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67화 (46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67화

    102.  속일 수 없는 것(1)

    한편.

    평단은 여론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 했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팬들이 그들의 말을 믿고 신뢰했을 때 평단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들의

    글이 읽히기에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평론가들이 교수로 있을 수 있는 것도 원고료를 받는 것도 모두 대중 으로부터 지지받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점차 이상하게 돌아 갔다.

    차채은뿐만 아니라 한이슬이라는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나섰고 그에 더해 그라우트와 같이 권위자 또한 문제를 제시하니, 평단을 의심하는 눈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권위가 흔들릴 위기에 놓이니.

    그들은 아리엘 얀스 때와 마찬가지

    로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응 해야 함을 느꼈다.

    로버트 패트릭 교수는 평론가 협회 의 인맥을 활용해 논란을 단숨에 잠 재우려 했다.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그들의 권익을 위해하는 이가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이면 되었다.

    겁 많은 이들은 알아서 침묵할 터.

    로날도 그라우트, 한이슬은 독자적 인 세력을 갖추고 있으니 가장 적당 한 타깃은 논란에 불을 붙였던 차채은이었다.

    “아둔한 것.”

    로버트 패트릭은 차채은이 발표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감독은 왜 사퇴하였는가’를 보며 한쪽 입꼬 리를 들어올렸다.

    언뜻 보면 문제될 것 없었으나 조 금만 말을 비틀면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넘쳐났다.

    한이슬이 발표한 신중하고 명확한 글에 비하면 정말 손쉽게 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말을 겁도 없이 쓰니 어리다는 게지.”

    평론가는 공신력을 갖춰야 했다.

    아무리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해도 결국 믿음을 주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그런 점에서 한이슬의 글은 건드리 기 쉽지 않았다.

    틈을 보이지 않는 탄탄한 문장과 근거 자료는 섣불리 상대했다간 역 풍을 맞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펜촉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이슬의 고발은 해먼 쇼익 에게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반면 차채은의 글은 평단 전체를 위기로 내모는 듯했으나, 정황상의 추론을 제시할 뿐이었다.

    근거를 쉽게 찾을 수 없을뿐더러 이권으로 단단히 결속해 있는 평단 내부에서 양심선언을 할 이도 없었다.

    결국에는 증명할 수 없는 일.

    로버트 패트릭은 그런 점에서 아리 엘 얀스와 레이라를 비교한 차채은을 미숙한 글쟁이로 볼 뿐이었다.

    거기에.

    여섯 명의 위대한 음악가가 최고로 인정하는 레이라가 아리엘 얀스와 닮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위대한 음악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풋내기 글쟁이라. 정말 안타깝군.”

    그는 대중의 무관심함을 알고 있었다.

    차채은이 레이라와 아리엘 얀스를 동격으로 취급했다고 알리면 차채은은 평론가로서의 공신력을 잃게 되었다.

    레이라가 최고의 신예 음악가라고 판단한 베토벤 기념 콩쿠르 심사위 원들을 모욕하는 일로 몰아갈 수 있었다.

    부족한 기량 때문에 책임지고 감독 직을 사퇴한 아리엘 얀스와 이 시대 최고의 작곡가를 감히 같이 두다니.

    ‘용서가 안 되지. 암.’

    아리엘 얀스를 궁지로 몰아붙인 당 사자 로버트 패트릭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여러 평론 가와 언론인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차채은이 아리엘 얀스와 레이라를 동격으로 두었고, 그것은 베토벤 기 념 콩쿠르 심사위원들을 모욕하는 일이라는 내용을 일괄적으로 발표하 게 하였다.

    그 결과.

    이미 전 유럽과 북미에 속속들이 기사들이 발표되고 있었다.

    잠시 뒤, 거장의 선택의 마지막 방 송과 같은 시간에 본인의 글도 게시 될 예정이었다.

    모두 어리고 무지한 칼럼니스트에 게 속고 있다면서 그녀가 드디어 업 계 최고 음악가 여섯 명의 명예를 깎아내렸다는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정의지.’

    로버트 패트릭의 예상대로.

    문화 카테고리에 올라온 글 대부분 이 차채은을 추궁하자, 다소 주춤거렸던 평단 옹호 세력과 차채은 비난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때마침.

    로버트 패트릭의 교수실에 대학원 생이 찾아왔다.

    “교수님, 반응 올라오고 있습니다.”

    “오, 어떤가.”

