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61화 (46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61화

100.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노래 한다 (5)

맑디맑은 피아노 소리와 함께 전해 진 네 마디의 아르페지오는 한 번 더 반복되었다.

변형된 것은 스포르찬도를 통해 긴 장감이 조성되었다는 점.

한 번 더 반복되었다.

이번에 바뀐 것은 반주가 매우 여 리게 연주되면서 멜로디를 연주하는 손이 더욱 많은 음을 연주했다는 점 이었다.

또다시 반복되었다.

주제를 계속해서 반복하나 단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 가가 평생을 속에 담고 있었던 이야기.

마침내 그것을 속에서 끄집어낸 듯, 연주는 집요하고 능숙하게 주제를 풀어냈다.

아우프탁트(여린 박자)를 덧붙이고 세기를 조절하며 노트를 더 하거나 뺌으로써 하고 싶은 말을 듣는 이가 지루하지 않게 반복해 전달하였다.

가우왕의 손이 조금씩 빨라졌다.

청명하던 악상은 주제가 변형될수록 암울해졌고 끝내 격렬한 연주로 이어졌다.

분노였다.

누구보다도 갈구했으나 끝끝내 손에 쥘 수 없었던 음악가로서의 성공.

타마키 히로시는 가우왕의 손을 통해 자신의 울분을 전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용했던 협회와.

그들에게 이용당했던 자신의 무지 함에 대한 원망.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생이 다 했을 때의 절망이 무게 실린 타건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렇게 연주하고 싶었냐.’

가우왕은 타마키 히로시를 몰랐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우왕에게 어리고 평범한 지망생은 관심 밖의 존재였다.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러나 악보를 보는 순간 그가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악보 곳곳에 남은 땀과 눈물 자국.

상상하지 못할 고통의 일주일에 완성해낸 타마키 히로시 피아노 소나 타 도단조, ‘타마키 히로시’는 미성숙 한 대가의 초기작을 보는 듯한 기분 이었다.

미숙한 부분은 있었으나.

주제가 가진 심미함과 그것을 치밀하게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흡입력.

이런 곡을 쓰는 사람이었다면.

좀 더 지켜볼 것을 후회했다.

가우왕은 그런 후회를 타마키 히로시가 남긴 마지막 곡을 연주함으로써 그와 대화하고.

그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감내했다.

악장이 바뀌었다.

격렬하게 마무리되었던 1악장과 대조되는 2악장은 3/4박자의 소박한 음형을 그리고 있었다.

사고 후.

고향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타마키 히로시는 자연과 배도빈의 곡을 벗 삼아 마음을 치유받았다.

평온을 되찾은 그때의 기억이 상승 배열의 두 번째 주제로 형상화되었다.

아파쇼나토(Appassionato, 정열적으로).

타마키 히로시는 이어지는 전개에 그런 지시문구를 달았다.

2악장 전체에 안단테(느리게)가 붙어 있음에도 타마키 히로시는 이곳 에 정열을 담고 싶어했다.

가우왕은 그것을 온전히 표현해 주었다.

‘피아노를 못 치면 내가 치고 싶은 곡을 만들면 돼. 배도빈, 블레하츠, 가우왕 같은 피아니스트가 칠 정도로 멋진 곡을 만들면 되잖아.’

미약하나 희망과 의지를 되찾은 타 마키 히로시가 펜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타건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기교를 넘어서 곡에 잠재되어 있는 심연의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는 역사상 최고의 비르투오소였기에 가능했던 일.

청년의 순수한 정열이 8분음표의 스케일과 함께 확대되었다.

귀결에 이르러 반복되어 지시되어 있는 포르테가 그 열정에 방점을 찍고 말았다.

청중들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 언제냐.’

마지막 3악장을 앞두고.

가우왕은 타마키 히로시의 지시문 에 따라 잠시간 연주를 멈추었다.

그러면서도 가우왕은 끊임없이 그 에게 물었다.

‘언제 시작하려 했지?’

네가 바라던 연주가 무엇이냐고 무엇을 그렸냐고 반복해 확인하였다.

타마키 히로시는 대답했다.

악보를 통해 그가 바랐던 이야기를 착실히 대답하였다.

2악장의 희망찬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자, 가우왕이 동시에 여덟 개의 건반을 눌렀다.

상체를 숙이며 무게를 더한 폭발적 인 음량에 이미 몰입하고 있었던 청중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도 희망적이었던 2악장과 달리 3악장은 절규였다.

피를 토하고 울부짖으며 고열에 정 신이 아득해지는 남자가 내는 울음 소리는 짐승의 포효와 같았다.

배도빈 이후 이렇게 격렬했던 곡이 또 있었던가.

본색을 드러낸 가우왕이 절기를 뽐냈다.

격정적인 연주가 너무도 우아한 선율을 그려냈다. 단단하고 정확한 타 건 그리고 세심한 끝처리.

가우왕은 음이 보다 풍부히 울리도록 페달과 손가락을 슬쩍 들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

배도빈이 타건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피아노 소리를 달리 낼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을 지금은 완벽히 수 행할 수 있었다.

집착과도 같은 고집으로 완성시킨 완전한 연주.

‘이걸 치고 싶었던 거냐?’

가우왕은 속으로 웃었다.

타마키가 적어 놓은 지시문으로 그 가 누구를 쫓아 이곳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많은 놈이라니까.’

가우왕은 평소의 과장된 퍼포먼스를 최대한 지양하며 분노의 1악장과 정열의 2악장을 지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3악장에 혼신을 다했다.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사이였으나 연주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비로 소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속을 게워내고도 다시 음식을 밀어 넣고,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 치더라도 끝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의지가.

그가 바랐던 연주가 온전히 연주되 고 있었다.

