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59화 (45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59화

    100.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노래 한다⑶

    불길한 예감에 발을 재촉하니, 때 마침 타마키의 담당의가 병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다급히 물었건만 의사는 천천히 고 개를 저을 뿐이었다.

    “ 설마.”

    “오늘 새벽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 지셨습니다.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부정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타 마키 준코의 오열을 들을 수 있었고 미동도 하지 않는 타마키 히로시를 볼 수 있었다.

    타마키의 손을 잡으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타마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따뜻한데, 그가 이미 떠났 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믿 기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좋다며.

    악보 가지러 와 달라고 했던 녀석 이 이렇게 허무히 갈 리 없다.

    그러나.

    매정하게 식어가는 그의 몸이 말해 주고 있었다.

    타마키 히로시가.

    죽었다.

    * *

    오열하다 지쳐 쓰러졌던 타마키 준 코는 온전하지 않은 몸과 마음을 이 끌고 아들의 장례를 준비했다.

    그사이에 찾아온 단원들과 함께 타 마키 준코를 도왔다.

    타마키를 장례식장으로 옮기고 나 서는 모두 사자를 애도하며 침묵을 지켰다.

    한산했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치러 진 탓에 콩쿠르에 참가한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의 단원과 직원 그리고 사카모토와 히무라만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외로우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 히 그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녀석과 친하게 지냈던 스칼라와 페 터는 화장한 채 누워 있는 타마키를 끌어안았다.

    어린 페터는 차오르는 슬픔을 달래 지 못하고 소리 내어 꺽꺽 울었다.

    녀석을 달래려 했으나 타마키 준코 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기에 페터는 타마키와의 이별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었다.

    스칼라 역시 나름의 방법으로 하프를 연주하여 타마키의 영혼을 달랬다.

    1년도 채 안 되는 만남이었으나 각자 다른 출신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그들 에게 서로는 큰 의지처였을 터.

    타마키 준코도 멀리 이곳에도 아들을 위해 슬퍼해 주는 사람이 있다며 페터와 스칼라의 손을 잡았다.

    타마키를 잘 알지 못했던 이들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악보를 놓지 않았던 그에게 경의를.

    그 숭고한 정신이 떠났음에 조의를 표했다.

    그렇게 자정이 다가올 즈음.

    몸을 추스른 타마키 준코가 아들이 남긴 악보를 넘겨주었다.

    “히로시가 전해 달라고 했어요. 너 무 늦은 건 아닐지.”

    “확실히 수령했습니다.”

    고개를 떨어뜨린 준코는 숨을 고르 고 간격을 둔 뒤 입을 열었다.

    “너무 늦게 만들었다고 걱정했어요. 그래도 완성했으니 다행이라고.”

    타마키 준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소중한 이를 잃는 참담함.

    그녀가 느끼고 있을 슬픔의 일부라 도 이해하기에 그저 기다렸다.

    이내 타마키 준코의 잠긴 목소리가 타마키의 말을 전해주었다.

    “연주할 분이 준비할 수 있을지 걱 정했어요.”

    확실히.

    모레, 아니, 내일 아침에 연주하기 에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마음 같아서는 곡의 진행 과정을 봤던 나라도 나서주고 싶지만, 심사 위원으로서 해선 안 될 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길 바랐던 타마키도 내가 연주하길 바라고 부 탁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뒤를 맡긴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부탁드립니다.”

    “네.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타마키 준코가 엎드려 절했다.

    “감사합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진 채로 아들이 바랐던 일을 전하려는 의지만이 그 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위로하고 싶었지만 쉽게 손이 나가 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 고.”

    타마키 준코에게 내일 2라운드가 끝나면 타마키의 시신을 일본으로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하자고 했더 니 거듭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 이리라.

    대화를 마치고 잠시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타마키의 악보를 살폈다.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3일 만에 완성한 곡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평소 녀석을 떠올리면 얼마나 절박 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공들인 티가 났다.

    곳곳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번져 있었으나 다행히 알아보는 데 크게 문제는 없을 터.

    다만 난이도가 상당하여 녀석이 고 용한 피아니스트가 하루 만에 숙달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만 그렇다고 출중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뭐 하냐.”

    가우왕이 다가왔다.

