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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76화 (47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76화

    104. 새빨간 재킷과 선글라스(2)

    두 사람뿐만 아니었다.

    운영진과 악장단도 나윤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황당해할 뿐이었는 데, 소소가 나섰다.

    “일단 찬성.”

    그녀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지만 민폐덩어리인 엄마 아들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는 데에는 무 조건 찬성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군.”

    찰스 브라움도 망설이지 않고 의견을 표명했다.

    그와 나란히 앉은 헨리 빈프스키 악장이 물었다.

    “나 악장이 무슨 생각인지 알겠어? 말 좀 해봐.”

    소중한 동생을 꾀어낸 파렴치한을 안 볼 수만 있다면 이유 따위 상관 없었다.

    “ 모르는구만.”

    헨리 빈프스키의 지적에도 찰스 브라움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자, 잠시만요. 나윤희 악장님. 무 슨 뜻인지 이해 못 했어요.”

    다들 황당해하는 도중 이자벨 멀핀 이 나서서 물었다.

    갑작스럽게 함께한 동료였지만.

    피아노의 황제라 불리는 가우왕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올린 성과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는 연주 자체가 독점이 되어 지금도 ‘잠 자는 숲속의 공주’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으로 폭 넓은 레퍼토리로 배도빈은 자신이 원하는 피아노 협주곡을 얼마든지 프로그램 에 포함시킬 수 있었고, 웃고 떠드는 실내악팀이 빠른 시일에 자리잡 은 데에도 그의 공헌이 컸다.

    운영진 측에서는 현재, 그리고 가 까운 미래까지 가우왕이 최지훈보다 모든 면에서 앞선다고 판단하여 내 심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에 남아주 길 바라고 있었다.

    이자벨 멀핀의 질문에 운영진이 고 개를 끄덕였고.

    나윤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이후로 가우왕 씨가 최고라는 데 이견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말까지 하셨으니까……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1년 전, 가우왕의 도발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 이 꼬맹이 말고도 도전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찾아와. 내년 이 맘때까지 기다려 주지. 어디 발악들 해봐.’

    전 세계 피아니스트를 상대로 감히 자신을 따라올 수 있겠냐고, 발악해 보라고 했던 가우왕.

    그의 말대로 현재까지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 가장 촉망받는 니나 케베리히 조차 고개를 저었고.

    6개월 이상 매진하고도 완벽히 연주해내지 못했던 엘리자베타 툭타미 셰바의 일화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 실이었다.

    “덕분에 오디션에 참가하려는 분들도 베를린 필하모닉 퍼스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가우왕 씨를 이겨보겠단 마인드인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별개 일로 처리하자는 말씀이셨네요.”

    “네.”

    확실히 나윤희의 말대로 참가를 희 망하는 피아니스트들이 가우왕과 자 웅을 겨루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대중이 기대하는 빅 이벤트를 취소 하지 않아도 되었고 동시에 배도빈 의 의지대로 최지훈을 영입할 수도 있었다.

    “남은 문제는 오디션이 아니게 된 행사를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주최 할 수 있는지네요.”

    죠엘 웨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윤희가 답을 계속해 나갔다.

    “그때 가우왕 씨가 너희도 도빈이 곡 연주하고 싶으면 도전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나윤희의 말에 배도빈이 탄식했다.

    대교향곡의 완성이 코앞이라 더더 욱 짜증이 밀려들었다.

    “도빈이 곡이 걸려 있다면 당연히

    주최도 도빈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베토벤 기념 콩쿠르처럼요. 그렇게 되면 오디션이 아니라 경연이 되겠네요.”

    운영진과 악장단은 모든 일을 명쾌 하게 설명하는 나윤희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배도빈이 곡을 써 줄 수 있는지.

    또 상금을 거는지, 걸어야 하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모두 배도빈을 바라보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했다.

    “그건 알아서 할게요. 상금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우왕과 최지훈이 벌여놓은 상황이 짜증 났다.

    “가우왕 퇴직금으로 해요.”

    배도빈의 말에 두 사람을 제외한 회의 참석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찬성.”

    “좋은 생각이야. 그런 놈을 위해 아까운 운영비를 떼줘선 안 될 일이 지.”

    소소와 찰스 브라움이 배도빈을 지지했지만 다른 쪽에서 난리가 났다.

    “찬성하면 안 되죠!”

    “보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퇴직금을 상금으로 건다니, 잡혀가 실 거예요!”

    다행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 의 격렬한 반대로 경연 상금은 적당 한 수준에서 책정되었다.

    다소 분위기가 진정되었고 안건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홍보가 중요할 텐데.”

    “맞아요. 본래 예정과 달라지는 만큼 참가자와 팬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또 명분 문제네요.”