절절하게 부르짖는 음악을 향한 간 절한 소망이 풍파를 맞이해 굴할 듯 굴하지 않고 이내 격정으로 치닫는 순간.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세트장도 채팅창도 고요했다.

이토록 격렬한 연주를 들었음에도 가슴속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순수한 감동에 어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오직 사회자 우진만이 그가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고자 어렵사리 분위기를 깨고 말았다.

“마지막 참가자 타마시 히로시 씨 의 과제곡, 피아노 소나타 도단조 타마키 히로시였습니다.”

화면은 입술을 꽉 깨물고 감정을 달래고 있는 우진을 잡고 있었다.

콩쿠르 운영위원회로부터 전달받은 카드를 쥔 우진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침을 두어 번 삼킨 뒤에야 제 목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마 에스트로 토스카니니께 부탁드립니다.”

토스카니니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입을 열었다.

“누구를 보고 말해야 하지?”

“우선, 부탁드립니다.”

토스카니니는 마땅치 않다는 듯하 면서도 악보를 다시 한번 살피고 심사를 시작했다.

“모든 과제곡을 들었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다. 1라운드와 비교하면 정말 같은 사람이 쓴 곡인가 싶을 정 도로 발전했어. 2악장의 주제가 하 강하는데, 셋잇단음표 아우프락트로 구성한 점은 인상적이군. 3악장은 솔직히 몇 명이나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우왕이 연주자 로 나선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렇다면 점수는?”

“……9점 주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점수를 부 여하자 프란츠 페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발.’

소년은 진심으로 타마키 히로시의 곡에 탄복했다.

지식이 많고 노력하는 형이었지만 지금까지 그 가능성이 드러난 곡은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곡만큼은 소년 프란츠 페터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프란츠 페터는 심사위원과 팬들도 그와 같은 마음이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는 가운데, 마리 얀스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지나 배도빈의 차례가 왔다.

배도빈은 담담한 목소리로 심사했다.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적절한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거나 요점을 둘러 이 야기하면 듣는 사람이 지치기 마련 이죠. 하물며 명확한 뜻을 포함하지 않는 음악은 더욱 그러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의 강의였다.

“음악도 넓은 의미에서는 대화입니다. 작곡가는 자신의 생각과 미학, 기분을 음표로 표현하죠. 그것이 청 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마찬가지 로 적절한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배도빈의 시선은 참가자들을 향하 고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왜 들어주지 않을 까 고민하길 바랍니다. 보다 솔직해 지세요. 그리고 어렵게 말하지 마세요. 그래야, 여러분의 진심이 닿을 수 있습니다. 이 곡처럼요.”

말을 마친 배도빈이 점수를 입력했고 스크린에 9점이 찍혔다.

시청자들 모두 경악했고.

이어지는 사카모토 료이치, 브루노 발터 역시 고득점을 주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st 레이라 57 point

2nd 니아 발그레이 54 point

3rd 타마키 히로시 50 point

4th 프란츠 페터 48 point

4th 찰스 브라움 48 point

6th 파울 리히터 47 point

7th 박준수 42 point

8th 제니 헤트니 40 point

“아아아악!”

타마키 히로시가 총점 50점을 기 록하며 3위로 등극한 순간, 프란츠 페터가 오열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 가가 비로소 꽃을 피웠음에 기뻐하는 마음이었고 동시에 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깊은 슬픔이었다.

ㄴ 느낌이 오긴 했는데 50점을 넘 겨 버리네;;

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진짜 너무 몰입했음. 분명 곡은 빠르고 격정적인데 너무 슬프고. 기분 이상해.

ㄴ 솔직히 타마키 히로시의 태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곡만큼은 깔 수 없다. 미쳤네 그냥.

ㄴ 가우왕이 연주해서 그런 거 아님?

ㄴ 저 심사위원들이 그거 하나 못 잡아냈을 것 같냐?

ㄴ 나 진짜 소름 돋았어. 위에 누가 한 말처럼 이상한 기분인데, 자꾸 마음이 가네.

ㄴ 진짜 생각이 없는 건지 어린 건 지 모르겠네. 태도를 문제 삼는 건 그렇다치고 저걸 듣고도 의심하는 게 신기하다.

ㄴ 페터 왜 저래?

ㄴ 그러게. 너무 슬프게 우는데.

피아노 소나타 ‘타마키 히로시’에 감탄한 시청자들은 심사위원들의 평가에 놀라면서도.

엎드려 우는 프란츠 페터를 의아히 지켜보았다.

그때 사회자 우진이 나섰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로써 2 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만…… 그에 앞서 방금 전달받은 사실을 전달 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진은 눈을 감고 입을 굳게 닫은 채 감정을 추스렸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타마키 히로시 씨가 그제,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그의 투병과 사망 사실을 몰랐던 심사위원과 참가자 그리고 시청자 모두 귀를 의심했다.

“2라운드에 참가하지 못했던 이유 도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모친께서 타마키 히로시 씨 의 마음을 전하시기로, 음악으로 평 가받길 바라는 마음에 시청자분들과 심사위원단에 사실을 고하지 않았음

을 사죄드린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에 타마키 히로시의 태도를 비난하던 이들은 채팅창에서 사라졌고.

혼신을 다해 함께 경쟁했던 참가자 들은 타마키 히로시의 마음을 헤아 리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를 애도 했다.

“아까운 사람이 갔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읊조린 말을 끝으로 장장 4시간 동안 이어진 ‘거장의 선택’이 마무리되었다.

엎드려 흐느끼는 프란체 페터는 몸을 웅크린 채 일어나질 못했고.

자신이 살아 있었음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 붙인 피아노 소나타 ‘타마키 히로시’는 거장의 선택이 끝난 뒤에도.

미시시피 프라임 비디오 서비스에 서 계속해서 반복되어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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