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56화 (456/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56화

99. 굴하지 않으리라(5)

다음 날.

병원을 찾은 배도빈은 담당의에게 타마키 히로시의 상태부터 물었다.

“환자의 의지가 굳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체력을 보존키 위해 식사 도 잘하고 계시고요.”

그러나 역시.

차도가 있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많이 안 좋은가요.”

의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방법으로는 10에서 15퍼센트 정도의 환자만이 완치되었습니다.”

“이식은.”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배도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유일한 희망인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조차 완치 확률이 높지 못하며 더 군다나 재발 확률도 높았다.

재발하게 되면 대부분이 사망.

그럼에도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일을 다 해보고자 했다.

타마키 히로시의 모친 타마키 준코를 설득해 모든 비용을 베를린 필하모닉이 부담하였고.

배도빈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 량을 다하여 방법을 찾았으나 현재 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면담을 끝내고 나온 배도빈은 타마 키 히로시의 모친 타마키 준코를 찾았다.

병실 앞에 앉아 있던 타마키 준코는 배도빈이 다가가자 자리를 내어 주었다.

“타마키는……

“항암 치료 받으러 갔어요.”

배도빈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응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묵묵 히 자리를 지키던 중 타마키 준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히로시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 한다고 했을 때는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독일에 갔다고 해서 농담하는 줄 알았거든요.”

배도빈도 갑작스럽게 여겼던 일인 데, 이제 보니 어머니께도 말하지 않고 왔던 모양.

배도빈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줄곧 당신과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거든요.”

“부모로서 잘 타일렀어야 했는데, 너무 관심이 없었나 봐요.”

그녀는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 고 있었다.

“아이 아빠가 일찍 죽었거든요. 히 로시가 음악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그 래서 히로시를 도와주겠다고 한 그 들이 나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을 해주었거든요.”

타마키 준코는 십 년도 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배도빈은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 할 수 없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사람들이 피아노를 사주었을 때 히로시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아래 층에 사는 사람이 올라 올 정도로 뛰어다녔죠.”

준코는 행복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저도 기뻤어요. 시끄러워서 올라 오신 분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히로시가 정말 좋은 분을 만났구나. 그런 분들이 높이 살 만큼 재능 있는 아이구나. 열심히 했구나 생각했어요.”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몇몇 대회 에서 우승을 했어요. 일본에서는 히로시를 천재라고 띄워주었고 종종 당신과 비교했죠. 그때는 그저 우리 아들이 그렇게 대단한가 싶었죠. 대 견할 뿐이었어요. 저, 음악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지금부터는 배도빈은 얼핏 아는 이야기였다.

일본 내에서 배도빈 광풍이 불자, 일본 클래식 음악 협회에서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물색 했고 그것이 타마키 히로시였다.

배도빈은 타마키와 재회하면서 제1 회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 때의 그를 기억할 수 있었다.

건방지고 거만한 아이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비록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히로시는 돌아와서 정말 열심히 노 력했어요. 그때부터 조금 달라졌던 것 같기도 해요. 당신에 대해 안 좋게만 말했던 그 아이가 당신의 앨범을 듣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 번의 실패가 용납되지 않았나 봐요. 히로시에 대한 지원은 조금씩 줄어들었어요. 하지만 굴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아들을 어느 부모가 내버려 둘 수 있을까요. 더 열심히 일했어요. 타인이 도와주지 않았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우리 아들이 하고 싶은 걸 해줄 수 있게.”

배도빈은 이 작은 체구의 여성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분명 말로는 차마 다할 수 없는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다행히 벌이가 괜찮아졌어요. 레슨비는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히로 시의 피아노가 점점 듣기 좋아졌거 든요. 꼭 당신처럼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할 거라고 매일 밤 다짐하듯 제 게 약속했죠.”

준코가 고개를 더 숙였다.

“그런데 사고가 났어요. 손이라면 끔찍하게 여기는 아이인데, 저 때문에.”

“제가 그 아이의 미래를 빼앗은 거예요.”

배도빈은 그때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흐느끼는 타마키 준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도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그녀가 눈물을 닦을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얼마 뒤.

겨우 진정한 타마키 준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나이를 먹다 보니 주책만 늘어서.”

“아뇨. 타마키에 대해 잘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더 듣고 싶어요.”

타마키 준코는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배도빈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고마워요.”

“해야 할일을 할 뿐이에요.”

“……그들이 그렇게 못된 사람들인 줄은 몰랐어요. 히로시를 이용해서 당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퍼뜨 리고. 히로시가 쓸모없어지니 버린 그들을. 그들을…… 저는 용서할 수 없어요.”

