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55화 (455/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55화

99. 굴하지 않으리라(4)

베토벤 기념 콩쿠르 2라운드 3일 차.

시청자들은 ‘거장의 선택’을 통해 모든 참가자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 지, 심사 위원들로부터 어떤 조언을 받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1라운드 이후 가장 주목받게 된 레이라와 배도빈의 제자 프란츠 페터를 비롯한 일곱 명의 참가자가 저 마다의 방식으로 곡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 처음부터 곡을 쓰는 게 아니라 수많은 파편을 조금씩 모으고 고치고 위치를 바꾸는 행위를 거듭하였는데.

사람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스스로 만든 퍼즐 조각을 맞추는 모습과 유사했다.

그 과정을 본 적 없었던 시청자들은 작곡 과정을 신선하게 바라보았다.

ㄴ 처음부터 쓰는 게 아니네?

ㄴ 그러게. 이것저것 되게 많이 만 들어놓고 배치하는구나.

ㄴ 주제를 표현하는 음이나 멜로디, 전개부를 생각해 두고 계속 바꾸는 거였구나. 위치도 음계도.

ㄴ 보통은 저런 작업 뒤에야 완성도 가 생기지.

ㄴ 맞아. 베토벤도 악보 수정 엄청 해댔잖아.

ㄴ 슈베르트는 깨끗한데?

ㄴ 종이 살 돈이 없어서 머릿속에서 생각 다 마친 뒤에야 옮겨 적었다고 함.

ㄴ 그럼 슈베르트가 더 천재임?

ㄴ 그럼은 무슨 그럼이야. 생각하는 수준하곤.

ㄴ 능지처참.

ㄴ 그런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쓰는 사람도 있음. 결국 자기 마음이지.

ㄴ ㅇㅇ. 어떤 과정을 거치든 완성된 게 중요하지.

ㄴ 미술이나 글도 마찬가지임. 여러 장면 생각해 두고 나중에 짜깁기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도 단어별로 옮기기도 함.

ㄴ 맞아. 그림도 걍 여기 그리다 저기 그리다 하는 사람도 있더라. 학원 에서는 기준부터 잡으라고 하는데.

그렇게 오늘 방영분이 끝나갈 즈음 화면이 전환되었다.

익숙한 세트장이 아닌 어두운 배경 에 정장 차림을 한 동양 남성이 웃으며 인사했다.

타마키 히로시였다.

시청자들의 머리에 의문이 가득 차 올랐다.

화면 하단에 자막이 떠오르며 타마키 히로시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거장의 선택 시청자 여러분. 참가자 타마키 히로시입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세트장에 있을 수 없어, 이렇게 따로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타마키 히로시의 발언에 시청자들 의 저마다의 반응을 내었다.

ㄴ 어느 순간 안 보이길래 탈락인 줄 알았는데.

ㄴ 찰스 왕자님 치질하고 찌질한 모 습만 보여주다가도 바이올린 연주하 거나 악보 쓰는 모습만 보면 왜 이렇게 멋있어 ㅠㅠ 빛이야. 그저 빛.

ㄴ 타마키? 잘 기억이 안 나네.

ㄴ 프란츠 귀여워…….

ㄴ 갑자기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어 디 몸이라도 아픈 거 아냐?

ㄴ 정체를 밝혀라, 레이라!

ㄴ 지금 세트장에 없는 거야?

- 같은 환경에서 참가할 수 없어 참가자 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유를 밝힐 수는 없지만 꼭 정 정당당히 여러분과 경쟁할 거라고 약속드립니다.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많이 웅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 합니다.

ㄴ 오늘도 푸르트벵글러랑 토스카니니는 잔인했습니다.

ㄴ 정말ㅋㅋㅋㅋ 도빈이까지 뭐라 하니까 다들 정신 못 차리는 거 너무 안쓰러운 것 ㅠㅠ

ㄴ 무슨 일인지 밝히지도 못하면서 따로 작업하겠다?

ㄴ 레이라 가면 벗어라아!

ㄴ 공정하지가 않잖아.