    문제가 생기자 회의 참석자들은 자연스레 나윤희 악장에게 시선을 모았다.

    지금까지 잘 답을 내놓았던 나윤희가 그러한 분위기에 부담을 느끼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은퇴 무대가…… 적당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 해 함께해 준 가우왕 씨에 대한 헌 정 이벤트로.”

    “가우왕 씨라면 좋아할 것 같긴 하네요.”

    뽐내길 좋아하는 가우왕이 그런 대대적인 헌정 이벤트를 싫어할 리 없다고 판단했다.

    카밀라 앤더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팬들에게는 진지한 경합보다는 축 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겠어. 누 가 우승하는지 궁금한 건 마찬가지 지만 퍼스트 피아니스트 자리에 누 가 앉을지에 대한 기대가 분산되기 도 하고.”

    “그, 그리고.”

    나윤희가 카밀라 앤더슨의 분석에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까지 안 하면 가우왕 씨를 달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 아.”

    확실히 해고당한 가우왕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떠올리면 끔찍한 상상 만 머리를 채웠다.

    “언론에는 가우왕 씨가 스스로 내 려놓았다고 알리면 되지 않을까요? 가우왕 씨의 체면도 지켜주고요.”

    죠엘 웨인의 말에 나윤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왕소소와 찰스 브라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대로만 진행되면 정말 가우왕을 성공적으로 내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결책을 확인한 배도빈도 망설이 지 않았다.

    “멀 핀.”

    “네.”

    “참가 희망자들이 이미 모이고 있다고 들었어요. 내일 당장 공고 올 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배도빈이 잠시 고민한 뒤 계속해 주문했다.

    “경연 제목은 적당히 지어주세요. 가우왕 은퇴식 때문에 정기 공연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 되도록 짧게 가죠. 본선 30명. 1라운드 8명. 결 승 4명이 좋겠습니다. 심사는 저와 세프 그리고 크리스틴 지메르만으로 해주세요.”

    “섭외 가능하신 건가요?”

    “회의 끝나고 바로 연락할 거예요. 괜찮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참가 신청은 일주일 뒤까지 받아 주세요. 예선 심사는 악장단이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네.”

    배도빈의 지시에 악장단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선 시작일은……

    “2월 4일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심 사에 3일 정도 필요할 테고, 일정을 빠르게 가져 가신다면 심사 끝나는 대로 시작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좋아요. 그 날로 하죠. 세부 사항은 추후 공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아, 가우왕 씨에게는 어떻게 연락할까요?”

    배도빈이 곧장 가우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음이 이어질 뿐, 연결 되지 않았다.

    “안 받네요. 나중에 제가 설명할게요.”

    ***

    다음 날.

    코끝으로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 가우왕이 눈을 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푸른 눈이 여느 때와 같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가우왕이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해.”

    “구경.”

    가우왕이 다시 눈을 감았다가 기지 개를 펴곤 예나 브라움을 끌어안았다.

    “깨우지 그랬어.”

    “왜? 잘 때가 제일 좋은데.”

    가우왕이 슬며시 눈을 뜨고 가슴에 기대 누워 있는 예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야?”

    “글쎄.”

    가우왕이 팔에 힘을 주자 예나가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빠져나오려는 그녀와 가우왕의 힘 겨루기가 이어졌고 지친 두 사람이 침대 위에 포개어 축 처졌다.

    예나 브라움이 입을 열었다.

    “배고파.”

    가우왕이 나이트 스탠드로 손을 뻗 어 핸드폰을 쥐었다.

    예나가 함께 볼 수 있도록 멀찍이 들었는데 배도빈에게서 온 두 통의 부재중 통화 기록이 있었다.

    “귀여운 악단주님이 전화했네?”

    “그러게.”

    “전화 안 해봐?”

    “오후에 출근할 텐데 뭘.”

    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프라이버시를 지킬 만한 레스토랑을 검색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은밀하고 조용한 곳을 찾을 순 없었다.

    “그냥 여기서 먹을까?”

    “조식 시간 끝났을 텐데.”

    “당신이 늦게 일어나서 그래.”

    예나가 가우왕을 노려보았다.

    “그럼 적당히 예쁘든가.”

    “그건 그래.”

    예나가 웃으며 가우왕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가우왕도 정신을 차리고자 몸을 일으켜 그들이 묵고 있는 방의 거실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어제 주문해 둔 콜드브루 커피를 꺼내 잔에 따랐다.

    ‘괜찮네.’

    커피 맛에 만족한 가우왕은 어슬렁 거리며 TV 앞 소파에 앉았다.

    -어제 오후, 독일 문단 협회에서 소설가 겸 평론가 해먼 쇼익 씨를 제명하였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저놈이야?”

