이 담긴 베를린을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아서, 배도빈의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배도빈이 목을 축였다.

    진달래는 그 느긋한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나 서운하고 섭섭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가 그러한 마음을 더욱 크게 했다.

    “처음부터 네가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고 생각했어. 그 시기가 빨랐을 뿐이야. 네가 그만 큼 노력했단 뜻이고.”

    진달래는 배도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 가서도 가수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보호해 줄 필요 없단 뜻이야.”

    “그게.”

    “이제 내 도움 받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한 사람의 온전한 음악가로 인정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미성숙한 아이에게 주었던 주거, 교육 등의 여러 지원을 끊겠단 말이었고 동시에 자유롭게 활동하라는 뜻이었다.

    어디에 있든 그것을 선택할 권리 가 있다고,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배도빈의 속뜻을 이해한 아리엘 이 작게 웃었다.

    “아, 아니. 나 아직 배울 것도 많고. 아직 그렇게까지 잘 부르지 못하고.”

    당황한 진달래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아직 부족하다는 진심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섞인 탓이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배도빈은 이미 진달래가 떠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가수가 자신이 있고 싶은 무대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사적인 친분으로 발을 묶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앞으로 몇 년 뒤면 그녀의 노래는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배도빈도 아리엘도 진달래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두 사람이 차를 한 번 더 따르고 그것을 다 마실 때까지 진달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혼란스러워하던 그녀가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알았어.”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죠엘에게 관련 절차를 밟으라고 주문 하려 할 때, 진달래가 말을 덧붙였다.

    “여기 있을 거야.”

    배도빈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멋대로 판단하지 마. 나 여기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거 아니야.”

    “너.”

    “면접 때 말한 거 그냥 합격하고 싶어서, 아무 데나 상관 없이 그냥 노래하고 싶어서 했던 말 아니야.”

    배도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 그날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어.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생 각했던 날이었어.”

    진달래는 자신의 의수를 내려다 보며 전 소속사 APOP와의 일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최고의 록밴드를 만들 고자 노력했던 그녀는 그 날 모든 것이 끝난 것만 같았다.

    그때 우연히 배도빈을 만났고.

    끝인 줄만 알았던 그녀의 세계에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자신보다도 작은 키로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러 갈 거라는 배도빈으로부터 희망을 얻었다.

    저런 녀석은 어떤 음악을 할까.

    그것이 성악가 진달래의 시작이었다.

    “널 쫓아서 여기까지 왔어. 베를린 필하모닉이 좋아서 들어오고 싶었어. 많이 부족했던 거 알아. 너를 몰랐으면 어쩌면 평생 꿈만 꾸었을지도 몰라. 아니, 꿈조차 못꿨을 거야.”

    “나 여기 좋아. 네게 너무 고맙 고, 네 말대로 내 분에 넘치는 기 회를 받고 있다는 거 알지만. 네가 정말 날 가수로 생각한다면 나 여 기 있을 거야.”

    “난 네 곡이랑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가 좋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에 배도빈은 다소 당황했고 한편으로는 조금 기쁘기도 했다.

    친구로서 선생으로서 후원자로서 대하던 아이가 어엿한 어른이 되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음악이 좋기 때문에 남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질투군.”

    그때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연인이 눈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열렬히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분명 질투하고 있었다.

    배도빈과 진달래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거 아니잖아!”

    진달래가 아리엘의 팔뚝을 때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리엘이 웃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전부터 느꼈어. 예전에는 이 저열한 감정을 느끼는 내가 싫었지 만.”

    아리엘이 배도빈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마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아도 도빈이한테 이기지 못할 거 라 생각했기 때문일 거야.”

    배도빈은 살짝 인상을 썼고.

    아리엘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진달래의 손을 쥔 뒤 사랑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담아냈다.

    “지금은 그 이유로 충분해. 음악 가로서도 반드시 다시 반하게 해 줄게.”

    “•…”대감.”

    “부인.”

    배도빈은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