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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52화 (45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52화

    99. 굴하지 않으리라(1)

    베토벤 기념 콩쿠르 1라운드 종료 후, 참가자들에게 하루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두 번째 과제에서 24시간 내내 깨어 있느라 무리한 이들을 배려한 조 치였다.

    덕분에 심사 위원 배도빈과 콩쿠르 참가 중인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 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늦은 오후.

    가우왕이 호텔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피로가 덜 풀린 탓에 하품을 늘어 지게 해대며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배도빈을 살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때때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꽤 심각한 표정이었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보냐?”

    그러나 배도빈은 집중한 탓에 질문을 듣지 못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가우왕은 배도빈의 그런 모습을 의 아하게 여기면서도 자꾸만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하였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아, 고마워.”

    가우왕이 차디찬 커피를 몇 모금 마시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에도 배도빈은 혼잣말을 계속했다.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여태 알려지지 않았지?”

    “의도적으로 숨긴 건가?”

    “그럼 이유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가우왕은 답답하여 재자 물었다.

    “뭐 보냐.”

    배도빈은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훑을 뿐이었다.

    가우왕은 그가 무엇에 집중하기 시 작하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그 비정상적인 집중력에 짜증이 났다.

    “ 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정된 시선.

    가우왕이 한 번 더 소리치자 배도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순진무 구한 눈으로 언제 왔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가우왕은 턱짓으로 그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뭐 보냐고.”

    배도빈은 가우왕에게 언제 왔냐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방금 발 견한 놀라운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알고 있었어요?”

    “뭘?"

    “태국 카레는 코코넛 밀크를 베이 스로 만든대요.”

    “……그러냐.”

    배도빈이 어떤 심각한 일이라도 고 민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가우왕 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꽤 긴 시간 서로를 알아왔지만 음악을 할 때와 평소의 갭이 너무나 컸다.

    “지금까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 지 이해할 수 없어요. 물이 아닌 걸로 끓인 카레라니. 코코넛 밀크로도 가능하다면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잖아요.”

    ‘시내에 케이크 잘하는 곳이 있다 고 하던데. 이따 소소 데리고 가 볼 까. 그 녀석 단 거 좋아하니까.’

    “우유로 만들어도 맛있을까? 육수를 사용하는 것도 시도해 봄직해요. 사골 국물도 괜찮을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다음 달이네. 최지훈 말고는 어중이떠중이들이겠지만 쉽 게 내줄 순 없지.’

    “양파를 같이 오래 끓이면 단맛이 좋단 말이에요. 과정이 길고 힘이 드는 게 단점인데 음료수를 육수로 쓰면 쉽게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배도빈의 말을 반쯤 무시하고 있던 가우왕이 입을 열었다.

    “네가 한 음식이 왜 그렇게 맛없는 지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요.”

    “아니야. 틀렸어. 애초에 음료수를 넣겠다는 마인드부터가 글러먹었어. 아주 못된 짓이야.”

    “그런 고정관념이 발전을 저해하는

    거예요.”

    “틀린 건 틀린 거야.”

    가우왕이 모질게 굴었지만 미식가 배도빈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지금은 베를린 필하모닉 직원과 최지훈, 차채은 같은 친구들 그리고 그의 가족마저도 기피하지만 언젠가는 최고의 카레를 만들 거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어때?”

    “뭐가요.”

    “프란츠.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 아뇨.”

    가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도 있고 열심히 하던데 아쉽 구만.”

    “발그레이나 리히터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빌어먹을 나르시스트도.”

    “레이라도.”

    두 사람은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다 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군지 알겠어?”

    “누군지 알겠어요?”

    같은 질문을 하고, 받은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그 정도 되는 인간을 너나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답답해 미치겠다니까.”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 모르겠대요. 그렇게 확고한 사람이라면 몇 곡 듣고 파악할 수 있을 텐데.”

    “ O으”

    — U.

    생각을 공유해도 답이 없었기에 고 민을 이어가던 중 가우왕이 입을 열었다.

    “……또라이라든가.”

    가우왕의 말에 배도빈이 인상을 썼다. 턱을 잡아당긴 그 모습이 질색 이라 가우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그놈 말곤 그 정도 수준이 없었단 말이지.”

    “진솔하고 멋진 음악을 하는 레이 라가?”

    “너도 그놈 실력은 인정하잖아.”

    배도빈이 고민도 않고 부정했다.

    “실력은 실력이고 두 사람이 지향 하는 방향이 너무 다르잖아요.”

    “하긴. 달라도 너무 다르지. 그래도 달리 후보가 없잖아. 어때. 평생 해 오던 스타일을 바꿀 수 있겠어? 너 도 여러 시도하잖아.”

    “장르나 풍조는 바뀌겠지만 말하는

    바는 변하지 않아요. 사람이 바뀌지 않고서야.”

