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78화
104. 새빨간 재킷과 선글라스(4)
‘왜 가만히 있어?’
배도빈은 언제나 당당했다.
모든 행동에 확신이 있었다.
그 어떤 때라도, 누구 앞에서라도 결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배도빈이었기에 가우왕의 말에 답하지 않는 모습이 낯설었다.
“네 입으로 말했지. 최지훈이 우승하지 못할 것 같다고. 내가 더 잘났 는데 그놈은 되고 난 안 되는 이유 가 뭐냐고!”
“유치하게 굴지 마요!”
가우왕의 말이 최지훈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배도빈의 모습이 총알처럼 박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얼마 전, ‘피아노 협주곡 A108’을 연주하며 최지훈은 마침내 배도빈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생각했다.
그저 동경만 했던 별들의 세계에 마침내 이르렀다고 여겼다.
마침내 형제와 나란히 섰다.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인 가우왕이라도, 스승 크리스틴 지메르만 이라도 그 자리를 양보할 순 없었다.
자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어렵다고 말해도 최지훈만은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자신 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나눴던 약속이었고.
적어도 배도빈만은 자신을 믿어줄거라 생각했다.
“ 정말이야?”
최지훈이 앞으로 나섰다.
언성을 높이던 가우왕과 배도빈이 잠시 행동을 멈추고 최지훈을 보았다.
항상 웃고 있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말 내가 우승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가우왕 씨 내보내려는 거야?”
“아니야. 오해라고.”
“오해는 무슨 오해야! 네 행동이 그렇잖아!”
“좀 닥쳐요!”
배도빈이 가우왕에게 일갈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냉정했던 최지훈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 야.”
최지훈은 더 이상 배도빈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추궁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배도빈이 정말 자신 때문에 가우왕을 내보내려 했을까 봐.
자신이 가우왕을 넘어서지 못할 거 라 생각해서, 그래서 그랬다고 할까 봐 무서웠다.
그러면 정말 실망할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형제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해라는 말을 믿고 싶어서 자꾸만 치미는 나쁜 생각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려는데.
“어디 가!”
배도빈이 자리를 박찼다.
최지훈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힘껏 돌려세웠다.
최지훈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
나 배도빈은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내 말 들어!”
최지훈이 애써 눈물을 참고 배도빈을 보았다.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체격 차이가 있는 배도빈을 내치지 못할 리 없었다.
믿고 싶었기에.
냉정을 가장하고 배도빈을 보았다.
“그래. 맞아. 가우왕이 이길 것 같았어.”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주지.
최지훈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ㄴ 남주가 쓰레기네.
ㄴ 나 지금 너무 충격이야. 진짜 도빈이가 그랬다고?
ㄴ 발단 전개 없이 절정만 보여주는 막장 드라마 좋고요.
“ 놔.”
“끝까지 들어!”
최지훈이 손을 들며 몸을 틀자 배도빈이 다시금 그를 돌려세웠다.
“처음부터 네 자리였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였다고.”
“듣기 싫어.”
“최지훈!”
“그만해!”
애써 참았던 화가 터져 버렸다.
“최고가 되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며. 베를린 필하모닉 피아니스트는 그래야 한다며!”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노력한 사람은 보상 받아야 한다며!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했던 말들은 뭐야? 나한테 해줬던 말은 뭐냐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자리 맡아주면 정말 좋아할 줄 알았어? 너 한테 난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지난 시간들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아서 차라리 악몽이길 바랐다.
“그래! 가우왕 씨한테 질 수 있어. 내가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니 까! 세계에서 제일 멋진 피아니스트니까!”
“최지훈!”
“어렵다는 거 알아! 그래도, 그래도 이런 식으로 바라진 않았어.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열 번 도전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지금 까지 그랬으니까!”
결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남들보다 못하면 그만큼 더 노력하면 된다고 했잖아! 그런 말을 했던 네가, 네가 어떻게 날 이렇게 비참하게 해?”
기자회견장이 숙연해졌다.
“……너만은 믿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최지훈이 떠나려 할 때.
배도빈의 혼잣말이 그를 멈춰 세웠다.
“너야말로 날 그렇게밖에 안 봤냐.”
배도빈이 가우왕과 최지훈을 번갈아 보았다.
“필요없다고.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 필요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배도빈이 소리쳤다.
“내가 너랑 함께하고 싶다고. 너랑 가우왕 중에 누가 더 뛰어난지 조금도 관심 없다고!”
배도빈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우왕과 최지훈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최고여야 했으면 내가 했어. 사카모토를 들이든 지메르만을 들이든 글렌 골드를 들이든 이미 정해졌을 일이야. 왜 이해를 못 해!”
“내가 너랑 하고 싶다고. 네가 저 인간보다 잘하든 못하든! 손이 부러 졌든 망가졌든 너랑 하고 싶다고!”
“도빈아……
“그걸 왜 너희들끼리 정해? 왜! 다른 사람이 우승하면 그 사람 데리고 해야 해? 웃기지 마! 내 악단이고 내 곡이야. 내가 만든 무대에 왜 관 심도 없는 피아니스트를 올려야 하냐고!”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가우왕에게 도 소리쳤다.
“떼쓰지 마! 당신 리사이틀 듣고 싶은 사람 수백만 명이야. 당신이 연주하는 소나타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 있겠다고 고집이야?”
“곡 받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당신이라면 열 개든 스무 개든 써 줄 수 있어. 협연하고 싶으면 와서 해! 자기도 솔로로 활동하고 싶으면 서 대체 뭔 고집이야!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가우왕은 내가 적어 놓은 대로 연주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난리 치는 사람이라 고!”
