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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80화 (48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80화

    104. 새빨간 재킷과 선글라스(6)

    투덜대는 말투, 예의 없는 행동, 이상한 옷차림, 유치하고 고집 센 성격.

    그래도 사랑했다.

    단점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투덜대면서도 결국은 날 위해 남몰래 함께해 주었다. 무뚝뚝한 목소리 로 아침마다 잘 잤냐고 상냥히 물어 봐 주었다.

    꼭 70년대 펑크 록커처럼 입고 다 니길 고수하는 것처럼 보여도 날 가 르치러 올 때는 항상 정장을 입고 와주었다.

    안하무인처럼 행동해도 정말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 모습이 멋졌다.

    ‘ 가가.’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 잘생 긴 얼굴, 부유한 재산, 피아노 앞에서의 진지한 표정.

    장점이 차고 넘쳤지만 그 때문에 사랑한 것은 아니다.

    까칠한 외면 뒤에 여린 마음을 본 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관심이 갔다.

    매일 무얼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다 보니 어느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다해 얼굴에 힘을 줘야 했다.

    첫 데이트는 신선했다.

    나도 그도 지나친 관심을 받고 있는 터라 마땅한 식당을 찾을 수 없었고 도중에 비까지 내려 두 시간 동안 그의 차에서 그가 사 온 햄버 거를 먹었다.

    비를 맞아 스트레이트를 해둔 머리 가 꼬불꼬불해졌고, 모처럼 차려 입은 옷은 어두운 탓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로 당황하는 눈치였다.

    축축한 햄버거는 얼굴에 묻을까 봐 얼마 먹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와 그렇게 오래 이야기 해본 적은 처음이었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9년을 만났고.

    어제 우리 만남이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

    왜 사과했을까.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 가득했던 그 의 눈빛이 거짓이었다고 믿기 싫다.

    지금은.

    그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예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어머니의 말씀에 겨우 상념을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냥. 야경이 멋있어서요.”

    괜한 걱정 끼쳐드릴까 싶어 포크를 쥐는데 아버지께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래. 소개해 준다는 사람은 언제 볼 수 있느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죄송해요.”

    “음. 예나, 괜한 말 꺼내는 것 같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그러게요. 정말 못됐죠?”

    더 말이 이어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긍정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아쉽긴 해도 엄마는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서 기분이 좋단다.”

    “저도 그래요.”

    웃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찰스, 콩쿠르는 언제 시작하니?”

    “다음 주 수요일부터 해요.”

    “누가 나오니?”

    그에 대해 잔뜩 자랑할 생각이었던 화제가 지금은 불편할 뿐이다.

    “배도빈, 막심 에바로트, 최지훈, 니나 케베리히, 가우왕 정도가 유명 하죠.”

    “어머나. 정말 기대되는구나.”

    “잠깐. 가우왕이라면 예나 피아노 선생 아니었나?”

    “ 맞아요.”

    “그 친구는 항상 구설수에 오르더 구나. 지금도 연락 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그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도, 말한 적도 없는데 연 락을 하고 지냈단 사실을 알고 계신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면 됐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하셨다.

    “예전 일 때문에 걱정하시는 거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예전 일이라뇨. 전 들은 적 없어요.”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에 거듭 물으니 아버지께서 입가를 닦으시곤 별일 아니라는 듯.

    잔인한 말씀을 하셨다.

    “너와 교제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잘 타일렀으니 걱정 말거라.”

    너무 당황스러워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들은 대로다.”

    “무슨 말씀이시냐고요!”

    훙분해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예나, 실례잖니.”

    어머니께서 주변을 둘러보며 목례를 하신 뒤 날 탓하셨지만 그런 일 따위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아버지께 그런 말을 했었어요?”

    “왜 그러느냐. 이상하구나.”

    “타일렀다니 무슨 말씀이신지부터 알려주세요. 알아야 하겠어요.”

    아버지께서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내셨다.

    “널 좋아한다고 하기에 달랬을 뿐 이야. 식민지 사람과 만나게 할 순 없잖느냐. 더구나 동양인이고.”

    “••••••네?”

    귀를 의심했다.

    “진심이었던 것 같지만 생각은 짧 더구나.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허락해 주겠냐고 해서 그런들 출신이 달라지진 않는다고 잘 알려 주었으니 걱정 마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아버지가 지금 무슨 말을 하신 걸까.

    “아버지!”

    “예나!”

    어머니께서 엄하게 꾸짖으셨다.

    “너 대체 왜 이러는 거니? 너를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현명하게 대처하신 거야. 대체 무엇 때 문에 이러니?”

    엄하게.

    말도 안 되는 말을 꺼내신다.

    “너 설마…… 그 사람이랑 만나고 있었니?”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예절을 지켜라. 어려운 사람을 보듬어라.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라고 가르치시고 행하셨던 부모님이.

