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75화 (475/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75화

104. 새빨간 재킷과 선글라스(1)

2026년 새해를 맞이한 클래식 음악 팬들은 베토벤 기념 콩쿠르가 끝 났음에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작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빅 이벤 트 때문이었는데.

디지털 콘서트홀 구독자 수, 앨범 판매량, 인지도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군림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퍼스트 피아노 자리를 두고.

세대를 대표하는 두 피아니스트가 경합을 앞두고 있었다.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로 입 지를 확고히 한 가우왕과.

‘피아노 협주곡 A108’로 성공적인 복귀를 넘어서 이제는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손꼽히게 된 최지훈의 대결은 팬들로부터 ‘베를린 대전’으로 명명될 정도로 큰 이슈였다.

발표 후 1년이 지나도록 가우왕을 제외하고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런 가우왕에게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민 최지훈 역시 복귀 이후 만 만치 않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기 때문.

몇몇 호사가는 최지훈을 두고 동쪽 에서 찬란한 빛이 왔다는 뜻으로 태 양 같은 피아니스트라 칭할 정도로 최지훈의 최근 기량은 남달랐다.

황제와 태양의 격돌.

크리스틴 지메르만이라는 걸출한 인물 아래서 수학한 두 피아니스트 의 경쟁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라면 놓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한편.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는 베를린 대 전에 감히 도전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가우왕이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 타’ 이후 전 세계 모든 피아니스트를 도발한 탓이었는데.

재작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자이자 북미 최고의 티켓 파워를 자 랑하는 니나 케베리히가 그러했고.

수많은 국제무대에서 우승권에 들었던 사카모토 료이치의 애제자 엘 리자베타 툭타미셰바 또한 참전 의

사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기념 콩쿠르의 파급력을 확인한 전 세계 여러 피아니스트가 속속들이 참가 의사를 밝히니.

이 좋은 기회를 언론이 그냥 넘어 갈 리 없었다.

【니나 케베리히, 베를린 대전에 참 전 의사를 밝히다!】

[니나 케베리히. 참가 동기 질문에 “재밌을 것 같아서요.”]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측정하는 척도는 아니다.]

【툭타미셰바,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못 치냐는 질문에 대노]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연이은 참전 에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가우왕]

【가우왕. “하고 싶으면 하라 해.]

【가우왕. “어차피 우승은 나.” 우승 확신 발언! 참가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고 덧붙여 파문.]

【컨디션 조절에 들어간 최지훈]

【최지훈. “평소처럼 할 생각이에요.”라며 자신감 과시!]

각 언론이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자 팬들의 관심도 더욱 커졌다.

ㄴ 가우왕은 진짜 저놈의 입 때문에 문제임ㅋㅋㅋㅋ

ㄴ 다른 사람들 개무시하는데 실제 로 제일 잘해서 더 화남ㅋㅋㅋㅋ

ㄴ 최지훈 여유 있어 보인다.

ㄴ 그러니까 ㅠㅠ 우리 지훈이 언제 저렇게 컸니 ㅠ

ㄴ 내가 나이는 더 많지만 이제 형 이라고 부르고 싶어 ㅠ

ㄴ 부르면 되잖아.

ㄴ 그러네. 지훈이 형 파이팅

ㄴ 가우왕, 최지훈, 니나 케베리히 이 세 명 중에 한 명이 우승하겠네.

ㄴ ㅋ 뭐.

ㄴ 두 사람도 대단하지만 가우왕한 테는 아직 아니지.

ㄴ 그건 그럼. 가우왕한테 부족한 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예절과 패션 센스뿐임. 피아니스트로서는 완벽함.

ㄴ 근데 왜 아직도 언제 뭐 어떻게 한다는 거 발표가 안 됨? 어디서 볼 수 있음?

ㄴ 베토벤 기념 콩쿠르 때문에 도빈 이 바빠서 그런 거 아닐까?

ㄴ 일을 배도빈 혼자 하냐? 베를린 필에 직원이 몇 명인데.

ㄴ 지금까지 참가 신청도 안 받고 있는 건 이상하긴 하다.

ㄴ 곧 발표하겠지. 아, 아쉽다. 3~4 년만 더 빨리 했어도 전 세대 거장 들도 볼 수 있었을 텐데.

ㄴ  그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으로 활동하겠냐?

