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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73화 (47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73화

    103. 일상으로(2)

    독일 최고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너만 모름’은 어렵게 섭외한 화제 의 인물, 칼럼니스트 차채은 특집 방송을 앞두고 있었다.

    2009년부터 가파르게 성장해온 클래식 음악계.

    기존 기득권의 병폐가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에 용감히 발언하고 나선 어린 칼럼니스트의 생각이 무엇인 지,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 보려는 취지였다.

    베토벤 기념 콩쿠르 진행을 맡았던 우진은 최근 지나치게 늘어난 활동 에 피로를 느꼈다.

    너만 모름의 담당 PD는 우진의 상 태를 살폈다.

    “괜찮겠어?”

    “안 괜찮아. 죽겠어.”

    “혹시나 싶어서 오라 했는데 잘 됐네. 야, 3대기실 가서 매리 씨 불러 와.”

    “네, PD님.”

    최근 주목받고 있는 아나운서의 이름이 언급되자 우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 제 안 한다고 했어?”

    “농담이야, 인마 그러니까 얼굴 좀 펴. 다음 촬영은 하루 미뤄줄 테니까.”

    “내가 언제 울었나? 하하! 하하하!”

    “그래. 우리 이 자리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냐. 조금만 더 힘내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연 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시청자 생각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지십니다. 분명 오늘 방송도 재밌을 거예요.”

    세상에서 돈을 가장 사랑하는 우진 은 조연출의 말을 흘려 들었다. 피로를 잊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대본을 확인하였는데 아무 래도 신경 쓰여, 담당 PD에게 넌지시 물었다.

    “ 괜찮을까?”

    “뭐가?”

    “왜, 차채은 아프다는 이야기 있잖아. 공황장애도 겪고 있다 하던데.”

    “나올 만하니까 나오겠지. 그리고 출연자 긴장 풀어주는 건 네 역할이잖아.”

    “난 솔직히 배도빈 관련된 사람들 상대하는 거 무서워. 무슨 말만 하 면 화내니까.”

    “봄 개편 때 짤리기 싫으면 열심히 해야 할걸?”

    “내가 밥줄로 협박하지 말랬지.”

    “미안합니다.”

    PD의 협박에 궁시렁거리며 대본을 확인한 우진이 출연자 대기실로 향 했다. 방송에 앞서 인사를 하기 위 함이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잔뜩 겁먹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 네.”

    우진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심각하네.’

    우진은 일단 아는 얼굴을 보고 안 심하는 차채은을 보며, 그녀가 얼마 나 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반가워요, 채은 학생. 나 알죠?”

    “네……. 안녕하세요.”

    “방송 전에 이렇게 인사 나누거든요. 긴장도 풀겸.”

    “아, 네.”

    차채은은 우진과 눈을 마주하지 못 하고 이미 몇 번이고 확인한 대본을 볼 뿐이었다.

    ‘이런 이미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배도빈 주변에 있었던 모습과 글에서 받았던 느낌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 게 버티고 있는 이런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오랜 방송 경력을 가졌던 우진은 그녀와 같은 경우를 많이 봐 왔다.

    심각한 수준의 대인기피증을 겪어 보기도 한 우진이 말을 걸었다.

    “이건 그냥 모르는 아저씨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는데. 그냥 흘려 들으라고.”

    차채은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안티 정말 많거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매일 검색해 보잖아? 고글에다가 자기 이름 검색해 보고.”

    차채은이 우진을 이상하게 보았다.

    “……넌 아니구나. 난 그래. 관심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엄청 중요한 일이라고.”

    차채은은 우진이 갑자기 왜 이러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오늘 방송할 프로그램의 진행 자고 쫓아낼 방법이 없으니 그저 가 만있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더라고. 화도 나고. 걔들이 올린 악플 때문에 내 이미지 나 빠지면 어쩌나 싶더라. 난 관심으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말이야. 이것밖 에 못하는데, 이거 아니면 굶어 죽 는데 왜 없는 말을 지어내나 싶더라고. 엄청 힘들었어. 엄청.”

