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74화
103. 일상으로(3)
차채은이 인사하자 진달래가 비명을 질렀다.
“평론가래! 평론가!”
대중 앞에 나서길 두려워했던 차채은이 스스로를 평론가로 소개하니 진달래뿐만 아니라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많은 분들께서 어떻게 그렇게 어 린 나이에 음악적 지식을 풍부히 쌓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십니다. 주 변 영향을 받았을 거라 예상들 하시 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생각하시는 대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역시 배도빈 악단주나 최지훈 피 아니 스트겠죠?
-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생각만 들어서, 지식 이 많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아요.
우려와 달리 제대로 문답을 나누고 있는 모습에 배도빈과 그 무리의 입
가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우진은 차채은이 무엇을 좋아하고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등의 가 벼운 질문을 이어가다 이내 본론으로 들어섰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들 궁금 해하시는 질문을 해야 할 텐데요. 준비되셨나요?
_네.
-최근 평단과 언론의 병폐가 크게 이슈화되었습니다. 그 포문을 차채은 씨가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데, 실제로 그간 협박 및 조롱으로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차채은이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쉬었다.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청객과 시청자 모두 그녀가 불안 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단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대항 할 용기는 어디서 나왔나요?
-용기는…… 아닌 것 같아요. 지금 도 무서우니까요.
우진은 차채은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끼어들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반응할 뿐이었다.
-사실 좀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는데 망설였어요. 누군가는 하지 않을까, 저 말고도 대단한 분이 많으니까요.
-그러다 결국은 평단의 잘못을 지적하셨죠.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보 면서 정말 많은 음악가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제 생각 보다 훨씬 더 많이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거장의 선택의 사회를 맡았던 우진이 차채은의 발언을 지지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하고 가볍게 웃으며 공감했다.
-네. 단 한 번 방송을 타기 위해, 심사를 맡으셨던 거장들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 고 뭐랄까. 저렇게까지 하는데, 저렇게 좋은 곡을 쓰는데 굳이 왜 콩쿠르에 나섰을까 싶었어요.
-이미 알려진 음악가도 다수 참가 했었죠.
-네. 그리고 굳이 저렇게 안 해도 충분히 자기 입지를 굳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참가했을까란 의문 자 체가 틀렸단 걸 깨달았어요.
-틀렸다.
-네. 2라운드 직후에 음악가 파울 리히터 님과도 인터뷰를 나눴는데. 그…… 곡을 만들고 녹음하는 건 문 제가 아니지만 홍보가 문제였대요. 사실 정말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그 런데도 그런 어려움이 있어서 출전 하셨단 말에 조금 충격이었어요.
-이제 무슨 생각으로 나섰는지 알 것 같군요.
-네. 음악가들은 그렇게 필사적인 데, 정말 좋은 곡을 만들었는데 정 당한 평가를 못 받고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어요. 용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TV를 시청하고 있던 차채은의 지인들은 내심 안도했다.
유려한 화술은 아니었지만 평범하 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친구 가 자랑스러웠다.
특히 아리엘 얀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차채은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글쎄요. 차채은 씨는 용기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아 리엘 얀스 씨도 억울함을 조금이나 마 푸셨고요.
우진의 칭찬에 차채은이 민망해 했다.
-아리엘 얀스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습니다. 저도 정말 깜짝 놀랐는데요. 화제의 인물 레이라 와 아리엘 얀스가 동일인물이었단 사실이죠. 베토벤 기념 콩쿠르 심사를 맡으셨던 분들께서도 차채은 씨 의 날카로운 분석을 언급하셨는데, 어떻게 발견하신 건가요?
-그 부분은 조금 부풀려진 점이 많은데.
-부풀려졌다.
-네. 사실 그렇게까지 큰 공통점이 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글에서도 적었지만 같은 인물이라고 쓴 게 아 니라 닮았다는 뉘앙스였습니다. 아 리엘 얀스 씨와 레이라가 동일인물 이 아니냐는 말은 종종 나왔었고요.
우진이 질문을 하려다 차채은이 하 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기에 말을 삼켰다.
차채은은 가볍게 목례하고 입을 열었다.
-그것에 관련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요.
_네.
-저는 아리엘 얀스 씨와 레이라가 같은 사람이었단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저만 밝혔다고 잘못 알려지는 것 도 꺼려지고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꾸 돌아가는 듯했다.
기왕 방송에 나섰으니 명확하게 말 하고 싶은데 부담이 어깨를 짓눌렀다.
차채은이 방청객 구석에 있는 한이 슬을 보았다. 그녀는 눈이 마주하자 두 주먹을 쥐고 가슴 앞에서 힘껏 내리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 괜찮아.’
안간힘을 다해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차채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팬 분들이 스스로 자기는 음악을 잘 모른다고 여기시면서, 제 이야기를 믿으시려는 게 걱정돼요. 이번 일도 사실 평단의 말을 맹신해서 벌 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히 권위자의 말은 일단 신뢰 가 가니까요.
-네. 그런 경향을 이용하려는 사람 이 있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채은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들 그걸 느끼시고…… 바른말을 했던 분들의 말을 믿으시는 것 같아요.
-좋은 현상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발언하던 차채은의 어조가 바뀌었다.
-본인을 믿으셔야 해요. 개인의 감상이 평론가의 말보다 앞서면 안 돼요. 이번 일로 커뮤니티 사이트나 포럼에서 곡에 대해 말씀하시고 감 상을 남기고 그런 활동이 줄어들었는데.
-확실히 자제하는 분위기가 확산 되고 있죠.