    “확실히 의심하는 이들이 줄어들었습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오늘 레이 라가 우승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좋아질 겁니다.”

    “하하하하. 그건 지켜봐야지.”

    “정말, 교수님의 혜안은 못 당하겠습니다.”

    “자네도 열심히 하면 그럴 수 있네. 올해 36이었던가?”

    “하하. 예.”

    “그래. 차채은이처럼 어렸을 적부 터 나대면 이런 실수를 하는 거야. 베토벤 기념 콩쿠르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언짢았겠는가. 자네도 내 밑 에서 4년만 더 힘쓰게. 그러면 내 밀어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로버트 패트릭은 TV를 틀었다.

    마침 거장의 선택의 마지막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콩쿠르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기 하고 있던 배도빈은 인터넷 뉴스란을 보며 인상을 썼다.

    거장의 선택 마지막 방영을 앞두고 분위기는 더욱 가열되었다.

    차채은을 향한 비난의 수준은 인신 공격에 이른 것도 모자라 한 평론가의 삶을 짓밟고 있었다.

    모두 차채은이 베토벤 기념 콩쿠르 의 심사위원단을 무시했다는 말인데, 정작 배도빈과 심사위원단은 차채은의 글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 보고 있나.”

    사카모토 료이치가 다가왔다.

    배도빈이 핸드폰을 보여주자 안경을 슬쩍 들고는 기사를 확인하였다.

    [차채은 선 넘은 발언! “레이라와 아 리엘 얀스는 동급. 베토벤 기념 콩쿠르 심사위원단의 안목이 의심된다.”]

    [거장을 향한 어린 칼럼니스트의 명예훼손, 이대로 괜찮은가]

    [댄 하디, “차채은은 글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

    【해먼 쇼익. “그런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도 문제. 제정신이 아닌 사람 이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심하군.”

    거짓되고 왜곡된 보도에 사카모토는 불쾌함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채은 양의 글은 읽었지만 이런 식으로 매도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네. 아리엘 군과 레이라의 공통점은 우리도 발견하지 못한 것 아닌가. 그 통찰력을 칭찬해 주진 못할망정

    이런 법이 어디 있나.”

    “같은 생각이에요.”

    차채은을 믿기에 잠자코 있었지만 더는 좌시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언론이 차채은의 발언을 왜곡하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차채은이 글을 쓰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댓글이 지지받고 있었다.

    또는 그녀를 유럽에서 추방해야 한 다는 막말도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었다.

    “지훈이 말론 무서워서 밖에도 못 나간대요.”

    배도빈이 주먹을 쥐었다.

    정의를 말하는 만 17세의 아이에 게 수만 명의 사람이 여과 없는 비 난을 쏟아내는 상황에 분노했다.

    “참담한 일일세. 콩쿠르가 끝나면 나도 목소리를 보태겠네.”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빈이 보기에 이 일은 이미 차채은과의 개인적 친분과 그녀를 믿 고 지지해 주는 것을 떠나 업계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오늘 오후부터 차채은에 관한 기사 가 수백 건이 올라왔는데, 그녀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40만 명의 구독자를 가졌다곤 해 도 유럽과 미국의 언론사들이 저마 다 몇 건씩 글을 올릴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라는 것이 자 명한 사실.

    좋은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가 누군 가의 사욕으로 비난받고, 옳은 말을 하는 언론인이 탄압당한다면 그 누 구도 바른 말을 못하게 될 터였다.

    그것은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 게 해가 되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베토벤 기념 콩쿠르의 정신

    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맞아요. 가만있어선 안 돼요.”

    배도빈이 입술을 깨물며 기사를 홅 어내렸다.

    잠시 후.

    베토벤 기념 콩쿠르 결승전, 심사 가 시작되었다.

    나카무라 료코의 배도빈 비올라 소 나타와 함께 사회자 우진이 등장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 러분은 지난 한 달간 수많은 작곡가 들이 흘린 피와 땀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누가 여섯 거장으

    로부터 최종 선택을 받을지 확인하 실 수 있습니다.”

    우진이 뒤로 물러서며 카메라가 이 동했다.

    “천재 중의 천재! 불굴의 사나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물려받았던 남자! 니아 발그레이입니다!”

    TV 화면을 통해 니아 발그레이가 걸어나오는 모습이 비추었다.

    마비 증상의 후유증으로 발을 절었으나 가슴과 어깨를 당당히 펴고 여 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베토벤 기념 콩쿠르 내내 최상위권을 유 지하고 있었다.

