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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53화 (45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53화

    99. 굴하지 않으리라(2)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데요.”

    “어쩌고 자시고 그냥 가끔 만나는 사이라고. 친구 몰라? 친구!”

    배도빈이 성을 내는 가우왕을 무시 한 채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건 왜.”

    “궁금하니까요.”

    “그러니까 왜 궁금하냐고.”

    “가우왕이랑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니까.”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뭘 잘못 먹었나. 아까부터 왜 자꾸 헛소리야! 애초에 걔랑 나는!”

    “무슨 사인데?”

    역정을 내던 가우왕 뒤에 한 여성 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찰스 브라움과 꼭 닮은 아름다운 금발과 희고 생기가 넘치는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아, 이 사람이야.”

    배도빈과 일행은 스칼라가 말하기 전 이미 그녀가 찰스 브라움의 동생 찰스 예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너, 너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놀러왔지.”

    놀란 가우왕을 시큰둥하게 대한 찰스 예나는 배도빈과 일행을 둘러보 고 예를 표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찰스 예나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로써 가우왕에게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군!”

    나윤희와 배도빈, 스칼라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찰스 예나는 나윤희 옆에 서 있는 작은 여성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 했는데 그녀가 가우왕의 동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요. 반가워요.”

    찰스 예나가 일행과 악수를 나눴듯 이 손을 내밀었으나 왕소소는 신경 도 쓰지 않고 찰스 예나를 살폈다.

    ‘ 멀쩡하잖아.’

    인상도 그렇지만 잠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오빠를 만 나나 싶었던 왕소소는 적잖이 놀라 고 있었고 또한 다급해졌다.

    왕소소가 찰스 예나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언니.”

    “어머.”

    소소의 태도에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었던 찰스 예나는 그 다정한 목소 리에 놀랐다.

    그러나 이내 손을 포개며 웃어 보였다.

    “반가워. 나만 보고 싶은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좀 빨리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 데. 이이가 소개해 달라고 해도 좀 처럼 만나게 해주지 않았거든.”

    찰스 예나의 말에 소소가 가우왕을

    째려보았다.

    배도빈과 나윤희는 이 재밌는 상황 에 무척 흥미를 보였는데 평소 소소 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얼마 나 오빠를 보내버리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간절한 왕소소와 여유 있어 보이는 미인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자개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을 수 없었다.

    “괜찮으시면 식사 같이하세요.”

    “고마워요. 마침 저녁 먹으러 나왔거든요.”

    찰스 예나가 나윤희의 제안을 수락

    하자 왕소소가 얼른 가우왕 옆자리를 비웠다.

    예나는 그 행동에 민망해하면서도 즐거워했고 왕소소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눈웃음을 보였다.

    일행은 잠시간 일상적인 대화를 나 누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 업한 찰스 예나는 역사학자로 활동 하는 한편, 모교에서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비해 턱없이 빠르게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는

    데, 그녀가 역사학자라는 걸 알게 된 스칼라는 정체가 들킬 것을 두려 워 해 되도록 그녀의 눈에 띄지 않으려 입을 닫았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자 더 이상 궁금한 걸 참을 수 없었던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가우왕이랑은 대학 시절에 만났다 고 들었어요.”

    “응. 그때는 지금보다 더 못됐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멋있어 보였던 거 있지?”

    나윤희와 왕소소가 예나의 발언에 흥분했다.

    어떻게 보아도 그녀가 가우왕에게 관심이 있다는 게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찰스 예나가 고개를 돌려 가우왕을 보며 물었다.

    “어떤데?”

    “ 뭘?”

    “그래서 무슨 관계냐고. 우리.”

    가우왕은 여유 넘치는 미소를 차마 제대로 대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찰스 예나가 나윤희와 왕소소를 보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둘만 있을 때랑 너무 달라. 심하 지 않아?”

    예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왕소소 가 오빠의 머리를 냅다 때렸다.

    아픈 것보다 동생이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놀란 가우왕이 머리를 잡 고 소소를 노려보았다.

    소소도 지지 않고 뭘 잘했냐고 질 타하듯 노려보았다.

    예나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가우왕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어 깍지를 끼는데, 가우왕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왕소소와 나윤희의 가슴에 또 한 번 불을 지르고

    말았다.

    나윤희와 왕소소는 서로 손뼉을 치 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고 배도빈 은 어머니 유진희와 왕소소가 드라 마에 미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자.”

    가우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스 예나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녀는 난감해하면서도 일행에게 미 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네. 다 음에는 느긋하게 이야기 나누자.”

    배도빈과 나윤희, 왕소소, 스칼라는 심벌즈를 치는 원숭이 인형처럼 고

    개를 급히 끄덕였다.

    가우왕과 찰스 예나가 떠나고 왕소 소는 식욕이 도는지 자신의 몫을 해 치우고 두 개의 요리를 더 주문했다.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다.”

    “응.”

    “가우왕한테 그런 모습이 있을 줄 은 몰랐어요.”

    “난 알았지.”

    일행은 가우왕과 찰스 예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적당히 시간을 보 냈다.

    배도빈이 나윤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찰스는요?”

    “레이라 씨를 찾고 있나 봐. 어디 에 머무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나 가시더라고.”

    “흐음.”

    “페터는?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지금은 심사 위원이랑 참가자 입 장이니까요. 대회 끝나기 전까지는 만나지 말자고 했어요.”

    “아, 그러네.”

    나윤희는 같은 이유로 오랜만에 만 나는 파울 리히터도 함께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료코는?”

    왕소소가 나카무라 료코에 대해 물었다.

    “녹음 때문에 내일까진 바쁠 거예요. 2라운드 방송 때 쓸 곡.”

