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58화 (45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58화

    100.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노래 한다⑵

    과제곡 제출까지 이틀 남았다.

    다행히 어제와 오늘은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언제 다시 상황이 안 좋아질지 모르니 다음 항암 치료를 위해서라도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에서 잠시 해방되었을 뿐이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걸 완성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할 수 있어.’

    배도빈은 그제와 어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길을 여럿 소 개해 주었다.

    이제야 조금 배도빈 같은 천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서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적어도 무 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배도빈은 주제를 어떻게 확장하고 변형시키고 전개시키는지에 대해 철 저하라고 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요소를 넣을까 고민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개념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몇 분, 몇 십 분을 활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른 방법도 많은데 왜 이렇게 집 요하게 파고들까.

    그런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1악장을 완성하고 나 니 배도빈이 왜 그렇게 험난한 작업을 고집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의 주제를 극단적으로 변형시 키다 보면, 그래서 하나의 악장을 완성하려면 그만큼 오래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다르게 연주해야 하기에 박자를 늘리고 화음을 추가하고 세 기를 조절하고 음을 탈락시키는 등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 면서 자연스레 주제를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배도빈의 곡이 깊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 같다.

    녀석을 마왕으로 불리게 하는 폭력 과도 같은 몰입력이 그 때문인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계속하면서도 청 자가 지루하지 않게 변형시키려면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야 한다.

    내가 부족했던 것은 이 사고의 확장.

    내가 모르던 세계를 본 듯한 기분 이라, 그 깨달음의 기쁨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프란츠도 이런 식으로 공부했을 까.’

    완성된 악보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과정을 보면서 처음부터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방법만 알았다고 해서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도리어 어설프게 느껴졌지만 그래 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덕에 포기할 수 없었다.

    즐겁다.

    작곡에 손을 댄 지 몇 년이나 되었을까.

    족히 10년은 넘었는데 이제야 비 로소 나를 담는 방법을 익힌 기분이다.

    한 단계 올라선 기분에.

    그 충족감에 취해 악보를 채워가는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찍 일어났네?”

    어머니께서 병실로 들어오셨다.

    ‘날을 샌 거야?’

    나조차도 너무나 멀쩡한 몸 상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중했던 탓인지 밤새 조금도 아프지 않고 곡을 쓸 수 있었다.

    진전도 꽤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걱정하실 어머 니께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표정이 밝네. 아침 먹자.”

    “ 네.”

    대답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독일로 온 뒤로는 줄곧 떨어져 있었으니 벌써 1년이나 된 이야기일 터.

    “어머니.”

    “응?”

    “식사 같이 해요.”

    “얘는. 엄마는 나중에 먹을게.”

    “그냥.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어머니께서는 별일이라고 생각하시 면서도 싫지 않으신지 밖으로 나가 신 뒤 병원식을 받아 오셨다.

    정말 조촐한 자리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어때. 먹을 만하니?”

    “네. 환자식 주제에 맛있다니까요.”

    “그래?”

    어머니께서도 한술 뜨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조금 여위신 것 같은데 아마 나 때문이겠지.

    어렸을 적부터 여태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아 참 못난 놈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속 썩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먼저 떠나려 한다.

    이런 불효자도 없을 것이다.

    “어머. 많이 썼구나?”

    어머니께서 악보를 발견하시곤 놀라셨다.

    “네. 어제랑 오늘 집중이 잘 됐거든요. 아프지도 않고.”

    “ 오늘?”

    실수했다.

    어머니께서는 내 안색을 살피시더 니 혼내실 때의 표정을 지으셨다.

    “히로시, 곡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 만 선생님께서 체력도 중요하다고 하셨잖니.”

    “그러게요. 아침 먹고 조금 잘게요.”

    어머니는 더는 아무 말 않으셨다.

    평소에는 몇 번이고 더 혼내시는데 날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서 조금 슬퍼지고 말았다.

    만약 어머니의 바람대로 치료에만 집중했다면 조금 더 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속상하게만 했으니 지금 이라도 어머니 생각대로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적어도 그래야 덜 죄송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수도 없이 했지만 결국에는 곡을 쓰고 싶다는,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끝까지.

    이기적인 아들이다.

    “아, 이거 맛있다. 어머니, 이거 더 드세요.”

    “아니야. 엄마 이것도 많아. 먹는 건 괜찮아?”

    “네. 열심히 해서 그런지 밥맛도

    좋은 거 같아요.”

    “말이나 못 하면. 넌 어쩜 그렇게 네 아빠랑 똑같니? 어서 먹어.”

    “ 네.”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나니 확실히 졸음이 몰려들었다.

    ‘시간이 없는데.’

    그래도 계속 깨어 있을 수는 없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할 것 같다.

    눈을 감으니 그간 무시했던 피로가 무섭게 달려들어 이내 잠들었다.

    어슴푸레 어머니의 손길을 느꼈다.

    일어나 보니 늦은 오후였다.

    꽤 오래 잠든 것 같아, 눈을 뜨자 마자 악보와 펜을 집었다.

    하루에 한 악장씩 완성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말이 안 되는 속도로 만들고 있다.

    ‘그래도 모레까진 어떻게 될 것 같아.’

    3악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적 어 넣으며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살릴지 고민했다.

    절정구는 피아노를 칠 무렵 문득 찾아온 악상을 그대로 담았다.

    하이라이트만 있어 그 자체로는 멋 지지만 온전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그것을 완성시킬 때가 온 것이다.