    그런 부모님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저 그 사람 사랑해요.”

    “예나!”

    아버지께서 어렸을 적 날 꾸짖으실 때와 같이 언성을 높이셨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람이라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부모님을 향한 이 마음은 분명.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를 향한 이 당혹과 화는 분명 배신감이다.

    “세상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에요. 자기 분야에서 그렇게 되는 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제가 아는 누구보 다 올곧은 사람이에요!”

    미련할 정도로 정직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애도할 줄 알며, 신념을 다한 사람이라면 개인 적 친분이 없어도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누구냐. 위대한 브리튼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다. 그런 네가 식민지

    사람과 만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느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웃기지도 않는 차림으로 웃 음이나 팔고 다니는 자가 너와 어울 린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

    “음악을 해도 점잖게 하는 네 오빠를 보거라. 재주가 있어도 귀천은 어디 가지 않아!”

    믿을 수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듬으라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귀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 리다. 그것을 어찌 혼인과 같이 중 대한 일에 적용하려 하느냐!”

    말문이 막힌다는 느낌도 처음이었다.

    어떻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지.

    인종과 국가로 차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다.

    “네 오빠를 보거라. 유색 인간들을 교화시키고 있잖느냐. 안타깝고 불 쌍하니 그러라고 한 말이야. 내가 언제 네게 거짓을 말했단 말이냐.”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머리가 하얗게 되는데 오빠의 목소리가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그만하세요.”

    “찰스.”

    “제가 왜 그 일을 하는지 정녕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왕실 의 피를 이었다는 자부심은 저 또한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타인을 천하다고 여기십니까.”

    “찰스 너마저?”

    “식민지라니. 대체 언제까지 제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계실 겁니까? 부끄럽습니다.”

    “찰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입에 담는지 알고 있니?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운 적 없구나.”

    말문이 막힌 아버지와 오빠를 탓하는 어머니를 두고 오빠가 손을 잡아 이끌었다.

    “ 가자.”

    “어딜 가느냐!”

    아버지께서 테이블을 내려치셨다.

    “정녕 네 동생이 그 불한당 같은 놈과 만나게 내버려둘 셈이냐!”

    “매너 없고 모난 성격에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 없는 인간이지만 적어도 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반대 하진 않습니다.”

    “찰스!”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는 상 태라, 억지로 이끌고 나온 오빠에게 고마웠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부모님께 무슨 말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이전에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 * *

    “고마워.”

    오빠가 차를 타주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시간을 많이 가 졌는데 그때가 조금 그립기도 하다.

    “원래 그런 분들이니 신경 쓰지 마.”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었어.”

    오빠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홍차로 속을 달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부모님 세대에는 당연한 일이었어. 아직도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왕실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길 바 라셨던 것도, 독일에서 활동하는 걸 반대하신 것도 비슷한 이유였어.”

    전공이 전공인지라 지식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전부터 그런 면이 있었다.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다른 국가를 아래에 두었다.

    그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만이 아니라 유럽 내에서도 마찬가 지였다.

    대영 제국.

    부유한 자본과 막강한 군사력을 지 녔던 탓에 전후 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이 ECSC와 같은 기구를 창설해 서로 협력하려 할 때도, 동등한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고집을 부렸다.

    위대한 브리튼 왕실과 부강한 왕국 에게 그들은 저급한 나라였으니까.

    브렉시트도 그 연장선.

    지금 생각하면 모두 과거의 일이라 고 치부했던 것이 지금도 뿌리 깊게 남아 있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

    부모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습네.”

    “우습지.”

    그리고 아마.

    내가 당황스러운 만큼 그이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가족이라면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

    자신보다 가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 하는, 나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가족만 유럽으로 대피시켰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으면서도 그다운 행동으로 여겼다.

    그런 사람이라서.

    내 부모님께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열받네.”

    “어쩌겠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셨어. 나도 여러 번 부딪쳤지만 안 변하시더라. 아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하는 데 말이야.”

    “그거 말고.”

    가족을 너무 사랑하니까, 다툴 게 분명하니까.

    나와 가족 사이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모두 이해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일이고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 이유로 지금껏 망설인 거라면.

    사과한 거라면 서운하다.

    결국 그 정도만 사랑했단 뜻이니까.

    정말 나쁜 놈이다.

    “나쁜 새끼……

    “그래. 잘 생각했어. 빨리 헤어져.”

    오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헤어지란 말을 꺼냈다.

    “아까는 편들어 주더니?”

    “너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양아치 같은 놈을 만나. 그런 놈들이 나중에 가정폭력 저지르는 거야.”

    “오빠가 그 사람에 대해서 뭘 알아! 얼마나 다정한데! 얼마나 순한데!”

    “너도 나쁜 새끼라며.”

    “나는 괜찮은데 오빠는 안 돼.”

    오빠도 부모님도.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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