    “정말 잘 됐다.”

    “응. 잘 됐어.”

    “좋아하더라고요.”

    여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나 카무라 료코에게 이번 일은 무척 고 무적인 일이었고.

    그녀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알고 있는 나윤희와 왕소소는 자기 일처

    럼 기뻐했다.

    “다니엘 아저씨가 안 보인다만.”

    스칼라가 죽이 잘 맞는 다니엘 홀 랜드를 찾았다.

    “올드 모임. 니아, 파울이랑 같이 술 한잔한대요.”

    “발그레이 고문님 술 괜찮으실까?”

    “적당히 하겠죠.”

    그렇게 대화를 하던 중.

    배도빈이 깜빡한 사람을 떠올렸다.

    “타마키는?”

    평소 프란츠 페터와 함께 타마키

    히로시와 어울리던 스칼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몸이 안 좋은 모양이더군. 다음 과제에 대한 부담도 느끼는 모양이 야.”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괜찮은 실력이었지만 2라운 드부터는 분명 압박을 느낄 만했다.

    ‘지금은 무리지. 5〜6년 뒤라면 또 모를까.’

    타마키 히로시는 비록 쟁쟁한 참가 자들에 비해 모자라 보여도 처음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찾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크게 성장해 있었다.

    배도빈은 며칠 전 카밀라 앤더슨이 통화 중에 슬쩍 타마키 히로시에 대 한 이야기를 꺼낸 것을 떠올리며.

    그가 지금까지와 같이 노력한다면 그에게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식사도, 대화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을 때 배도빈의 눈에 익 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쟤는 왜 또 여기 있어?”

    배도빈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돌렸고 그들의 보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 사나운 머리카락은 입단 후 검게 물들였으나 평소 스타일마저

    바꾼 것은 아니라, 일행은 진달래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강렬한 레드와 블랙의 체크무늬 재 킷과 값싼 인조 호피 퍼 코트, 굽 높은 구두까지.

    그나마 예전처럼 징 박힌 가죽 재 킷이나 체인을 걸고 다니지 않아 다 행이었다.

    “달래야.”

    나윤희가 손을 들고 흔들며 진달래를 불렀다.

    이름을 불린 진달래는 멈칫 하더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배도빈 일행을 확인하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 여기 있는 거 들키면 안 되는 데?’

    아리엘과 같이할 저녁 식사 거리를 사러 나왔던 진달래는 어쩔 수 없이 배도빈 일행에게 다가갔다.

    “휴가 길게 쓰더니 여기 와 있었던 거야?”

    나윤희가 의자를 빼주며 살갑게 물었다. 그녀의 친절에 진달래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 Ö 으”

    —, Ö •

    “푹 쉬어도 될 텐데 휴가 때도 열 심히 하잖아. 멋있네, 우리 보컬.”

    “……하하. 머, 멋있지?”

    진달래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왕소소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노래도 아니고 작곡 콩쿠르에?”

    진달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 급히 답했다.

    “어, 다, 다들 노력하는 걸 보면서 나도 힘내는 거지. 어.”

    “어떤 곡이 나오는지 듣는 것도 공 부가 될 거야.”

    “마, 맞아! 그런 거야!”

    진달래는 나윤희의 말에 냉큼 달라

    붙으며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모두 거둬진 것은 아니었다.

    배도빈이 진달래가 안고 있는 종이 봉투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뭐야?”

    “바, 밥이지 뭐긴 뭐야.”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데?”

    “다, 다 먹을 수 있어. 이 정도 쯤 이야.”

    누가 봐도 2인분 이상이었다. 배도빈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문 득 고개를 돌렸는데, 4인분 요리를

    세 접시나 먹어버린 왕소소가 디저 트를 고르고 있었다.

    ‘……먹을 수 있구만.’

    배도빈이 나름 납득하는 한편 나윤희는 휴가마저 음악과 관련짓는 진 달래를 기특하게 여겼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푹 쉬는 것도 중요해.”

    “•…"네.”

    굳이 속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진달 래가 자기도 모르게 존대했고.

    나윤희는 그것을 의아히 여기면서 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걔는 잘 지내?”

    디저트를 주문한 소소가 진달래에 게 아리엘 얀스에 대해 물었다.

    “어, 어? 어. 어. 잘 지내지.”

    소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달래를 살폈다. 아무래도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이라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내가? 아니이〜 전혀 아닌데?”

    진달래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과장되어 있어,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던 배도빈과 나윤희마저도 이상하게 여길 즘.

    스칼라가 입을 열었다.

    “같이 다니던 사람이 기다리는 거 아닌가?”

    그 말에 진달래의 눈에 지진이 나 버렸다.

    “같이 온 사람 있었어?”

    “어, 아. 으, 응.”

    진달래는 테이블 아래로 스칼라의 발을 밟았고 통굽에 찍힌 스칼라는 고통에 못 이겨 쓰러지고 말았다.

    “아깐 혼자 먹는다며.”

    배도빈이 다시 한번 종이봉투를 지 적했고 소소와 윤희도 고개를 끄덕

    이며 동조했다.

    “이, 이건 혼자 먹는 거 맞아……

    진달래는 최대한 상황을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모든 행동과 말이 그녀가 무엇을 감추고 있다고 가리켰다.

    “아까부터 좀 이상한데.”

    “누구랑 온 거야?”

    “수상해.”

    “끄으으윽.”

    배도빈, 나윤희, 왕소소, 스칼라의 압박이 이어졌고 진달래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죄, 죄송해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갔는데 남겨진 네 사람은 멍하니 진달래가 사라진 방향을 볼 뿐이었다.

    “주문하신 몽블랑입니다.”

    “아. 고마워요.”

    이상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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