    자리를 내어주니 음료수를 넘겨주 곤 옆에 앉았다.

    “타마키가 쓴 곡이에요.”

    “……그렇구만.”

    “연주할 사람을 찾아야 해요.”

    사정을 설명하니 가우왕이 음료수를 단번에 들이켜고 손을 뻗었다.

    “줘 봐.”

    순순히 넘겼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고집 센 가우왕은 내 곡이 아니면 현대에 만들어진 곡은 연주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이번 페터의 참가곡 마왕.

    수준이 낮거나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인데, 내게 집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가우왕은 애초에 후보 에 두지 않았었다.

    “내가 치지.”

    고개를 돌렸다.

    가우왕이 눈썹을 움직이며 물었다.

    “왜.”

    “의외라서요.”

    그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고요하고 빈 복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노력하는 녀석은 싫지 않으니까.”

    가우왕다운 이유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래.”

    죠엘 웨인에게 악보를 복사해 달라 고 부탁해 제출용 원본을 챙기고 사 본을 가우왕에게 주었다.

    가우왕은 그대로 연주진을 위해 마 련된 연습실로 향했다.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피아니스트

    가 연주를 맡아주었으니, 타마키도 만족할 거라.

    그리 위안 삼았다.

    얼마 없는 조문객들이 내일을 위해 나서고 있었고 나라도 자리를 지켜 줄 생각으로 있는데, 프란츠와 스칼 라가 다가왔다.

    타마키가 자기 걱정하느라 대회에 집중하지 못할 거라며 숨겨 달라 했으니.

    그가 왜 콩쿠르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던 프란츠로서는 큰 충격이었을 터.

    장례식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옆에 앉아서도 한참을 끅끅대던 녀 석이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타마키 형이 그렇게 아 팠을 줄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끄읍. 같이 결 승에 오르자고옵. 끕. 그랬는데. 매 일…… 음악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울먹이는 녀석의 등을 쓸어주었다.

    “불공평해요. 그렇게 착한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 거 예요?”

    “그러게.”

    “타마키 형은 정말 똑똑했어요. 사람들이 몰라줄 뿐이었어요. 분명, 분 명 멋진 음악을 했을 텐데.”

    미래를 가정할 순 없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걸어 나갔던 녀석이라면 분명, 근사한 곡을 만들었을 거다.

    “……그러게.”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스칼라도 한마디 보탰다.

    “무심하기도 하시지.”

    애석함을 담아, 테메스인들이 믿는

    신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정말 같은 생각이다.

    페터의 말도 스칼라의 말도 너무나 공감한다.

    그러나 페터가 타마키를 잃은 일을 단순히 슬픔으로만 기억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타마키가 불쌍하고.

    페터가 짊어진 짐이 무겁다.

    “페 터.”

    는물을 훔치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타마키는 정말 많이 노력했지?”

    페터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번 콩쿠르 때야 알았지만. 녀석은 자기가 부족 한 걸 채우려고 노력했어.”

    “••••••네.”

    “죽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어. 우승하려고 했어. 음악가로서의 성 공이, 자기 곡이 사람들에게 알려지 고 사랑받는 일이 타마키에게는 삶을 받쳐야 할 만큼 가치 있었던 거 야.”

    이번에는 페터의 고개가 무겁게 움 직였다.

    “콩쿠르에서 우승한다는 건 그런 의미야. 수많은 사람이 노력해도 우 승하는 사람은 한 명뿐. 모든 관심 은 그 사람에게 쏠리지.”

    “이, 이상해요.”

    “그래. 부조리하지.”

    타마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주목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재능의 차이를 극복하긴 어렵다.

    그래도 녀석은 최선을 다했다.

    남을 탓하거나, 시기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부정하지 않고 주 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고야 말았다.

    “그래도 타마키는 계속 곡을 썼어.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조차 굴하 지 않는 굳센 의지로 노래했다.

    타마키뿐만 아니라.

    이 대회 참가자, 아니, 정말 많은 음악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 해 분투하고 있다.

    니아 발그레이가 장애를 딛고 다시 음악을 하고자 선택한 무대이자, 파

    울 리히터가 본인의 이름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자, 페터가 작곡가로 데 뷔하기 위한 무대다.