ㄴ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ㄴ 어차피 우승은 레이라 VS 프란츠

ㄴ 어차피 곡 쓰는 일인데 어디서 작업하든 무슨 상관? 애초에 관심도 없었음.

ㄴ 저 대회에 특혜가 생길 리가 없지. 도빈이가 어련히 잘하겠어.

ㄴ 우리 치찔이 예쁜 얼굴 좀 많이 보여주세요 ㅠㅠ

스칼라와 타마키 히로시는 미리 녹 화해 두었던 영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채팅창은 타마키 히로시에 대한 반 응보다 다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애초에 크게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베토벤 기념 콩쿠르에는 스타성을 갖춘 인물이 너무도 많았다.

일본의 미성숙한 음악가가 주목받 기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무대.

타마키 히로시가 이르고 싶었던 그 곳은 아직도 저 높고 먼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정말 이걸로 만족하냐.”

“응.”

스칼라의 질문에 타마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한부라는 걸 알려서 관심을 받다니.

끔찍했다.

유명세를 얻고 싶었지만 음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

타마키 히로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악보가 자신이 남길 마지막 곡이라는 것.

이것마저 알려지지 않는다면 타마키 히로시라는 음악가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좀 피곤하다.”

“아. 미안. 자라. 내일 또 올게.”

“아니. 오지 않아도 돼.”

스칼라가 고개를 돌려 타마키 히로 시를 보았다.

타마키 히로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찾아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아마 스칼라가 와주지 않았다 면 오늘도 사무치는 고독과 또 싸워 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타마키 히로시는 남은 시간을 최대한 자신을 위해 쓰고 싶었다. 그래 야만 했다. 그러고도 부족했다.

저 멀리 창공에 이르길 바라지만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난하여 얼마 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 알겠어.”

스칼라는 타마키의 마음을 짐작하고 병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타마키는 다시 펜을 들었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확실치 않았기에 뒷일을 걱정하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그러나 갑자기 곡이 잘 쓰일 리 없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쉽게 지치는 그의 악보에 땀방울이 떨어졌다.

타마키는 땀을 훔치고 다시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땀방울이 떨어졌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자꾸만 떨어졌다.

이제 악보도.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도 모두 땀에 빠져,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일렁거렸다.

그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그런 착각을 일으켰다.

* * *

2025년 12월은 루키의 달이었다.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통해 일약 유명인사가 된 프란츠 페터와 레이라는 물론.

배도빈의 파트너로 참가, 2라운드 오프닝곡을 녹음한 나카무라 료코도 성숙한 연주를 들려주며 대중의 사 랑을 받았다.

배도빈 비올라 소나타 D단조는 비 올라가 수수한 악기라는 편견을 단 번에 종식시키는 격렬한 곡이었고 나카무라 료코의 연주는 그에 훌륭히 부응하였다.

언론, 평단, 시청자들도 배도빈이 도중에 참가자 자격을 포기하여 정 말 다행이라 여기며 2라운드 진출자 들을 살폈다.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들이 배도빈 이 있었다면 주목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배도빈의 위상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시청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방청석을 찾은 이들 중 한 무리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진짜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있는 줄 왜 몰랐지?”

“그런 사람들 조명하려고 만든 콩쿠르잖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하긴. 아아, 대체 누굴 응원해야 하지.”

“난 페터! 엄청 힘들게 살았나봐. 크리크 국제 콩쿠르 우승할 땐 피아노가 없어서 종이에다 그려서 연습했대.”

“진짜 말도 안 되지. 배도빈이 제자로 들일 만한 애인 것 같아.”

“난 레이라가 누군지 너무 궁금하 던데. 지금 다른 사람들은 다 정체 밝혀졌는데 그 사람만 누군지 모르잖아.”

“누가 아리엘 얀스 아니냐고 하던데.”

“에이. 그럼 심사 위원들이 못 알아볼 리 있나? 도빈이도 금방 알아 봤잖아.”

“하긴 또 그러네?”

“그때 푸르트벵글러랑 도빈이 싸우는 거 진짜 개웃겼는데. 킥킥킥킥.”

