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66화
101. 알아(5)
차채은은 서둘러 아리엘 얀스의 악보를 구입해, 레이라의 곡과 대조하였다.
‘ 진짜야.’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지만 아리엘 얀스와 레이라 두 음악가가 항상 공통적으로 보이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두 음악가 모두 두 개의 주제를 활용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조성이 장조인 경우 제1주제가 으뜸조, 제2 주제가 딸림조로 진행됨에 반해.
단조인 경우에는 병행조로 풀어냈다.
이 공통점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으나 지금까지 아리엘 얀스가 발표한 서른여 곡에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특징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무난한 전개 방식 이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이 고전적 방식을 고집하는 아리엘 얀스의 색이 분명한 것이었고.
그것과 똑같은 방법을 쓰는 레이라 와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설마.”
차채은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라가 발표한 곡은 지금까지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보여준 두 곡 이 전부.
레이라가 좀 더 많은 곡을 썼다면 두 사람의 공통된 점이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정보가 많지 않았다.
차채은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그녀는 ‘어떠한 요소도 더하지 못 하고 덜하지 못하는 악보’라 불렸던 아리엘 얀스의 탄탄한 완성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베토벤기념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들과 그를 비교하였다.
그것이 아리엘 얀스의 우수함을 보 이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업을 이어가면 이어갈수 록 아리엘 얀스, 레이라, 니아 발그 레이, 프란츠 페터, 타마키 히로시가 얼마나 대단한 음악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배도빈이 어렸을 적부터 강 조한 정체성. 즉,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명확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아쉽긴 하네.’
아리엘 얀스가 아쉬웠던 것은 고집 스러울 정도로 원칙에 입각했던 것.
그의 음악은 듣기에는 너무나 편안 하고 좋았으나 다가가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었다.
단순히 그뿐이라면 아쉽지도 않았을 터.
악기의 소리를 활용하는 점이나 곡 전체의 균형과 조화는 천재 모차르 트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발군이었으니, 천재 중의 천재였던 니아 발그 레이와도 비견할 만했다.
‘아리엘 얀스도 자기 음악을 찾아 간다면 좋을 텐데.’
차채은은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원 고 말미에 레이라와 아리엘 얀스가 닮은 점도 있다고 언급.
원고를 마무리하여 리드의 미하엘 엔데 편집장에게 송부하였다.
덜컹-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고.
차채은은 놀라 움츠러들었다.
무릎을 모으고 두려움을 잊기 위해 배도빈과 최지훈이 함께 완성한 희 망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애써 위안을 찾으려 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감독은 왜 사퇴하였는가]
최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단원들은 새 지휘자를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악단 운영진과의 마찰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왜 새 지휘자가 부임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던 걸까.
이 이야기는 지금은 작고한 토마스 필스 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살아생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마리 얀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 노 발터와 유일하게 비견되었던 거장 토마스 필스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의 뒤를 이을 한 음악가를 들였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 입단한 아리엘 얀스는 거장의 곁에서 재능을 키워왔다.
토마스 필스 타계 후, 구스타프 하나엘이 취임한 뒤로도 그가 최연소 악장으로 활동하고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감독 대행으로 나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도 그를 미래의 지휘자로 인 정했던 것 같다.
아리엘 얀스는 그러한 기대에 성공적으로 부응하였다.
토마스 필스와 구스타프 하나엘을 잃은 로스앤젤레스는 그간 영화 OST 녹음 등 협력 사업의 대부분을 계약 파기 당했다.
그러한 재정적 위기 속에서 아리엘 얀스는 본인이 작곡한 곡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기존의 팬을 유지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예상 외 로 선전하자 이듬해부터는 여러 업 체가 사업 제휴를 요청.
그들은 전과 같은 수준으로 악단 수익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같이 걸출한 경쟁자를 둔 상황에서 도 북미 클래식 음악계에서 입지를 확고히 했던 아리엘 핀 얀스.
그가 대체 어떤 이유로 감독직을 내려놓았는지, 단원들은 왜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은 올해 초, 아리엘 얀스와 로 버트 패트릭 교수의 언쟁에서 시작 된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패트릭 교수는 <클래식 F M〉에서 아리엘 얀스가 발표했던 ‘봄의 여신’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분위기는 우아하나 완성도에 있어 서는 의문이 든다. 전주가 각 절을 이어주는 간주에서 변형되는데 일반 적인 유절 형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아리엘 얀스가 명백히 실수한 부분 이다.”