    모두 각자의 이유로 노래한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을 향 한 열정을 표출하고자, 자신의 정당 성을 입증받고자.

    노래할 무대를 스스로 차지하려는 것이다.

    “자기 곡을 단 한 번만이라도 무대 에 올리기 위해서.”

    매일 오르는 무대지만.

    타마키에게는 너무도 간절했던 장 소고 기회였다.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할 페터가 그것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녀석은 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탁월한 재능과 노력 그 리고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녀석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이상 무대에 오르는 것이 간절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쉽게 생각할 수 있고.

    때문에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대에 오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는다는 것 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알아 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노력했던.

    생을 바쳤던 타마키 히로시를 기억 하며 왜 한 번의 무대를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는지.

    왜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 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페 터도.

    나도.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마키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내 세운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신이다.

    눈물을 그치고 곰곰이 생각하던 프 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 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지에 찬 눈을 보면 무언가 느낀 것 같다.

    “들어가. 늦었다.”

    페터와 스칼라를 보내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가려는데 사카모토와 푸르트벵글러가 걸어 나 오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물었다.

    “남아 있는 게냐.”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를 툭툭 위로 하고 복도로 향했고 사카모토는 씁 쓸하게 웃었다.

    “잠깐 괜찮은가.”

    “그럼요.”

    나란히 앉았다.

    “사고를 당했다고는 알고 있었는 데,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1라운드에서 보고 무척 반가웠지.”

    같은 나라 출신의 후배가 굴하지 않고 음악의 길을 계속 걸었다는 것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나카무라와 함께 일본 클래식 음악 의 부흥을 위해 조합을 만들었을 정 도였으니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자네와는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카모토의 말에 작게 웃었다.

    “사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마음을 나누거나 서로에 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 이는 아니다.

    좋게 말해도 친분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

    “다만 모른 척할 수 없었어요.”

    베를린으로 무작정 찾아왔을 때부 터 녀석은 항상 다급했고 간절했다.

    일을 달라고 하기에 빈자리를 주었지만 지금과 같이 여기진 않았다.

    타마키를 가슴에 품은 이유는 아마 도 발버둥 치는 녀석에게서 홍승일 과 사카모토를 겹쳐 봤기 때문일지 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사카모토가 고 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바가 더 많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가혹한 일일세. 그 젊은이를 빛도 보지 못하게 데려갔으니.”

    “이번 곡은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허어.”

    대중들이 타마키의 곡을 좋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나은 반응이 나올 것 같다.

    그러길 바란다.

    살아 있더라면 더 좋은 곡을 만들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사카모토도 느낀 듯 한탄했다.

    “젊은 음악가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 생기는 것 같네. 관심받지 못 하다 눈 감은 타마키 군도 안타깝 고. 지나친 관심으로 괴로워하는 아 리엘 군도.”

    아리엘 얀스에 대해서는 기사로만 접했지만, 소속 악단에서 나와야만 했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고통스러 웠을 것이다.

    녀석의 자존심은 존중과 예절이라 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언 론과 평단 그리고 일부 네티즌에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흔한 일이라 더 문제죠.”

    사카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진정한 본인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괴로움이다.

    그러나 사카모토도 알고 있다.

    자신을 찾지 못해서. 알리지 못해 서. 왜곡되어 알려져서 잊힌 음악가 가 수도 없이 많다는 걸.

    그리고.

    나나 사카모토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

    그러나 그러한 고난이 약속되어 있어도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굴하지 않고 노래한다.

    자신을 갈고닦으며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토해낸다.

    그런 자세가 한 사람의 음악가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타마키는 훌륭한 음악가였어요.”

    비록 성공한 작품이 없었을 뿐.

    타마키 히로시는 분명 훌륭한 음악 가였다.

    “그럼, 무리 말게. 아침에 보지.”

    “네.”

    사카모토마저 배웅하고 돌아서 장 례식장으로 들어가 타마키 히로시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을 때조차 굴하지 않았던 동료 음악가에게 약 속을 확인했다.

    ‘잘 만들었냐.’

    이번 곡이 정말 좋다면 베를린 필하모닉의 루트비히홀에서 그것을 연주하기로 했던 약속을.

    녀석이 지켜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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