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60화 (460/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60화

100.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노래 한다⑷

타마키 히로시의 장례식에 참가했다가 귀가한 진달래는 아리엘이 깨진 않을까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아리엘도 곧장 그녀를 맞이했다.

“왜 안 자고 있었어.”

진달래가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아리엘은 그것을 받아 걸어주며 답 했다.

“악보 고치다 보니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정말?”

단원들과 함께하여 별일 있겠냐만 은 늦은 시간에 외출한 진달래가 걱 정될 수밖에 없었다.

속내를 들킨 아리엘이 진달래와 함께 웃었다.

진달래가 씻는 사이 아리엘은 우유를 데웠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기분이 좀 이상했어.”

“그럴 수밖에 없죠. 지인을 잃었으니.”

진달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을 정리하였다.

“사실 누군지 잘 몰라. 같은 곳에 있어도 마주칠 일이 없었거든.”

“그랬군요.”

“응. 그래서 별생각 없이 갔는데. 뭐랄까 조금…… 슬프다기보단 안타까뭤어.”

아리엘은 진달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잠깐 들었는데 어렸을 땐 되게 유 망한 피아니스트였대. 그런데 지금 은 아무도 안 찾더라고. 심지어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도 그리 주목 받지 못했잖아.”

진달래는 장례식장에서 나윤희와 왕소소 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보니 그쪽은 협회 쪽에 이용 당했었대. 평론가들도 매수해서 잔 뜩 띄어놓고 다치니까 철저하게 무 시했다고 하더라구.”

“그랬군요.”

“니아 아저씨처럼 연주는 더 이상 못 하지만 곡이라도 쓰려고 여기까 지 노력해 올라왔다는데. 그렇게 죽 으니까 안타까웠어.”

“멋진 사람이었네요.”

“응. 그랬던 것 같아. ……자자. 내 일도 힘내야 하잖아.”

아리엘은 진달래 곁에 누워 그녀와 인사를 나누곤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려 했으나 타마키 히로시 란 남자에 관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 속에 맴돌았다.

특출한 것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 한 남자였고 아리엘도 그를 의식하 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아리엘 얀스는 자신 외에도 이 대 회를 통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통찰로 스스로를 깨닫고 솔직 해진 그는, 조금씩 타인도 그와 다 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연인과 그만이 있던 세 계가 점차 확장되고 있었다.

* *

베토벤 기념 콩쿠르 2라운드 8일 차의 막이 올랐다.

시청자들은 지난 일주일간 거장의 선택을 통해 여덟 명의 참가자가 얼 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 지켜보았다.

니아 발그레이와 파울 리히터, 찰스 브라움조차 거장들의 호된 질타를 피할 수 없었고.

프란츠 페터와 레이라와 같이 뛰어 난 기량을 자랑한 신예들은 더더욱 엄격히 사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작곡가 박준수는 콩쿠르의 압박과 부담으로 좀처 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분한 마음에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나미비아 출신의 제니 헤트니는 4 일 차에 참가 포기 선언을 하였다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심한 질책을 받은 뒤 절치부심하였다.

모든 참가자가 고뇌하고 좌절하며 그러나 끝끝내 펜을 쥐는 모습을 지 켜본 시청자들은.

단순히 예능으로만 여겼던 ‘거장의 선택’을 점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ㄴ 니아 제발 올라갔으면 좋겠다ㅜㅜ

ㄴ 페터는 무조건 올라가야 해. 다 들 눈치챘어? 처음에는 무서워서 심 사위원들 눈도 못 마주치던 애가 이 악물고 곡 쓰는 거?

ㄴ 맞아. 맞아. 진짜 너무 기특해tt

ㄴ 난 제니 헤트니도 올라갔으면 좋겠음. 아프리카 오지에서 있던 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ㅠㅠ

ㄴ 꼭 성공해서 자기 마을에 급수시설 설치하고 싶다는 말 들으니 좀 찡하더라.

ㄴ 레이라는 가면을 벗어라!

ㄴ 정말 의외인 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아, 파울, 찰스는 혼날 거라는 생각 못 했거든.

ㄴ 진짜 알 수 없다.

ㄴ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곡 만드는 게 쉽겠어?

ㄴ 유명하니까 저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지.

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진짜 노트 하나 넣는 것도 엄청 신중하게 하더라.