    정말 오래 간직했던 멜로디라 생각 외로 쉽게 종결구까지 쓸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심상을 어떻게 끌어와 절정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가.

    역시, 배도빈이 조언해 주었던 것 처럼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열어두었지만.

    “하아.”

    역시 쉽지 않다.

    소나타 형식에 맞춰 써야 하기에 3악장은 1악장과 2악장에서 사용했던 두 개의 주제를 다시금 활용해야 하는데.

    이미 앞서 모든 걸 쏟아부은 터라 적당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금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데.

    더더욱 안 좋은 상황까지 떠올리고 말았다.

    ‘연주는 어떻게 하지?’

    곡을 완성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연주자에게도 시간을 줘야 했다.

    ‘왜 그걸 지금 생각한 거야.’

    하루라도 주려면 오늘 안에 완성해 야 하는데.

    다시 조급해졌다.

    “하아.”

    왜 하필 지금 아파서 이렇게 방해 받는지.

    병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지금 급한 일은 화내는 게 아니라 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쑥 올라오는 억울함에 주먹을 쥐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들어오셨다.

    “히로시, 죠엘 웨인이라는 분 아니?”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께서 또 슬퍼하실 테니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네. 도빈이 비서이실 거예요.”

    “응.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편지 주고 가셨는데?”

    “ 편지요?”

    외부에서 들어온 걸 들일 수는 없어 어머니께 읽어 달라 부탁드렸지 만 독일어를 읽지 못하셔서 웃고 말

    투명한 커튼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 께서 조잡한 편지를 보여주셨고, 그 것을 본 순간 산타가 보낸 편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어머니, 산타예요.”

    “네가 가르친다는 아이 말이니?”

    “네. 세상에. 아, 그렇지. 죠엘 웨 인이 얘 누나였을 거예요.”

    “고마워라. 일부러 전해주시려고 오셨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를 살폈다.

    글씨는 삐뚤삐뚤하고 크기도 저마다 달라서 제대로 읽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고.

    나름대로 꾸민 편지지는 덕지덕지 붙인 색종이로 난잡했다.

    하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타마刀 선생님!

    빨리 눟나아서 또 음악 하자!

    보고 삽싶어요.

    “빨리 나으래요. 보고 싶대요.”

    “그래?”

    어머니께서 편지지를 살펴보시고는 웃으셨다.

    “어쩜 이렇게 귀엽니.”

    “그러니까요. 산타한테 편지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글 씨 공부도 열심히 하나 봐요.”

    어머니께서 산타에 대해 궁금해하 셔서 신나게 떠들었다.

    “걘 천재예요. 몇 분이고 똑같은 박자를 유지할 수 있고 심지어는 듣는 것만으로도 언제 무슨 악기가 나 오는지 다 기억해요.”

    “어쩜. 아프다고 하지 않았니?”

    “저도 몰랐는데, 사실 자폐가 겉으로 이상하게 보일 뿐이지 속으로는 제대로 생각하고 있대요. 그 녀석은 정말 천재예요. 게다가 음악도 정말 좋아하고요. 집에 안 가려고 해서 매일 혼날 정도고요.”

    음악을 향한 맹목적 사랑.

    산타는 내가 봤던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한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면 정 확한 타이밍에 북이나 심벌즈를 따 라 치기도 했다.

    녀석의 자랑을 이어가다가.

    흐뭇하고 조금은 슬프게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느새 눈가가 촉촉해져 있다.

    “어머니?”

    “아, 아니야. 기특해서 그래. 우리 아들이 그런 아이에게 좋은 선생님 이었다고 생각하니 기특해서 그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저녁도 함께 먹었다. 어머니께서는 배도빈이 마련해 준 근처 숙소로 돌 아가셨고.

    산타 녀석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금 힘을 냈다.

    조금 열이 오르는 것 같지만 아직 은 괜찮다.

    ‘ 연주는……

    일단 곡을 완성한 뒤에 생각하도록 하자.

    이제 겨우 끝이 보이니까.

    여러 생각을 할 여유 따위 없으니까.

    ‘산타가 이 곡을 좋아해 줄까.’

    귀는 좋아서 내 곡에는 그리 관심 없던 녀석에게 선생님도 이렇게 멋 진 곡을 쓸 수 있다고.

    들려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몸이 가벼워 진 기분이 들었다.

    ***

    2라운드 과제 제출일을 하루 남겨 두고, 타마키로부터 악보를 받아가 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죠엘 웨인과 함께 들렀는데 그녀가 타마키에 대해 물었다.

    “차도는 없나요?”

    “치료 방법이 제한적이고 확률도 희박하다고 해요. 그래도 요 며칠은 상태가 좋았으니 희망을 가져야죠.”

    “……네.”

    “타마키랑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네요.”

    “아, 산타 선생님이시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산타가 정말 좋아해요.”

    생각해 보니 그런 식으로 이어져 있구나 싶었다.

    타마키가 정식 작곡가가 되면 산타 가 많이 서운해할 것을 생각하니 겸 업을 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좋은 선생이라는 뜻이니까.

    그런 생각을 입에 담으니 죠엘이 살짝 웃었다.

    “정말 믿고 계신 거네요.”

    “ 뭘요?”

    “타마키 선생님이 나으실 거라고.”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병실 가까이 이르렀는데.

    “히로시! 히로시이!”

    타마키 준코의 절규가 둔기처럼 머리를 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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