ㄴ 근데 진짜 우승하면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으로 활동하는 거임? 그럼

ㄴ 솔직히 말해서 손해인 사람도 많은데.

ㄴ 그래서 참가하려는 사람이 많은 게 신기한 거임ㅋㅋㅋㅋ

ㄴ 솔직히 베를린 필하모닉 퍼스트 피아니스트로 배도빈 곡 받는 것도 욕심 나지.

ㄴ 돈 더 많이 벌고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는데 뭐하러 들어가. 배도빈 곡 연주하고 싶으면 로얄티 지불 하면 되지.

ㄴ 로얄티 지불하고 연주하는 거랑 헌정 받는 거랑 같냐.

ㄴ 막심 에바로트는 안 나오려나?

ㄴ 크으. 그러면 진짜 정상대전인데.

은퇴한 글렌 골드와 그레고리 소콜 라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미카엘 블레하츠를 제외하고.

현 세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는 크리스틴 지메르만, 가우왕, 막심 에바로트, 배도빈, 사카모토 료이치가 꼽혔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이치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극히 줄었고 배도빈 역시 마찬가지라 남은 세 명이 주로 언급되었는데.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이후로는 가우왕이 앞서나가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을 가우왕의 강력한 라이 벌이자 건반 위의 혁명가로 불리는 막심 에바로트가 좌시할 리 없었다.

본인도 참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었지만, 소속사와의 문제, 솔로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 제약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 등으로 최 종적으로는 경합에 참가하지 않는다 고 밝혔다.

크리스틴 지메르만 역시 관중으로 서 두 제자의 경합을 즐기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이번 경합의 우승은 가우왕이 가장 유력했고 그 뒤를 니나 케베리히와 최지훈이 뒤쫓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이 숭고한 대결에는 치명적 인 약점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악단주 배도빈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퍼스트 피아니스트 공개 오디션 요강을 지체하게 된 원인은 악단주 배도빈에게 있었다.

카밀라 앤더슨 전무겸 사무국장이 나섰다.

“퍼스트 피아니스트 공개 오디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와서 무를 수 없어요.”

이자벨 멀핀 경영본부장이 거들었다.

“앤더슨 전무의 말씀대로입니다. 이미 1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일이라 하루에도 수백 개의 기사가 올라 오고 있고, 팬들도 바라고 있습니다.”

배도빈은 가장 신뢰하는 두 사람의 설득에도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공개 오디션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니, 그 이유라도 좀 말씀해 주셔야죠.”

이자벨 멀핀의 거듭된 설득에 배도빈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최지훈 자리였어요.”

운영진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느라 애썼고, 어지간하면 웃고 넘기는 악장단도 입을 벌렸다.

카밀라 앤더슨 전무와 이자벨 멀핀 본부장이 다시 나섰다.

“그런 이유로 이 이벤트를 넘길 순 없어요. 모든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스.”

“올해 크루즈 사업이 확장되면 악단 재정에 영향을 끼칠 겁니다. 피아니스트 공개 오디션은 그 공백을 채울 큰 도움이 될 거고요.”

“크루즈 사업에 적자 생길 것 같아요?”

“티켓값을 올리거나 패키지 기간을 줄이지 않는 이상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보고드렸습니다.”

"음."

크루즈 사업에서 적자가 발생한다 해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탄탄한 재 정이 당장 흔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작년 기준으로 마지노선에 그쳤던 티켓값을 유지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인건비와 물가 상승 등 여러 요인을 이유로 적자가 늘어날 터였다.

“그건 따로 논의하도록 해요. 원인 이 발생한 부분을 해결해야죠. 다른 쪽에서 벌어다 막는 건 임시방편일 뿐이니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공개 오디션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크 다는 건 변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당사자들이 바라는 일이지 않습니까.”

멀핀의 설득은 합리적이었다.

운영진과 악장단 대부분이 여론을 따라 오디션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도빈은 이러한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상임지휘자가 나섰다.

“악단의 인사권한은 전적으로 악단 주에게 있다. 공개 오디션이 아무리 이득이 있다 해도 악단주가 결정할 일이야.”

푸르트벵글러의 발언에 카밀라 앤 더슨이 그를 노려보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이미 전 세계 모든 오케스트라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취소할 순 없어요, 세프.”

“명분은 어느 쪽에도 있지. 그걸 결정할 사람은 악단주뿐이라는 뜻이었어.”