“뉴튜브에 푸르트벵글러랑 배도빈 싸우는 장면 모아둔 영상도 있더라. 기자회견 할 때마다 싸움.”

“앜핳학핳학학. 맞아. 맞아.”

“근데 진짜 누가 우승할까?”

“솔직히 모르겠어. 누굴 응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두. 나이 먹고 자기 자리 찾으려는 파울도 응원하고 싶고 장애 딛고 다시 음악하는 니아도 응원하고 싶고.”

“박준수라고 한국 사람도 장난 아 니더라. 콩쿠르 출전만 마흔 번이 넘는데 한 번도 결승 못 갔다며.”

“제니 헤트니도 멋있더라. 나미비 아라고 되게 척박한 곳 출신인데 거기서는 클래식 음악 하는 사람이 거의 없대.”

“나도 그 이야기 봤어. 도빈 재단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다던데.”

"응응."

“하아. 진짜 자기 이야기 없는 사람이 없네. 다들 열심히 사는 거 같고 나만 생각 없는 거 같아.”

“너만 그러냐? 난 당장 저번 학기 학사경고 맞음.”

“히익. 대박. 너랑 친구라는 게 수치스러워.”

“뭐!”

“하하하. 농담. 농담이야.”

“타마키? 그 일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

“아. 따로 참가한다는 사람?”

“응.”

“글쎄.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자기 이야기나 그런 게 확실한데 좀 밋밋하다고 해야 하나.”

“음악도 별로 특별하지 않고.”

“페터가 우승해야 한다고!”

음대생들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거 장의 선택’을 지켜보는 시선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모든 참가자가 각자의 이유를 가지 고 본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물 역시 세계 최고의 음악 가 6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하니 팬들은 누구를 응원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2라운드 과제 곡 발표일은 점점 다가왔고.

항암 치료를 시작한 타마키 히로시는 점차 쇠약해지고 있었다.

타마키 히로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를 하면서도 억지로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보며 가슴을 쥐었다.

“병원 밥은 맛없을 줄 알았는데 먹을 만한데요?”

타마키 히로시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곡을 쓰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며 토할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음식을 삼키는 아들에게 무엇을 더 해줄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숟가락을 들고 있던 타마키의 손이 멈추었다.

없는 식욕에도 억지로 넣었던 음식물이 당장에라도 올라올 것 같았다.

어떻게든 버티려 했으나 이내 구토감을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웠다.

어머니는 휴지통을 감싸고 있던 아들 곁으로 다가가 등을 쓸었다.

생지옥이 이러할까.

한참을 그러고 고개를 든 타마키는 물을 입에 머금고 잔여물을 마저 뱉어 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만 먹을래?”

“아뇨. 안 먹으면 더 힘들어진대요. 괜찮아요.”

타마키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방금 토했으면서도 다시 한번 음식 물을 밀어넣는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씩씩한 모습이 고마웠지만 그 행동 이 얼마나 고되고 가혹한지 알기에 차라리 대신 앓고 싶었다.

결국 두 시간이나 걸려 식사를 한 타마키 히로시는 거의 탈진하여 반쯤 누웠다.

“좀 잘래?”

“아뇨. 며칠 안 남아서 서둘러야 해요. 내일은 계속 잘지도 모르니까.”

충분히 힘들 텐데.

견디는 것조차 버거울 텐데.

어머니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악보와 펜을 챙기는 아들에게 포기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일단 몸부터 낫고 생각하자고 하고 싶었다.

그랬었다.

그러나 아들의 대답을 들은 후로는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사실 무서워요.’

‘더 무서운 건 이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아무도 절 기억 못 해주는 거 예요.’

‘저한테는 이것밖에 없는데.’

아들은 베토벤 기념 콩쿠르를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치료가 어렵다는 사실을 듣고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었다.

그런 시간마저 아깝다고 여기는지 씩씩하게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럼 엄마 이거 내놓고 산책 좀 하다 올게.”

“네.”

식판을 들고 밖으로 나선 타마키 히로시의 어머니는 복도로 나서자마 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히로시.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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