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57화
100.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노래 한다⑴
가장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뭐야. 오지 말랬잖아.”
“몸은 좀 어때.”
“완전 멀쩡하거든. 가. 참가자랑 단 둘이 만나면 안 되잖아. 프란츠랑도 안 만난다면서 왜 온 거야.”
“할 일이 있어서 온 거야.”
할 일이라니.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싶을 때 배도빈이 무작정 안으로 들어왔다.
“ 아.”
그러더니 마음대로 악보를 가져가 버렸다.
눈물 때문에 번진 곳이 많아 알아 보기 힘들 텐데 유심히도 살폈다.
계속 울었던 걸 알아볼 것 같아서
뺏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놔.”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기다리니 곧 입을 열었다.
“ 엉망이잖아.”
“그래서 뭐!”
기껏 와서 한다는 말이 엉망이라는 폭언이다.
말도 못 할 졸작이라는 건 누구보 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평소보다도 더 못한 곡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해선 결승 못 올라가.”
“뭘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네.”
“형식만 지킨다고 소나타가 아니 야. 이건 대체 뭐야?”
이어지는 녀석의 말이 다 사실이 라, 소리쳤다.
“어쩌라고! 매일 밥 먹는 것만으로 쓰러질 것 같은데! 치료받고 나오면 몇 시간이고 기절해 있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건강했다면 더 멋지고 그럴 듯한 곡을 쓸 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분명.
분명 그럴 수 있다.
비록 프란츠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해온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재능 같은 거 없어도.
충분히 멋진 곡을 쓸 수 있다.
분명 그런데.
시간이 없을 뿐이다.
“나는 뭐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이딴 거 만들려고 했는 줄 알아!”
녀석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떡해! 지금 난,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속내를 왜 이 녀석에게 쏟아내고 있을까.
이런 변명 따위 하고 싶지 않았는 데. 끝까지 당당하게 곡을 쓰고 싶었는데.
“그래도 쓸 거잖아.”
“••••••뭐?”
“그래도 쓸 거잖아.”
배도빈이 악보를 들어 보였다.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시간이 없다고. 진짜 없다고.”
“안 쓸 거야?”
“제정신으로 있는 것도 힘들어!”
“그래서?”
“못 쓰겠다고! 난 너나 프란츠처럼 금방 못 만들어! 아무 생각도 안 나! 누워 있으면 아파서 제발 그만 좀 아프길 바랄 뿐이야. 네가, 네가 그 기분을 알아?”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숨이 차올라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분해서.
녀석을 노려보고 있자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쓸 거잖아.”
그래.
맞는 말이다.
그래도 쓸 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토하고 고열에 밤잠을 설치고 고통에 몸부림치더라 도 써야만 한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도 그래 야만 한다.
어렸을 적부터 키워왔던 그것을.
바라만 보았던 그것을 이 세상에 온전히 알리기 위해.
내가 살아 있었음을 남기기 위해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억 울해서 편히 눈감지 못할 것 같다.
“쓸 거야.”
너무나 정직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 녀석이 내 앞에 무엇인가를 내려놓았다. 악보인가 싶어서 냉큼 챙겼더니 너무 얇다.
“이건.”
첫 머리에 베를린 필하모닉 전속 작곡가 계약서라 적혀 있었다.
고개를 드니 배도빈이 평소와 같은 태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연주를 해야 한다. 최고가 아니라면 단원이 될 자 격이 없다.”
배도빈은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내세운 악단의 정신을 읊었다.
“결승에 올라. 그럼 네가 그렇게 바라던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의 작곡가가 되는 거야.”
“무슨 짓을 해서도 해내.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네가 곡을 쓰기 위해서라면 내가 아닌 베를린 필하모닉이 지원할 거야.”
“그러니 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도빈도 내가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간격을 두었다. 계약서를 보 다가 고개를 들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프란츠와 같은 조건이야. 지금껏 노력해 왔다면 찾아온 기회를 놓치 지 마.”
내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작곡가가 된다니.
내가 만든 곡을 그들이 연주하고 배도빈이 지휘한다니.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토록 바라던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내게 미래는 사치일 뿐이다.
배도빈이 계약서 위에 악보를 올리 고 손가락으로 세 번째 마디의 마지 막 노트를 가리켰다.
“여기는 반음 내리는 게 좋겠어.”
아무렇지도 않게 미래를 보여주는,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내 곡이야!”
“그래. 네 곡이야.”
녀석은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나를 꿰뚫어 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처럼 미래를 보여주고 현실에 집중 할 수 있게 해준다.