푸르트벵글러가 물러서지 않자 카 밀라 앤더슨이 비아냥거렸다.

“그렇죠. 배도빈 악단주는 누구처 럼 독단해서 판단하지 않으니까요.”

“뭐, 뭐야?”

“뭐가요! 도빈이도 당신처럼 폭군 소리 듣게 할 생각이에요?”

“내가 뭘 40년간 잘만 해왔어! 어떤 연주자를 어떻게 뽑을지는 지휘 자 권한이고 악단주의 권한이야! 그 걸 부정하는 게 말이 된다고!”

“베토벤 기념 콩쿠르 이후 도빈이 한테 생긴 공정한 이미지는 포기할 수 없어요. 마왕이니, 폭군보다 더한 폭군이니 하는 프레임보다 훨씬 긍 정적이라고요! 이제 와서 오디션 없이 뽑아버리면 그 뒷감당은 어쩌려 고요! 안 그래도 일 많아서 사람 많이 필요한데 앞으로 누가 우리 악단 에 지원하겠어요?”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각각 50년, 37년을 근무한 원로 중의 원로이자 배도빈을 제외하고는 최고 실세 두 사람의 격돌에 회의실 분위기가 험 악해졌다.

악장단이 푸르트벵글러를, 운영진 이 앤더슨을 말리고 나서야 겨우 회의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때까지 뚱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 켜보고 있기만 하던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카밀라 말이 맞아요. 지금 와서 물리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빈아.”

카밀라 앤더슨이 배도빈을 대견하게 보는 한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째려보며 철부지 취급하였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는 최지훈 아니면 들일 생각 없어요. 가우왕은 특별한 상황이었을 뿐이에요.”

“암. 그렇고말고.”

푸르트벵글러가 그것 보라는 듯의 기양양해졌다.

그러나 운영진은 배도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도빈과 최지훈의 친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최지훈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했다.

운영진 쪽에서 이러한 의문을 표하니 나윤희 악장이 나섰다.

“저…… 쉽게 이야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실은.”

그녀는 배도빈의 입장이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배도빈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출 전을 앞둔 최지훈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가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날, 그에게 베를린 필하모닉의 퍼스트 피아니스트직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형제의 꿈은 최지훈의 부상으로 연기 되었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배도빈은 지휘와 작곡을 이어가는 중에도 무리하면서 피아니스트직을 맡아두고 있었다.

가우왕이 위기를 겪으며 그를 살리 기 위해 잠시 내주었으나, 배도빈은 언제나 그 자리를 최지훈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동시에 모든 단원이 배도빈의 그러 한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훈이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아요.”

“흠.”

나윤희로부터 배도빈의 입장을 전 해 들은 운영진은 더욱 답답해졌다.

애초부터 최지훈을 위해 배도빈이 마련한 자리라면 저렇게 고집을 부 리는 것도 일견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처럼 직원 고용 에 관한 일은 악단주에게 권한이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찰스 브라움이 입을 열었다.

“팬들의 바람을 따라 오디션을 하자니 배도빈 마음에 안 들고, 그냥 임명하자니 이미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건데.”

찰스가 배도빈을 보았다.

“하지만 또 내가 알기로 그 친구도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는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아닌가?”

“맞아요.”

배도빈이 가장 짜증나는 부분이었다.

그는 가우왕과 최지훈이 멋대로 일을 벌인 탓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지훈이 그 양아치의 코를 밟아 주고 쫓아내 준다면 그보다 근사한 상황도 없겠어.”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찰스 브라움의 발언을 무시했다.

그때 나윤희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케르바 슈타인과 헨리 빈프스키, 왕 소소 등 악장단이 반갑게 반응했다.

푸르트벵글러 탄핵 사건과 배도빈 강제 취임 사건의 주동자, 나윤희라면 이번에도 좋은 해결책을 내주리라 여겼다.

“지금 오디션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가우왕 씨를 누가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자벨 멀핀 본부장이 긍정했다.

“그리고 도빈이는 지훈이를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고.”

“맞아요.”

배도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쪽 다 만족할 방법이 있는데……

“ 말해봐요.”

배도빈이 반갑게 나섰다.

이 지루한 회의를 조금이라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가, 가우왕 씨를 해고하면 돼요.”

지난 두 번의 사건과 달리.

그녀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배도빈 과 왕소소마저도 나윤희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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