ㄴ 난 그 와중에 찰스가 너무 웃기던뎈ㅋㅋ

ㄴ 나도나돜ㅋㅋㅋ 푸벵옹이 찬송가 만들 거면 교회로 가라고 소리치니 까 꽁해 있는 거 세상 졸귘ㅋㅋㅋ

ㄴ 미사라고 했음.

ㄴ 진지해서 더 웃곀ㅋㅋㅋ 사카모토가 모티브를 어떻게 따왔냐고 물 으니까 배도빈을 생각하며 썼대잖앜ㅋㅋ 배도빈 생각하면서 쓰는 곡이 미샄ㅋㅋㅋㅋ

ㄴ 진지해서 웃기다니. 난 그 광기 어린 표정 때문에 무섭던데.

시청자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채팅으로 남기기를 얼마간.

나카무라 료코가 연주한 배도빈 비올라 소나타와 함께 거장의 선택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거장의 선택 진행을 맡은 사회자 우진입니다. 오늘은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8명의 참가자 들이 지난 한 주간의 결과를 평가받는 시간입니다.”

우진이 천천히 걸어나왔고.

카메라가 그의 움직임에 맞춰 이동 하였다.

무대 전면으로 이동된 화면은 여덟 참가자의 이름과 사진이 게시된 스크린을 확대해 잡았고 이내 전환되었다.

“과제는 소나타 양식의 20분 이상 의 곡을 완성해 연주하는 것. 심사는 각 심사위원마다 10점씩, 총 60 점 만점으로 평가됩니다. 이중 결승 에 오를 사람은 단 4명!”

우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장애를 딛고 다시 일어선 니아 발 그레이가 차지할까요?”

“아니면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한 파울 리히터가 진출할 수 있을까요.”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찰스 브라움이 작곡가로서도 정점에 이를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1라운드에서 압도적인 점수 차이를 보인 정체불명의 음악가, 레이라가 살아남을지!”

“하지만 마왕의 제자, 프란츠 페터 역시 강력한 결승 진출 후보입니다.”

우진은 각 참가자들을 소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청자들은 역시나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다섯 명에 집중하였고 박준수와 제니 헤트니도 조금이나마 관심을 얻었다.

그러나 타마키 히로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스토리도 없었으며 주목 받을 만큼 인상적인 곡을 발표한 것 도 아니었기에 반응이 거의 없었다.

“그럼! 프란츠 페터를 시작으로 2 라운드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대기실에 있던 프란츠 페터가 나윤희, 왕소소, 다니엘 홀랜드, 스칼라 와 함께 세트장으로 나섰다.

겁 많고 조심스러우며 소심했던 소 년의 걸음은 당당했다.

떨지 않았다.

타마키 히로시가 그토록 서길 바랐던 무대라는 것을 상기하며 방송에 나서는 부담도 심사위원단을 향한 두려움도 온전히 받아들였다.

의지를 다진 소년의 눈은 빛났고.

그것을 확인한 배도빈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 하프의 4 중주라.”

브루노 발터가 묘한 조합을 확인하곤 턱을 매만졌다.

“개성 강한 네 개의 현악기를 모두 다뤄보려 했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으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죠. 쉽지 않은 시도지만, 좋습니다. 들어보도록 하죠.”

작곡 의도를 밝힌 프란츠 페터가 돌아서서 연주자들을 향했다.

유일한 제자가 펼치는 곡을 들으며 배도빈은 역시나 빛나는 재능을 재 확인할 수 있었다.

‘나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어.’

음악의 맛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이 고 쉬운 방법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음량을 키우 고 앞선 음을 여리게 연주하는 것만 으로도 충분했다.

악기도 마찬가지.

이렇게 여러 악기가 사용되는 곡에서는 주 선율을 연주하는 메인 악기 가 있게 마련이고.

나머지는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법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이처럼 여러 악기가 각자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며 하나의 이야 기를 이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리어 곡이 난잡해지기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놀라운 감각으로 곡을 조율해냈다. 악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

지식이 얕았으나 악기와 음표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혹했던 어린 시절과 그래 서 유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성격, 자존감이 없었던 페터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했다.

‘그래. 이걸로 됐어.’

그러나 의지를 다진 소년은 이번 콩쿠르를 통해 무대에 오르는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지휘봉이 망설이는 일은 없었다.

배도빈은 프란츠에게 8점을 주었다.

프란츠 페터가 고혹적인 하모니를 자랑한 뒤로 박준수, 니아 발그레이, 찰스 브라움, 레이라, 파울 리히터, 제니 헤트니가 차례로 나서서 곡을 발표했다.