중년 여성의 가슴에 사무친 원통함이 떨리는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배도빈은 힘없는 사람의 한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히로시가 어느 날 말하더라고요. 피아노를 못 치면 자기가 치고 싶은 곡을 쓰면 된다고. 도와 달라고 했어요.”

“저는 그 사고에서 히로시를 지켜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히로시를 버린 협회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수 할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히로시는 아니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어떻게든 계속 음악을 하 려고 했어요.”

“도와달라는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어요. 나도 아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구나. 도와줄 수 있구나. 그래, 무엇이든 해주자. 그렇게 생각 했어요.”

“남들에게는 협회의 도움이나 받아 제 분수를 몰랐던 아이였지만 제게 는. 제게는 그렇게 대견한 아들이었답니다.”

준코는 다시금 눈물을 쏟았다.

배도빈도 타마키 모자의 이야기에 눈을 감고 애써 눈물을 삼켰다.

모든 것을 잃고도 음악을 하려고 발버둥 친 히로시와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아들을 위해 많은 것을 해냈 던 준코.

배도빈은 오래전 그가 본에 살았을 때를 떠올리며 이내 눈물을 홀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타마키는 재능 있는 음악가입니다.”

배도빈의 말에 준코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곡을 다듬는 법도 능숙하게 악상을 잇는 법도 부족하지만 분명 재능 있는 음악가입니다.”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천재라며 수 없이 많은 욕설을 들어야만 했던.

그래서 상처투성이로 남은 가슴이 처음으로 치유받는 듯했다.

다름 아닌 최고의 음악가라 불리는 남자가 거짓이 아니라고 분명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일은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에 맡기시고 어머님은 타마키 곁을 지켜주세요.”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돕는 게 아니에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직원 복지입니다.”

계약직 직원에게 수억 원의 치료비를 내주는 항목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타마키 준코가 아들의 병환 외의 다른 일로 더 힘들어지는 것을, 그 때문에 타마키 히로시가 자 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더욱 걱정 할 뿐이었다.

때마침.

치료를 마치고 정신을 잃은 타마키 히로시가 의료진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다.

아들을 발견한 준코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배도빈은 오늘은 면회가 어렵다고 생각하며 준코를 위로한 뒤 귀가하였다.

* * *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 지 힘들 줄은 몰랐다.

온몸이 욱신대는데 힘은 없고 의식 도 온전치 못하다.

아무리 기를 쓰고 악상을 떠올리려 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몇 시간이 흘러가 있다.

시간이 없는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집중하자.

언젠가는 꼭 만들 거라고 생각했던 곡을 완성시킬 때다.

가능하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 뒤에 쓰고 싶었지만.

피아노를 쳤던 시절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단 한 마디를 썼을 뿐인데 또다시 통증이 밀려든다.

이것이 병 때문인지 항암 치료 때 문인지 이제는 알 도리가 없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단 며칠 만이라 도 온전한 상태에서 곡을 쓰고 싶다.

이런 상태에서 조금 더 연명한다 해도 곡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야.’

또 다른 생각에 빠져 버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때때 로 치미는 통증에 흔들리고 만다.

내가 치고 싶었던 음악을 떠올리면 조금 나아진다.

막연하게 잡힐 듯이 잡히지 않았던 그것은 뿌연 안개 뒤에 숨어 윤곽조 차 명확하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는데.

지금 내 실력으로는 그 이상의 곡을 악보로 옮길 자신이 없는데 그래 야만 한다.

정신이라도 온전했으면.

“제기랄.”

겨우 이 정도뿐이었나.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만족스러운 악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허술하 고 미숙한 악보를 내 마지막 곡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생을 앗아가도 좋다.

제발.

단 한순간만이라도 내게 음악의 신 이 깃들어 주었으면.

그리하여 이 곡을 온전히 만들 수 만 있다면 기꺼이 내어드리겠다.

“아니야.”

그리려는 모습이 너무도 막연해서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을 수 없다.

그것을 봐야만 하는데.

너무 높고 멀리 있어 그 이상의 아래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니야!”

아무리 고치고 또 고쳐도.

“콜록! 콜록! 아악. 아아아아악!”

나는 그들과 같은 무대에 설 수 없다.

이것이 재능이 차이인가.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그리고 배도빈.

그들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면서.

그것을 들을 귀와 느낄 가슴은 주었으면서 그들과 같은 곡을 만들 힘 은 주지 않은 신이 원망스럽다.

재능을 주지 않았더라면 시간이라 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노력할 기회마저.

그들을 따라가는 것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악보를 내려다 보니 또다시 악보가 젖기 시작했다.

살고 싶다.

계속 음악을 하고 싶다.

배우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이 남았는데 이제 겨우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는데.

평생 고생만 한 어머니를 홀로 남 겨두고 갈 순 없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누군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드니 눈물 너머로 가운을 입고 마스 크를 한 배도빈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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