이에 대해 아리엘 얀스는 비판받은 해당 부분을 변형된 유절 형식으로 인정하는 한편, 안단테에서 알레그 로로 박자와 조성이 변경되는 이유를 밝혔다.
이에 로버트 패트릭 교수는 ‘작곡가 가 평론을 부정하니 어떤 이가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겠는가’라며 해명을 문제 삼았고 아리엘 얀스는 정해 진 형식에서만 해석하려는 로버트 페트릭 교수를 거듭 지적하고 나섰다.
이후 약속이라도 한 듯 북미 평론 가 협회는 아리엘 얀스의 ‘봄의 여 신’을 맹비난하고 나섰는데 현재까지 관련 기사만 8,000여 개에 달한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떨까.
놀랍게도 8,000여 개의 기사의 내 용은 일관된다.
아리엘 얀스의 곡이 특색이 없고 고루하며 가장 기본적인 형식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정말 아리엘 얀스의 음악적 소양이 부족했던 것일까.
최근 베토벤 기념 콩쿠르로 주목받 고 있는 레이라, 프란츠 페터, 타마 키 히로시와 비교하여 음악가 아리 엘 얀스를 알아보았다.
(후략)
유럽의 저명한 클래식 음악 잡지 ‘리드’에 게시된 차채은의 칼럼은 아리엘 얀스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를 향한 언론의 맹비난이 정당치 않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평단은 즉각 반응했다.
직접 언급된 로버트 패트릭은 만 명의 평론가가 아리엘 얀스의 부족함을 지적하는데, 무지한 학부생이 떼쓰고 있다고 일축하였고.
언론에서는 그녀의 칼럼을 곡해하 여 차채은이 레이라, 프란츠 페터, 타마키 히로시보다 아리엘이 뛰어나 다며 베토벤 기념 콩쿠르의 심사위 원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인플루언서 댄 하디는 차채은이 도를 넘어섰다는 내용을 게시하였다.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레이라, 프 란츠 페터, 타마키 히로시가 누굽니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카모토 료이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배도빈이 최고의 작곡가로 선 정한 인물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아리엘 얀스 같은 사람과 비교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죠. 타마키 히로시가 저세상 에서 얼마나 억울해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네 사람 다 훌륭한 사람으로 쓴 거 아니냐고요? 아니죠. 아니죠. 비교 자체가 무례한 일이에요.
댄 하디는 그에게 원고료와 활동지 원금을 제공하는 이들을 위해 성심 성의껏 차채은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언사는 도리어 일부 팬이 사태를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ㄴ 좀 이상한데.
ㄴ ㅇㅇ 차채은 글 보니까 레이라, 프란츠 페터, 타마키 히로시만큼 아리엘 얀스도 뛰어난 음악가라는 논 조인데 그걸 저렇게 까네.
ㄴ 지금 보니까 차채은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데, 그 신빙성이 댄 하디나 로버트 패트릭 반응에서 나옴ㅋㅋㅋㅋ
ㄴ 그러니까. 반박을 하는 게 아니 라 자꾸 이상한 프레임 씌우려고 드는 거 보니 뭐가 있긴 한 듯.
차채은이 믿었던 대로.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 이었다.
리드 소속의 기자들과 한이슬 그리 고 몇몇 뜻 있는 평론가들이 나서며 일방적으로 흘렀던 분위기가 조금씩 반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등대’의 회원이자 코넬 대학의 교 수, 게르트 카리우스와 함께 학계를 양분하고 있는 로날도 그라우트가 나섰다.
“최근 평단에 벌어진 갈등에 심히 유감을 표합니다. 젊은 평론가의 합 리적인 문제 제시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고령자이자 모든 이로부터 존경 받는 권위자의 발언은 차채은을 향 해 맹목적 비난이 일삼던 이들을 주춤하게 하기 충분했다.
또한 그조차 현재 상황을 비정상적으로 보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팬들 도 일부는 차채은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답답해 죽것네.
ㄴ 답답하면 찾아 보느 나도 궁금해 서 차채은 글 좀 읽었는데 내가 보 기엔 타당해 보였음.
