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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81화 (48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81화

    104. 새빨간 재킷과 선글라스(7)

    최고가 아니면 안 됐다. 유명해지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리 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다시 봐 주실 거라고 믿었다.

    최고가 되었고 유명해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말도 안 되게 무리한 일이 라도 요구해 주길 바랐다.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부호 가 되라고 하든,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VIP가 되라고 하든 무엇 이든 자신 있었다.

    결국 이 두 손으로 이뤄냈으니까.

    하지만 두 분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영국인이 아니고 귀한 집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해내든 관심을 갖지 않았다.

    ‘축하하네.’

    ‘그럼.’

    ‘허허. 꿈이 큰 친구로군. 하지만 이뤄지지 않는 일도 있다네.’

    어떤 말보다 잔인했다.

    나와 내 가족의 근본을 부정하는 폭력이었다.

    절망한 만큼, 두 분을 향한 증오도 끓어올랐다.

    용서할 수 없었다.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의 눈은 푸른 항성 같았다. 그 누구의 시선보다 따뜻했다.

    얇고 긴 입은 과실처럼 붉었다. 가 방끈이 짧은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입은 신중하고 현명했으며 사랑을 전해주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 끝이 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끝에 이른 것이다.

    “불 꺼놓고 뭐 하고 있어요?”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이 부시다.

    배도빈이 맞은편에 앉았다.

    “술 마셨어요?”

    “너도 마실래?”

    “됐어요.”

    “좋은 코냑이라고.”

    “……줘 봐요.”

    한잔 따라주니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마신다. 전부터 느끼지만 꼬맹 이 주제에 제법 술을 즐길 줄 안다.

    “좋네요. 리샤르 헤네시?”

    “어. 지체 높으신 분이 좋아하셨는데 못 만날 것 같아서 말이야. 버리 기 아까워서 마시고 있지.”

    예나가 말해주었다.

    부담스러운 탓에 자주 못 마시지만 무척 좋아하신다고.

    이런 것 따위 얼마든지 사드릴 수 있는데, 웃기는 일이다.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최고가 되었고 멋진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는데. 아, 공개 적인 자리에서 널 이기면 멋진 복수 도 할 수 있겠어.”

    “그래요. 자신감 가지는 건 좋은 일이죠.”

    “ 흐흐흐흐.”

    말없이 한 잔을 비우고 잔을 채우 는데 배도빈이 다시 한번 물었다.

    눈치 빠른 놈이다.

    “무슨 일인데요.”

    뜬금없이 부르기에 와봤더니 가우왕이 이상하다.

    술은 좋아하지만 취하는 건 안 좋아하는 그가 제법 취해 보이는 것도 그러하고 답지 않게 우울해 보이는 것도 신경 쓰인다.

    우울한 곡만 모아둔 것처럼 방 안을 채우는 음악 소리.

    청승 떨고 있는 걸 보니 분명 무 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인데요.”

    “말해도 넌 몰라.”

    좋은 코냑을 마시지 않았다면 엉덩 이를 걷어차 줬을 것이다.

    가우왕은 또 한 잔을 말없이 비웠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하여 더 묻지 않고 좋은 술과 음악을 음미하 다 보니 내 바가텔 25번이 흘러나 왔다.

    일부러 발표하지 않은 곡이 공사장이나 쓰레기수거차 등 오만 데서 홀 러나오는 통에 난감한 곡이다.

    다음 곡으로 넘기려고 리모컨을 찾으려는데 가우왕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베토벤도 그랬지.”

    “베트호펜.”

    “토벤이든 호펜이든 호픈이든.”

    성희롱이다.

    “아무튼 그 인간도 참 불쌍해.”

    “뭐가요.”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아 물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면 뭐해. 결국엔 결혼도 못 하고 죽었잖아.”

    이 자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 비지?

    “이 곡도 테레제를 위해 썼다며. 발표도 안 하고 있었던 걸 보면 충 격이 컸던 모양이야.”

    술로 언짢은 마음을 달래는데 가우왕이 취한 듯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만한 인간도 거절당했으니 지체 높으신 분들에게 딴따라 따 위가 눈에 들어오겠어? 억!”

    가우왕을 걷어찼다.

    별로 세게 차지도 않았는데 소파에 널부러졌다. 그렇게 아팠나 싶어서 살피니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렇게 아팠어요?”

    “그러니까 왜 자꾸 헛소리를 해요.”

    확실히 이상하다.

    평소라면 언성을 높이며 싸웠을 텐데 넘어진 채 얼굴을 소파에 파묻고 있을 뿐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가 물었다.

    “도빈아.”

    “왜요.”

    “너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잖아. 말해봐. 출신이 그렇게 중요하냐?”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너희 할아버지가 너 누구 만나는지 신경 쓰냐고.”

    “그런 적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러냐.”

    힘없이 일어난 가우왕이 잔을 채우려 하기에 말렸다.

    “예나 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

    말하는 게 꼭 그런 느낌이라 혹시 나 싶어 물었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있었지.”