-네. 근데 저는 팬 여러분이 스스 로를 무지하거나 틀렸다고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차채은이 고개를 들어 우진과 눈을 마주했다.
-많은 분들께서 제가 글을 쓰기 전부터 이미 아리엘 얀스 씨의, 아니, 레이라 씨의 곡에 감동하셨잖아요.
-분명 그랬죠.
-좋다. 싫다. 취향이 아니다. 이런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평론가가 욕을 하고 칭찬하든 자기에게 좋은 음악은 좋은 음악이에요.
- 아.
-레이라가 아리엘 얀스 씨였다는 걸 몰랐다고 실망하시고, 그걸 몰랐던 평론가들을 비난하시고 저를 믿 으실 필요 전혀 없어요. 여러분도 결국 좋은 곡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단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한차례 말을 마친 차채은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적을 때 욕설을 쓰거나 사실이 아닌 걸 말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감 상이 아니라 범죄니까요.
‘ 언제.’
배도빈은 엄마 뒤에 숨어 고개도 못 내밀던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낯을 많이 가려 피아노를 함께 치 기 전까지는 마음을 열지 못했던 다 섯 살 꼬마가 지금은 수만 명이 보는 방송에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었다.
해외 활동이 잦았기에 헤어질 때마 다 울고 삐지고 했던 녀석이, 음악가와 대중 그리고 평론가의 입장을 너무도 명확히 풀어내고 있었다.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에 배도빈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어렸다.
“좋은 음악은 좋은 음악일 뿐이다.”
아리엘 얀스가 차채은의 말을 곱씹었다.
“좋은 말이네.”
나윤희도 웃으며 TV 속 부끄러워 하는 차채은을 바라보았다.
진달래와 왕소소가 엄격하고 진지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차채은의 말에 동조했다.
배도빈은 평론이 작품을 더욱 깊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평론가도 음악을 사랑할 뿐이었다.
좋으니까 더 알고 싶어서 파고들고 자신의 감상과 분석을 글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중도 그들의 글로 미처 알지 못 했던 정보를 얻어 아쉬움을 달래지 않을까 여겼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생겼다.
공부한 사람은 대중이 무지해서 클래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대중은 클래식 하는 사람들은 고상하고 대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의식 있는 음악가들이 클래식의 대중화를 시도했지만 가시적인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조금씩 변화했다.
그 중심에는 사카모토 료이치를 비 롯한 몇몇 뉴에이지 음악가가 있었고 마침내 배도빈에 이르러 클래식 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쉬운 음악.
대중은 배도빈과 사카모토 료이치를 구심점으로 이해하기 쉬운 음악, 솔직한 음악, 정체성을 가진 음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중과의 교감을 중시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도 새로 유입된 이들이 감상하기 좋았다.
대중을 향해 당신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차채은은 그러한 경향을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음악은 음악가와 대중의 대화 수단.
권위도 정답도 있을 리 없었다.
차채은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팬들 이 자신의 솔직한 감상이 아무 의미 없다고 여기고, 권위자의 말을 좇는 것이었다.
현재 차채은 본인의 말만을 믿으려는 경향을 저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본인의 말은 좋은 음악을 더 알아 보기 위한 참고서일 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평론가가 좋게 말한 곡을 들으려 애쓰지 않았으면 했다.
반대로 평론가가 나쁘게 말한다 해 서 좋은데도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문화가 생기지 않길 바랐다.
중요한 것은 대화를 나눈 음악가와 대중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평론가는 그들의 대화를 좀 더 원활하게 돕는 사람일 뿐이었다.
“채은이 멋있다. 그치?”
“그러게.”
최지훈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고 배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수를 마셨다.
“ 하아.”
방송을 마친 차채은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너만 모름’ 팀과도 모두 인사를 나누었다.
“잘하는데?”
“언니이.”
한이슬이 다가오자 차채은이 그녀 에게 안겼다.
한이슬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하나의 고개를 넘은 차채은을 꽉 안아주었다.
두 사람은 짐을 챙겨 방송국을 나 섰고 이내 로비에서 몇몇 기자에게 잡혀 있는 최지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데려다주려 했는데 마중 나와 있네?”
“도빈 오빠네에서 파티하거든. 언 니도 가자.”
“배도빈 저택에서의 파티면 욕심이 나긴 하는데, 이번엔 패스.”
“왜? 같이 가.”
“내일 아침에 또 조사받으러 가야 하거든.”
“그런 표정 짓지 마. 양심에 찔리는 일이긴 해도 범법은 안 저질렀으니까.”
“고마워.”
“됐네요. 너 때문에 한 일 아니라고 했잖아. 빨리 가. 남자친구 기다린다.”
“언니!”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야!”
“핸드폰에읍.”
“채은아.”
최지훈이 차채은을 발견하고 다가 오자 차채은이 한이슬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한이슬은 더 놀렸다간 차채은이 크게 삐질 것 같아 입을 닫았다.
“끝났어?”
“아, 어. 이, 인사해. 이슬 언니야.”
차채은이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리며 한 이슬을 협박했다.
“안녕하세요, 최지훈입니다.”
“반가워요. 한이슬이에요.”
“이번에 많이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도빈이 네윽.”
“언니 나 갈게. 모레 봐. 오늘 고마워. 사랑해.”
한이슬은 최지훈을 끌고 나서는 차채은을 보며 웃고는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한 달간의 전쟁이 비로소 어느 정 도 마무리된 기분이라, 또 차채은이 조금씩 예전 모습을 찾아가는 듯해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