무너지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절망에 굴하지 않도록 가장 중요한 말을 해준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래도 안 되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냐고.”
“네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배도빈은 태연하게 답했다.
“토하고 울고 포기하고 싶어도. 이렇게 어리광 부리고 약하고 미숙해 도 쓸 거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이 내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 나를 신뢰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말하지는 않아도 내가 포기하 길 바랐다. 어쩌면 그러다 지쳐 포 기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조차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막상 치료에 들어가니 콩쿠르와 병 행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힘들고 능력도 없으니까.
그러나 나조차 믿지 못하는 나를 녀석은 믿어주고 있다. 반드시 쓰라 고 결승에 오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약하고 모자란 내게.
희망을 말해주었다.
“……완성시킬 자신이 없어.”
“시간이 없어서?”
“그래. 발그레이 고문도, 리히터 씨도, 브라움 악장도, 레이라 씨도, 프 란츠도 전부 너무 잘하잖아. 내가,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이겨.”
솔직한 마음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들을 넘어설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너보다 뛰어나지.”
“……그래.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펜을 놓아야 할 이유는 될 수 없어.”
“괜한 응원이라면.”
“시끄러워!”
배도빈이 처음으로 소리쳤다.
또다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피 하지 않았다.
녀석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악보를 들었다.
“이 엉망인 악보에서도 모티브만큼 은 봐줄 만해.”
오래전부터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 기다. 단지 어떻게 전개시켜야 할지 막막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만든 거잖아. 네 곡이잖아.”
“그래. 내 곡이야.”
“발그레이도, 브라움도, 프란츠도 생각 못 한 모티브잖아. 어느 누가 이 주제를 떠올렸다는 말이야.”
“그건 누구나.”
“아니!”
배도빈이 다가왔다. 침대에 손을 얹고 얼굴을 들이대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너보다 이 모티 프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네가 만들었잖아. 네 곡이잖아.”
그래.
내 곡이다.
내가 만들어야만 하는, 언젠가 기필코 완성하고 싶었던 내 곡이다.
내 이야기를.
나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다른 이야기라면 모를까.
내가 만든 네 마디의 주제를 나보다 더 깊이 있게 쓸 수 있는 사람 이 있을 리 없다.
내가 하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없어질 거다.
그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나는 곡을 쓸 수밖에 없다.
배도빈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배도빈이 다시 악보를 가리켰다.
“이 부분은 화음을 넣는 게 어때. 볼륨이 커져서 더 효과적이겠지.”
“……내 곡이라며. 뭐하는 거야. 이 런 거 바라지 않아. 내가 완성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거라고. 가르쳐 주지 마. 이런 특혜 바라지 않아.”
배도빈은 답하지 않고 TV> 틀었다.
어제 거장의 선택 방송분이 재방송 되고 있었는데 니아 발그레이와 파 울 리히터가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 니니로부터 첨삭을 받고 있었다.
-정신 차려! 지금 왈츠를 만들고 싶은 거야, 아니면 소나타를 만드는 거야!
-이 빌어먹을 반주는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넣었는지 모르겠군. 멜 로디가 다 뭉개지잖아!
이미 음악가로서는 정상에 이른 그 들이 두 전설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배도빈이 TV를 끄고 악보를 가리 켰다.
“넌 네 곡을 더 완성시킬 것만 생 각해. 대회는 공정하니까.”
그제야 배도빈이 들어오면서 말했던 ‘할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심사 위원들은 일주일간 대회 참가
자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게 세계 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들이 가르 침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치료를 받느라 콩쿠르가 어떻게 돌 아가는지 확인하지 못했고.
무균실에 갇힌 내가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배도빈은 그런 나를 위해 시간을 따로 낸 것이다.
나를.
베토벤 기념 콩쿠르 참가자로.
2라운드 진출자로 여겨준 거다.
공정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미 입원하면서부터 실격 처리돼 도 콩쿠르 운영위를 탓할 수 없을 텐데.
병실까지 찾아와 다른 참가자와 동 일한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거다.
이렇게 상냥한 콩쿠르가 또 있을까.
아니.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이 부분은 무슨 의도였어?”
눈물을 훔치고 입을 열었다.
“숲에 있으면 사락사락하는 소리 나잖아.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사실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어.”
“생각의 여지를 두는 것과 불명확 한 것은 달라. 의미를 분명히 하려 면 반복도 방법이야.”
“응.”
세계, 아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에게 받는 개인 레슨이라니.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다.
배도빈은 답은 알려주지 않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해볼 부분과 어떤 방향으로 고민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말 그대로 내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이렇게 충실할 수 있음에 진정으로 그에게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