    “아……. 네.”

    “너무 예민해져서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자고 그랬거든. 3년을. 나머지 시간에는 일만 했어. 진짜 가난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거 든. 일을 못 하면 공부라도 했어.”

    갑작스럽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차채은은 갑자기 찾아와 신세한탄하는 아저씨의 말을 들어는 주기로 했다.

    “그러다가 너무 힘들어서 주변에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뭐랄까. 이해 못 하더라고. 악플 같은 걸 왜 신경 쓰냐고. 네 일만 하라고. 지금은 돈 잘 벌지 않냐고 말이야.”

    “히, 힘드셨겠어요.”

    “그럼. 엄청 힘들었지. 지금도 마찬 가지야. 너도 그렇잖아?”

    “아마 배도빈이나 최지훈도 마찬가 지일걸? 아니, 그 두 사람은 좀 사람 같지 않은 면이 있어서 모르겠다.”

    “으흠.”

    차채은은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중 너무나 공감되는 이야기가 나와 웃 고 말았다.

    배도빈, 최지훈, 차채은은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성장했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배도빈, 최지훈의 이야기는 차채은이 본인들 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두 사람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너무나 신기했다.

    우진의 말대로 인간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둘까 정말 많이 고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더 명확해지더라고.”

    “뭐가요?”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 말이야.”

    차채은이 대본을 쥔 손을 꼼지락댔다.

    “억울한 거야. 내가 왜 악플 때문 에 좋아하는 일을 그만둬야 해?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 때문에 밥 벌이를 포기해야 해? 그런 생각.”

    차채은이 반응하지 않자 우진이 당 황해서 사족을 덧붙였다.

    “그 배도빈이랑 최지훈한테 했던 인간 같지 않다는 말이랑 다른 뜻이 라는 거 알지?”

    “흐. 네.”

    “다행이다. 아무튼 그러니까 정말 비참한 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포 기하는 거더라고.”

    차채은은 뜬금없이 찾아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우진을 이상하게 여겼다.

    본인도 아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 냈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크게 위안이 되거나 힘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막상 방송을 앞두고 두려움이 커지던 상황에서 우진이 보내온 호의는 분명 큰 힘이 되었다.

    긴장하지 않도록 편하게 해주려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세트장에서 보자. 시간 뺏어서 미안.”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우진이 멋쩍게 대기실을 나섰다.

    대답할 말을 정리한 문서를 확인하 고자 스마트폰을 펼친 차채은은 진달래, 왕소소, 나윤희, 나카무라 료코, 최지훈, 배도빈으로부터 온 메시 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달래 언니V 15 : 38

    대박! TV 나온다고? 왜 말 안 했어! 고집부려서 떡칠하지 말고 꼭 미용실 가! 너 화장 진짜 못 하니까. 꼭!

    쑈 언니IT 15:39

    올 때 케이크. 딸기 올려진 거.

    푸린 언니IT 15:44

    케이크 있으니까 천천히 오느 파이팅!

    료코쓰나 15:59

    소소 언니랑 배도빈 진짜 너무해. 윤희 언니가 사 온 케이크 다 먹어 버렸어 -n-

    V 16:07

    다같이 방송 기다리고 있어. 끝나면 연락해. 데리러 갈게.

    할아버지나 16:11

    우진이라고 그 양반 몇 번 같이 일 했는데 가끔 헛소리 하더라. 무시해.

    ‘방송 둘이 하는데 무시하면 어쩌라 고.’

    차채은은 배도빈의 메시지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필호와 정세윤으로부터도 응원의 메시지가 와 있어 답장을 보내고 한숨을 길게 내쉬 니 한이슬이 들어왔다.

    “시간 됐다.”

    “응.”

    “나 여기 계속 있을 거니까 세트장 들어가면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불 안하면 나만 보고 말해. 알았지?”

    “그럴게.”

    “막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 막히 면 시간 좀 달라고 해도 돼.”

    "응.

    “너 지금 엄청 예쁘니까 자신감 갖 고. 세상에 이 피부 좀 봐. 완전 애 기네. 애기.”