    그는 방청객의 환호성에 화답하며 무대에 섰다.

    “최연소 참가자! 마왕 배도빈의 어 릴 적을 보는 듯한 빛나는 재능! 프 란츠 페터입니다!”

    프란츠 페터가 침을 크게 삼키고는 발을 옮겼다.

    잔뜩 긴장한 탓에 팔과 다리가 함께 나갔지만 적어도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대하는 각오만은 남달랐다.

    배도빈에게 인정받고 싶다,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는 동기는 이제 중요 하지 않았다.

    타마키 히로시와 여러 참가자들을

    보며 프란츠 페터는 보다 순수히, 음악가로서의 향상심을 갖추었다.

    그러한 마음은.

    터질 듯한 소년의 가슴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거장의 선택이 낳은 최고의 스타 죠. 이름도 얼굴도 밝히지 않고 오 직 음악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레이라!”

    우진의 호명과 동시에 조명이 쏟아 졌다.

    눈부신 조명 아래, 품위 있게 발을 옮긴 아리엘 얀스는 지난 반년간의 긴 여정 끝에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

    이제는, 음악이 아름답기 위해 범 하지 못할 것은 없다던 마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형식과 조화, 완성.

    분명 음악을 이루는 데 중요한 요 소였으나 그것만이 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음악은 대화.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유지하는 한편 연주하는 사람, 그것을 듣는 사람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장 직접적인 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던 그는 이 무대를 통해 무너진 명예와 소중한 이들을 되찾고자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도약을 보이며 당 당히 결승에 오른 타마키 히로시 역 시 새 시대의 작곡가임이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타마키 히로시의 사진 과 이름이 걸리며 결승 진출자들이 모두 무대에 함께했다.

    “결승 진출자들은 일주일간 10분 이상의 왈츠를 작곡해야만 했습니다. 특유의 박자와 리듬을 지켜야

    하는 조건 속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즐거움을 들려줄지!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프란츠 페터 군. 준비되셨습니까?”

    “네!”

    프란츠 페터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내 작은 손을 튕기었다.

    어린 음악가의 손은 무용수의 가벼 운 발놀림과 같이 건반 위를 누볐다.

    ‘재밌는 짓을 했어.’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가 제출한 악보를 살피며 입가를 들어올렸다.

    프란츠 페터는 총 12개의 짧은 곡을 제출했다.

    각 곡의 조성은 첫 번째 곡부터 C, C#, D, D#, E, F, F#, G, G#, A, A#, H까지 차례로 이어졌다.

    모든 조성을 활용하여 12개 곡을 이어서 연주하는 방식이었는데, 슈 베르트가 ‘우아한 왈츠’에서 사용한 방식과 같았다.

    앞선 ‘마왕’과 같이 슈베르트에 대 한 사랑을 물씬 풍기면서도 그와는 또 어떻게 다른 왈츠를 들려줄지 기 대되었다.

    ‘파악은 한 것 같네.’

    배도빈은 적당한 빠르기로 연주되 며 셈여림이 정확하게 배분된 리듬 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았던 프란츠 페터는 왈츠가 무엇인지 몰라 무척 헤맸는데.

    심사위원들로부터 돌아가며 호되게 혼나며 왈츠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익혔다.

    왈츠가 3/4박자인 이유는 적당한 빠르기에 리듬감을 살려야 하기 때 문인데 지나치게 빨라서도, 복잡해 서도 안 됐다.

    모두 왈츠가 춤을 추기 위한 곡이

    기 때문이었는데 빠르거나 복잡하면 춤 또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프란츠 페터는 그것에 유념하여 왈 츠다운 곡을 적절히 만들었으나.

    ‘배움이 짧다는 게 이렇게 아쉽나.’

    배도빈과 심사위원단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가장 익숙한 악기인 피아노를 활용 했지만 왈츠를 접할 수 없었던 프란 츠의 한계였다.

    빛나는 재능과 노력으로 일주일이 라는 짧은 시간 왈츠를 만들었으나 지금까지 프란츠 페터가 보여주었던 곡과는 비교가 되었다.

    그러나 배도빈은 실망하지 않았다.

    페터가 이번 대회를 통해 느끼는 바가 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소 유약했던 성정도 다부지게 되었고 그간 소홀했던 정규 과정의 필 요성도 느낄 터.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의 미래가 더욱 빛날 것을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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