심사위원단은 4시간이 넘도록 날카로운 시선과 엄격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내심 참가자들의 기량에 감복 했다.

첫째는 배도빈 이후 이렇다 할 젊은 음악가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들 의 예상이 틀렸기 때문이고.

둘째는 참가자들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 편법이나 편이한 태도 없이 정직하게 임했다는 점이었다.

모든 참가자는 심사위원단이 경고 했던 코드를 남용한 그럴 듯한 분위 기의 곡이 아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확하여 듣는 사람이 쉽게 받 아들일 수 있는 곡을 발표하였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미 결승전에 진출할 이가 누가 되었든, 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느끼 고 있을 거라 믿었다.

발표된 7개 곡 모두 사랑받을 거 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구나.’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제는 진정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도 확신했다.

배도빈이 활짝 열어젖힌 격정의 문을 넘어선 이들이 지금 눈앞에서 각 자의 기량을 뽐내고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다른 심사 위원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마지막 참가자만이 남았습니다.”

사회자 우진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뒤로는 앞서 발표한 일곱 명의 참가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획득 한 점수가 순차적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1st 레이라 57 point

2nd 니아 발그레이 54 point

3rd 프란츠 페터 48 point

3rd 찰스 브라움 48 point

5th 파울 리히터 47 point

6th 박준수 42 point

7th 제니 헤트니 40 point

니아 발그레이와 레이라가 진출을 확정하고, 프란츠 페터와 찰스 브라움이 여덟 번째 참가자의 점수에 따 라 향방이 결정되는 상황.

분전했던 파울 리히터와 박준수, 제니 헤트니는 탈락이 확정되어 있었다.

모든 평론가가 베토벤 기념 콩쿠르 에 관한 글을 쓰기 저어하는 상황에서 용감히 취재를 나온 차채은은 1 라운드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에 머 리를 바삐 굴렸다.

‘40점 이하가 없어.’

하위권은 여전히 상위권과 큰 점수 차를 보이고 있었지만, 분명 일주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곡을 내놓았다.

차채은은 누가 진출하고 누가 떨어 진 것에 집중하지 않고.

그 어떤 콩쿠르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받는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일곱 명의 참가자 전원 1라운드 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특히 비록 현재 최하위였으나 제니 헤트니는 6점이나 올라, 프란츠 페터와 같이 가장 점수가 많이 올랐다.

실제로 모든 참가자의 곡이 현장에 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얼마나 노력한 거야.’

차채은은 당장 오늘 쓸 이야기를 정리하며 마침 사회자가 마지막 참가자를 언급하기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럼, 마지막 참가자 타마키 히로 시 씨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우진이 힘차게 타마키를 불렀다.

그러나 그가 나오는 일은 없었고 스태프 중 한 명이 급하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시청자들은 의아해했고 상황을 전달받은 우진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타마키 히로시 씨의 과제곡을 연주해 주실 분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우진의 진행에 시청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ㄴ 뭐야, 제출일에도 안 나오는 거야?

ㄴ 개체 무슨 일이기에 오늘도 참석 안 하는 건데?

ㄴ 상황 좀 알려주면 좋겠는데.

ㄴ 그러니까. 다들 이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솔직히 방송에 안 나오는 것도 그렇고. 좀 그럼.

ㄴ 무슨 사정이 있겠지. 배도빈이 주최한 콩쿠르고 심사위원단이 저런 사람들인데, 공정하지 않을 리 없잖아.

시청자들의 반응은 타마키 히로시 의 곡을 연주할 사람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더욱 격해졌다.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이자 전 세계, 음악계 역사를 뒤져도 이보다 완벽한 피아니스트가 있을까 싶은 남자.

가우왕이었다.

지나친 퍼포먼스로 팬만큼이나 안티도 많은 피아니스트였으나 곡에 대한 신념만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남자.

그가 배도빈의 곡 이외에 현대곡을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가우왕이 나섰다는 사실과.

그가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붉은 정장이 아닌, 멀쩡한 검은 정장을 입고 나왔다는 사실에.

타마키 히로시의 불참에 불만을 표 출했던 이들 모두 무엇인가가 있다 고 직감했다.

가우왕은 평소와 달리 가볍게 인사할 뿐, 그대로 피아노 앞으로 향한 뒤 눈을 감고 건반에 손을 얹었다.

곧 청명하고도 차분한 아르페지오가 천천히 세트장을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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