    “우진이 농담 던져도 굳이 막 웃어 주지 않아도 돼. 안 웃긴데도 웃는 게 더 안 좋아. 독일 사람들한테나 먹히지 그 사람 농담 진짜 못 하거 든.”

    “응.”

    “화장실 다녀 왔어?”

    “다녀왔어.”

    “90분 짜리 방송이라 생각보다 길 어. 긴장하면 가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더.”

    “알았어! 그만 좀 해. 누가 보면 앤 줄 알겠다.”

    차채은이 한이슬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에 웃음 섞인 투정을 부렸다.

    ‘웃잖아.’

    한이슬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똑똑“

    “방송 3분 전입니다! 대기해 주세 요!”

    때마침 스태프가 문을 두드려 시간을 알렸고 이내 ‘너만 모름’이 독일 전역에 송출되기 시작했다.

    ***

    “아, 진짜!”

    나카무라 료코가 소리를 빽 질렀다.

    차채은이 생방을 마치고 돌아오면 함께 먹으려고 준비한 케이크를 배도빈과 왕소소가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버린 탓이었다.

    왕소소와 배도빈은 료코를 보다가 한 조각 남은 케이크로 시선을 옮겼 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것을 접시 에 담아 료코에게 향했다.

    “안 먹어! 채은이랑 먹으려고 사온 거잖아!”

    “괜찮아. 시간 많으니까 다시 사 올게. 그러지 않아도 샴페인 사러 가야 했어.”

    “언니가 그렇게 다 받아주니까 이러는 거예요!”

    “난 괜찮은데……

    료코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나윤희가 배도빈과 왕소소에게 부려먹 히는 것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배도빈이 입가를 닦고 일어서자 그제야 만족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혼이 나서 잔뜩 침울해진 왕소소는 스칼라가 챙겨준 마카롱 덕분에 금 세 기분을 회복했다.

    아리엘과 최지훈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진달래와 료코가 음식을 준비 하는 한편.

    배도진과 스칼라가 배토벤의 하품을 관찰하다 보니 ‘너만 모름’의 방 송 시간이 다가왔다.

    저녁 음식을 거의 준비해 둔 료코는 방송을 보며 마실 에이드를 준비 해 거실로 나왔다.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나눠주었는데 마침 배도빈과 나윤희가 케이크를 사 들고 귀가했다.

    “아, 시작한다.”

    떠들썩했던 배도빈 저택의 1층이 조용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너 만 모름의 우진입니다. 어제 갑작스 레 발표했던 대로 생방송으로 진행 하게 되었습니다. 화제의 인물이죠? 최근 평단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준 칼럼니스트 차채은 씨를 모시겠습니다.

    우진의 소개와 함께 차채은이 세트 장에 들어섰다.

    TV를 보고 있던 진달래와 나윤희가 오도방정을 떨었다.

    “대박! 대박!”

    “너무 예쁘다.”

    너만 모름의 스태프가 메이크업을 해주려 했으나, 한이슬은 독일 연예 인들의 진한 화장이 차채은에게 어 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채은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한 이슬이 막무가내로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맡겼다.

    자연스럽게.

    피부는 웜글로우 색상의 베이스를 레이어링하고 투명 파우더로 정리할 뿐이었고 입술은 피치 색상의 틴트 로 내추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웨이브 진 단발 머리는 한쪽을 귀 뒤로 넘겨 세팅했고 단정한 이미지를 위해 취람색 재킷과 일자 바지, 흰색 울 티셔츠를 입혔다.

    아주 간단한 화장이었지만 차채은 은 생전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작은 자 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를 응원하는 여러 사람들의 메 시지와 우진의 헛소리 그리고 무엇 보다 평론가로서 계속 활동하고 싶다는 의지에 더불어.

    가슴 깊이 자리한 두려움을 억누를 수 있게 해주었다.

    -반갑습니다, 채은 씨. 우선 시청 자 여러분께 인사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차채은이 빨간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보고 살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평론가 차채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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