    -금전 거래로 인한 평론 수수 혐 의를 받고 있는 해먼 쇼익 씨는 최 근 본인의 소설에 관한 세 건의 표 절 시비에도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 얼씨구.’

    -결백을 주장하는 해먼 쇼익 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문단과 출판업계는 해 먼 쇼익 씨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답 없는 인간이구만.’

    -한편 과거 해먼 쇼익 씨가 재직 했던 대학 교직원의 제보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제보자는 해먼 쇼익씨가 학력을 위조했다는 주장을 펼 치고 있어, 당시 인사에 문제가 있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학력도 거짓말이었어?’

    -또한 해먼 쇼익 씨의 아내는 지 금까지 그가 해 온 일들을 믿을 수 없다며 이혼 요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때 유명 소 설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했던 해먼 쇼익 씨에 관련한 이들이 어떻게 진 행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쯧쯧.”

    가우왕은 하찮기 그지 없는 인간의 소식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다음 소식입니다.

    그때 TV 화면에 가우왕의 사진이 내걸렸다.

    가우왕은 가만히 있어도 내버려두 지 않는 자신의 인기를 탓했다.

    ‘어쩌겠어. 다들 내 피아노를 듣고 싶어 안달인데.’

    슬며시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등극한 가우왕 씨가 지난 14개월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과 결별한다는 소식입니다.

    “어머. 당신 짤렸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예나가 타월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짜며 나왔다.

    -이자벨 멀핀 경영본부장은 그동 안 악단을 위해 헌신한 가우왕 씨에 대한 예우로 그를 위한 경연을 다음 달 초에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히며, 가우왕 씨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상냥하기도 해라. 도빈이가 당신 좋아하긴 하나 봐.”

    가우왕은 뉴스 보도도, 예나의 말 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굳은 채 초점 없이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놓칠 것 같아, 예나 브라움이 다급히 손을 받쳤다.

    “덜 깼어? 왜 그래?”

    “……배도빈.”

    “어?”

    “배도비이이이이인!”

    가우왕의 노성에 예나 브라움이 귀를 막았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이 사람이 드디어 미쳤나 싶기도 했다.

    “귀 떨어지겠어!”

    “왜 그래. 당신도 줄곧 솔로로 돌 아가고 싶어서 나가겠다고 한 거 아 냐?”

    “나간다고 한 적 없어!”

    “그럼 짤린 거 맞네?”

    “아니야!”

    예나 브라움은 분해서 바들바들 떠는 가우왕이 너무나 귀여워서 놀리 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도빈이가 전화한 이유가 있었네. 둘이 차분히 이야기해 봐. 이유 없이 그럴 애 아니라는 거 알잖아.”

    예나 브라움의 말에 가우왕이 일단 진정했다.

    “그나저나 직장 잃어서 어떡해? 예 쁘게 굴면 내가 키워줄 수도 있는 데.”

    “시끄러워!”

    간신히 진정했던 가우왕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시선을 뿌리치 고 핸드폰을 찾았다.

    안쪽 방에서 핸드폰을 찾아 배도빈 에게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무슨 일이야! 내가 언제 나간다고 했어!”

    -나간다고 안 했어요.

    배도빈의 태연한 태도에 가우왕이 멈칫했다.

    “안 했다고?”

    -그래요. 안 했어요.

    배도빈의 대답에 가우왕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상하다 싶었어. 뉴스에서 내가 베를린 필에서 나간다고 나오 더라고. 또 누가 루머를 퍼뜨린 모양이야. 아침부터 미안하다.”

    -루머 아니에요.

    “••••••뭐?”

    -해고할 거예요. 만나서 얘기해요. 지금 어디 있어요?

    예나 브라움은 멀쩡히 통화를 하던 가우왕이 굳어버린 것을 보곤 그가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쿡쿡 찔러 보았다.

    -제 말 듣고 있어요?

    “왜? 뭐라고 하는데?”

    배도빈과 예나가 번갈아 물었지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에 가우왕의 이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나가 그를 걱정하여 침대 위에 앉히고 나서야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뭔데 그래.”

    -옆에 누구 있어요?

    정신을 차린 가우왕이 배도빈을 다 그쳤다.

    “방금 너 뭐라 했어?”

    -어디 있냐고요. 차 보낼 테니까 만나서 이야기해요.

    “그 전에!”

    -해고할 거라고요.

    “해고!”

    가우왕이 벌떡 일어나 노성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예나 브라움과 배도빈이 깜짝 놀라고 말았지만 이성을 잃기 직전인 가우왕은 진정할 수 없었다.

    “나를? 이 가우왕을? 그 버터 새끼 도 아니고 나를?”

    _네.

    기가 막혀 또다시 멈춰버린 가우왕 이 분노를 폭발시켜 포효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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