    “뭔데요.”

    얼른 말하라는 뜻으로 술을 따라주자 단숨에 들이켜곤 한숨을 내쉰다.

    눈을 감았는데 이대로 잠들어 이야기를 못 들으면 궁금해 미칠 듯해 뺨을 때렸다.

    술에 취해 아픈 것도 모르는 것 같다.

    “무어야.”

    “예나 씨랑 무슨 일 있었냐고요.”

    “없어. 업써.”

    “아깐 있었다면서요.”

    맛이 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잘 모르는 듯하다.

    포기하고 그를 침대에 눕히고자 일 어섰는데, 잠시 정신을 차린 듯 엄 포를 늘어놓았다.

    “넌 그러지 마라. 어?”

    “ 뭘요.”

    “좋은 집안, 좋은 나라가 어딨어. 사랑하면 됐지.”

    “헛소리 말고 다리에 힘 좀 줘봐요.”

    “그래도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진 마. 어? 너 키워주시느라 얼마나 고 생하셨어. 세상에 부모님보다 너 사 랑하는 분도 없어. 알아?”

    헛소리긴 해도 계속 듣다 보니 대 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다.

    브라움 가문에서 출신을 이유로 가우왕을 받아주지 않은 것 같은데, 몇 백 년이 흘러도 그런 일이 벌어 진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핸드폰……

    “핸드폰은 왜요.”

    “전화할 거야.”

    “이 시간에 누구한테요.”

    “예나.”

    “좋지 않아요.”

    “••••••싫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술에 취해 진상 부리며 찌질해진 걸 보니 아마 정말 브라움 가문에게 거절당한 듯.

    인종차별 당하는 유학생을 위해 대 학까지 세운 찰스 브라움과 역사를 공부하는 예나 브라움의 부모가 그 랬다니.

    믿을 수 없지만 이 인간 상태를 보니 그런 느낌의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일단 자요.”

    침대에 눕히자 곧 코까지 골며 잠 들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터라.

    오늘의 무례는 잊어주기로 했다.

    “후회하지 말고 잡아요. 이렇게 혼자 궁상떠는 것보다 매달리는 게 덜 후회할 거예요.”

    내일은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줄 생 각으로 방을 나섰다.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가우왕 은 어제 배도빈 앞에서 추태를 떨었던 일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민망함과 함께 예나에게 전화를 거는 걸 막아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 궁상떠는 것보다 매달리는 게 덜 후회할 거예요.’

    연애 한번 안 해본 꼬맹이의 말이었지만 자꾸만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붙잡고 싶었다.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가족과 자신 사이 에서 갈등할 것을 생각하면, 그로 인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 황에 둘 수 없었다.

    예나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기랄.”

    가우왕이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일어나자, 열린 문 사이로 예나 브라움이 지나갔다.

    “••••••예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거실로 향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예나 브라움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뒤돌아 가우왕을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던 일을 계 속했다.

    옷가지와 화장품 등 몰래 만나왔던 장소에 두었던 자신의 물건을 가방 에 넣고 있었다.

    가우왕은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예나 브라움은 짐을 챙기는 와중에 단 한 번도 가우왕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일만 끝내고 곧 떠날 것처럼.

    그때가 되어서야 가우왕은 자신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 예나.”

    가우왕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 예나.”

    한 번 더 불렀으나 그녀는 눈길조 차 주지 않았다.

    가우왕은 가방에 물건을 집어넣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 돌려세웠다.

    “이거 놔.”

    레슨 선생과 학생 신분으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못한, 차가운 표정이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걱정되었지만.

    그녀를 잃는 것보다 큰일은 없었다.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가우왕이 예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슨 짓이야.”

    예나는 건조하게 탓할 뿐이었다.

    그래도 가우왕이 팔을 풀지 않자 그를 밀어냈다.

    “사랑해.”

    예나는 더욱 힘을 주어 가우왕을 밀어냈다. 사랑하는 그가 잠깐의 혼동으로 똑같은 상처를 받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다 괜찮아.”

    “놓으라고.”

    “너만 있으면 다 괜찮아.”

    가우왕을 밀쳐내던 예나 브라움의 팔에 힘이 빠졌다.

    그녀도 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환경에서 벗어 나는 게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유년 시절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거쳐 지금까지 그녀의 주 변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힌 이들 로 가득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웠다.

    부모마저 그러했으니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함께하고 싶었다.

    ‘ 미안.’

    그러나 과연 그도 같은 생각일까.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떨어질 각오를 했던 예나 브라움이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이유였다.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부담하고서 라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가우왕이 그러지 않을까 봐.

    그가 만약 여러 이유로 함께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다면 고집 부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우왕이 자신과 같은 마음 이었단 걸안 순간.

    주먹이 나갔다.

    “ 억.”

    “나쁜 자식.”

    예나 브라움이 쓰러진 가우왕의 얼 굴을 붙잡고 들어올린 후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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