ㄴ 위에 댓글 단 놈 알바네. 차채은 아빠 돈 많더라~
ㄴ 참고한 것들 대조해 보니까 확실 히 이상하게 아리엘이 어느 시점부 터 욕을 오지게 먹더라고.
ㄴ 이거 진짜 지적 좀 당했다고 평 단 전체가 아리엘을 공격한 거임?
ㄴ 그럴 리가 있냐?
ㄴ 7살 동양인 여자가 뭘 안다고 그래? 다들 속고 있는 거임.
ㄴ 와 개신기. 한 문장으로 인종차 별에다 성차별 그것도 모자라 세대 차별까지 하네?
이재은은 벌써 며칠째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딸 차채은이 너무도 걱정되었다.
밝고 활기찬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노크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딸, 엄마랑 쇼핑하러 갈래?”
“어? 아, 아니.”
“파카 사러 가자. 아빠랑 엄마 것 도 사고.”
옷을 사자고 하면 좋아서 재촉하던 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바깥바람을 쐬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물어보았으나 거듭된 악플과 협박으로 차채은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다.
“괜찮아. 경호해 주시는 분도 있고 엄마도 같이 있잖아.”
"으응..."
차채은이 몸을 뺐다.
잔뜩 겁을 먹고 있어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이재은은 딸을 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부조리한 일을 겪으며, 외출하는 것조 차 무서워하는데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로도 신념을 지키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은 부모로서 어쩔 수 없었다.
이재은은 차채은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해줄 생각으로 1층으로 내려 왔다.
그러나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아 안타깝고 분한 마음에 나오는 눈물을 삼키는데 최지훈이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아, 지훈이 왔니.”
서둘러 눈물을 닦은 이재은은 웃으며 최지훈을 반겼다.
“채은이 위에 있어. 밥 안 먹었지?”
“네. 좀 배고픈 거 같아요.”
“그래. 맛있는 거 해줄 테니 올라 가서 놀아.”
이재은은 딸을 위해 매일 같이 찾아오는 최지훈이 너무나 고마웠다.
최지훈과 같이 있을 때면 딸이 그 나마 예전처럼 있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이재은은 한숨을 내쉬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한편.
차채은은 최지훈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으, 냄새.”
“뭐, 뭐?”
“냄새.”
최지훈이 코를 막자 차채은은 정말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비켜!”
그녀는 민망한 나머지 재밌다는 듯 웃는 최지훈을 밀치고 욕실로 향했다.
잔뜩 어질러진 방에 혼자 남은 최지훈은 차채은의 원고와 자료를 보 며 한숨을 내쉬었다.
‘ 대단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빠짐 없이 챙겨 보는 최지훈이었지만 차채은이 소화하는 정보량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평단과 언론의 압도적인 물량공세 속에서 기어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 일부 팬들이 의문을 가지게 할 수 있었던 힘이 이러한 노력 속에서 이 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얼마나 위태로 운지도 알고 있었다.
‘같이 있어줘야 해.’
최지훈은 매일같이 갈등했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로버트 패트릭, 해먼 쇼익, 댄 하디, 도요토미 류토 등을 죽이고 싶은 욕구를 가라 앉혀야 했다.
그럴 방법도 생각할 수 있었다.
아버지 최우철을 보며 배웠던 것을 그들에게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을 벌하는 것보다 차채은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차채은은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과 강박증 그리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배도빈과 최지훈과 대화할 때만 안심하였다.
배도빈이 현재 콩쿠르 심사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최지훈은 자기라도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이내 차채은이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새 잠옷을 입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너 가.”
차채은이 들어오자마자 최지훈을 밀었다.
“싫은데. 나 어머님이 해주신 밥 먹으러 왔단 말이야.”
“왜 우리 집에 와서 먹냐고!”
차채은은 최지훈에게 소리치면서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바쁜 일정 속에 서도 매일같이 찾아와 주고 있다는 것을 그 따뜻한 눈빛과 목소리로 이 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칭얼거리게 되었다.
이렇게 쫓아내려 해도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안 좋다는 것을 알면 서도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놀릴게. 그만 때려.”
“한 번만 더 그래 봐.”
차채은이 씩씩대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이 거장의 선택 마지막 날이네. 같이 볼래?”
“언제까지 있을 건데!”
오후 1시.
거장의 선택이 방영될 7시부터 족 히 4시간은 있다가 가겠다는 말에 차채은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도 내심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