“최지훈 너! 넌 내가 최고가 아니 면 같이할 생각 없었냐? 내 곡이 아리엘 얀스보다 덜 팔리면 LA로 갈 생각이었어?”
“왜 말이 그렇게 돼!”
“너랑 저 인간이 지금까지 이딴 식으로 억지 부리잖아!”
배도빈이 테이블 걷어차 버렸다.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배도빈이 떠나려 하자 단원들과 함께 있었던 나윤희가 튀어나와 배도빈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가우왕과 최지훈에게 고 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오해하지 마세요. 전부, 전부 제 탓이에요.”
“누나 그만.”
“제가 그러자고 했어요. 가우왕 씨 랑 악단을 분리시키면 도빈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할 수 있을 거라 생 각했어요. 제 탓이에요. 지훈아, 도빈이 그런 생각 조금도 안 했어. 나 보다 너가 더 잘 알잖아.”
나윤희가 최지훈과 가우왕에게 애 걸복걸했다.
“가우왕 씨도 아시잖아요. 도빈이 가 가우왕 씨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동안 마음고생 정말 많이 했어요. 개인 활동 보장 많이 못 해준다고, 자기가 자꾸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고. 저 때문이에요. 제가 멍청해서 그래요. 제발 오해 푸세요.”
“그만 해요.”
배도빈이 나윤희를 말렸다.
“세 사람 오해 저 때문에 생긴 거 예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만 하라고요!”
배도빈이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나윤희를 붙들었다.
ㄴ 나윤희는 뭐얔ㅋㅋㅋㅋㅋㅋ
ㄴ 개환장파팈ㅋㅋㅋㅋㅋ
ㄴ 아니, 나윤희가 그러자고 해서 진짜 그렇게 된 것도 이상한데?
ㄴ 킹능성 있어 보임. 푸르트벵글러 실각과 배도빈 취임을 주도했다는 카더라도 있었음.
ㄴ 베를린 필하모닉 실세인 듯.
ㄴ 이 드라마 엔딩 어떻게 되죠?
ㄴ 아닠ㅋㅋㅋㅋ 그렇게 소리치고 싸웠으면서 지금 다들 민망해하고 있는 거 실화야?
ㄴ 오해 풀리니까 다들 시선 피하는 거 봨ㅋㅋㅋㅋㅋㅋ
당황해서 끼어들 생각도 못 했던 이자벨 멀핀이 마이크를 잡았다.
“……사, 삼십 분간 조정에 들어가겠습니다. 내빈해 주신 분들께 양해 구하겠습니다.”
“컇학햫핰크핳악항하악핳핳칵학. ”
마누엘 노이어와 피셔 디스카우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가발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웃어 댔고 이승희가 두 사람의 발을 밟고 나서야 겨우 소리 죽여 웃을 수 있었다.
카밀라 앤더슨과 이자벨 멀핀, 빌 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미팅실에서 배도빈, 가우왕, 최지훈, 나윤희을 앞 에 두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야!”
푸르트벵글러가 일갈했다.
배도빈은 짜증 나는 듯 시선을 피 하고 있었고 가우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지훈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 지 못했고 나윤희는 여태 자기 잘못 이라며 가우왕과 최지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윤희 너도 그만 좀 해라!”
푸르트벵글러가 혼을 내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카밀라 앤더슨이 나윤희를 두둔했다.
“나 악장 잘못 아니야. 중간에 세 사람이 이야기만 했어도 아무 문제 없었어.”
“내 말이 그거잖아. 대체 왜 말도 없이 일을 진행해?”
가우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평을 늘어놓자 배도빈이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어제 전화 두 번이나 안 받았으면 서 뭘 잘했다고 그래요?”
차마 예나 브라움과 같이 있어 몰랐다고 답할 수 없었던 가우왕은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는 연락 없었잖아.”
최지훈이 따졌다.
“……이해할 줄 알았지.”
“말도 안 했으면서 어떻게 이해해.”
“시끄럽다!”
푸르트벵글러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어쩔 거야! 밖에 기자들만 백 명 이 넘게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 할 지 정해야 할 거 아니냐!”
가우왕이 귀를 파다가 배도빈에게 물었다.
“진짜 최지훈 말고는 생각 없는 거냐.”
“ 네.”
“빌어먹을 꼬맹이.”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협연해.”
“그럼요.”
“네가 한 말이니까 지켜. 곡도 내 놔. 다른 누구도 연주 못 하는 곡 만들라고.”
“내키면요.”
가우왕이 배도빈을 노려보다 피식 웃었다.
최지훈은 두 사람이 화해한 듯해 일단은 안도했다.
그때 쭈구리가 된 나윤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그녀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기에 배도빈은 테이블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해서요.”
“뭐가?”
되물은 카밀라 앤더슨뿐만 아니라 다들 의아해하는데, 겨우 고쳤던 말 더듬는 버릇이 튀어나왔다.
“퍼, 퍼스트 피아니스트는 한 사람 이겠지만 꼬, 꼭 피아니스트를 한 명만 둬야 하는 거예요?”
“오, 오케스트라에 피아니스트를 두는 경우를 못 봐서. 꼭 그, 그래야 하나 싶어서……
나윤희의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 하고 한숨을 내쉴 뿐이다가.
푸르트벵글러의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까지 퍼졌다.
“이 머저리들한테 악단을 맡긴 내 잘못이지! 내 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