    “그렇지. 하. 도통 모르겠단 말이 야.”

    다시금 고민을 이어가는 두 사람에 게 왕소소, 나윤희, 스칼라가 다가왔다.

    동생을 발견한 가우왕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네. 요 앞에 괜찮은 식 당이 있다는데 가자.”

    “싫어.”

    “밥 먹었어?”

    “아니. 오빠랑 먹는 게 싫어.”

    동생을 향한 가우왕의 사랑은 지극 했지만 소소는 그럴 때마다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

    어렸을 적에는 얼후를 밟아서 망가 뜨렸고 커서는 활동을 돕는답시고 무리한 퍼포먼스를 제안해 지금도 가끔 이불을 걷어차게 하는 ‘버라이 어티 쑈’를 하게 했다.

    최근에는 가족 전체가 독일로 귀화 하면서 함께 살게 되었더니 ‘세 개 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익히는 과 정에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게 소 음을 내어 결국 단원 기숙사로 이사 하게 했으니.

    오빠 왕가우와 붙어 있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단호함에 충격받은 가우왕 은 이미 다 마시고 얼음만 남은 컵을 입에 가져갈 뿐이었다.

    나윤희가 나섰다.

    “그러지 말고 같이 먹자.”

    왕소소는 무척 껄끄러웠으나 친구 의 제안을 마냥 거절하기도 싫어 망 설였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길 바라는 나윤희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가우왕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 살바토르라는 식당 가려는데 같이 가요. 괜찮지?”

    배도빈과 스칼라가 고개를 끄덕이 자 소소가 가우왕을 타박했다.

    “친구도 없어? 왜 맨날 혼자 있어.”

    “참,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흐fl. 그럴 리가 없잖아.”

    “친구 없을걸요.”

    애써 두 사람을 함께 있게 하려던 나윤희는 배도빈이 더는 방해하지 못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배도빈은 나윤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가우왕도 더는 참지 않았다.

    “됐어. 너희끼리 가. 내가 친구가 없긴 왜 없어? 괜찮은 데가 있다고 하니까 가 보자는 거지.”

    “ 없잖아요.”

    배도빈이 한 번 더 나섰다.

    가우왕은 눈썹을 꿈틀댔고.

    남매가 함께 식사할 분위기를 만들 고자 했던 나윤희는 배도빈의 등을 찔렀다.

    왕소소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

    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스칼라가 입을 열었다.

    “친구 있어.”

    “그럴 리 없어.”

    가우왕의 성격을 받아줄 사람은 사 기꾼이나 영업 사원밖에 없을 거라 고 확신하던 배도빈이 부정했지만 스칼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노란 머리 여자랑 밥 먹는 걸 봤어.”

    “너!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우왕이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스칼라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였으나 그에게 문명인의 상식이 존재

    할 리 없었다.

    이어지는 스칼라의 발언에 가우왕 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거워 보이더만.”

    “다, 닥쳐.”

    “왜 화를 내지? 친구가 없어 슬픈 것 아니었나?”

    “없어! 그런 기억 없어! 네가 잘못 본 거다.”

    “아닌데. 분명……. 읍!”

    가우왕이 다급히 일어나 스칼라의 입을 막았다. 스칼라가 그를 뿌리치 려 애썼지만 빠져나오지 못했고 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다소 진정했다.

    그러나 이미 밝혀진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누구 만나?”

    소소가 물었다.

    노총각인 오빠가 누구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관심을 보였다.

    왕씨 가족 모두가 바라는 일이기도 했으며, 이 성질 고약한 인간이 가 정이라도 가지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담겨 있었다.

    더욱이 출가하게 되면 마주칠 일도

    줄어들 테니 소소에게는 너무나 반 가운 일이었다.

    가우왕이 스칼라를 노려보고는 어 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친구일 뿐이야.”

    “거짓말.”

    소소의 반응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한 탓이었다.

    “거짓말 아니야. 찰스 브라움의 동 생을 만나는 걸 봤어.”

    스칼라의 말에 배도빈의 눈이 거의 튀어나왔다.

    소소와 나윤희도 깜짝 놀라 추궁하 기 시작했다.

    “저, 정말이에요?”

    “빨리 말해.”

    “뭘. 밥 먹으러 간다며. 빨리 가버 려. 그리고 너,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가우왕이 스칼라를 위협했다.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였으나 곧 동생에게 멱살을 잡혀 이리저리 흔들리고 말았다.

    “당장 말해!”

    “야, 야.”

    가우왕은 자신의 가슴팍까지밖에 안 오는 동생에게 휘둘리며 난감함을 호소했지만.

    소소와 마찬가지로 배도빈과 나윤희도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의 악연 의 이유가 밝혀질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데려가요.”

    “데려가긴 어딜 데려가! 이거 놔!”

    “어, 어떻게. 언제부터 만나신 거예요?”

    “남이사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왕소소, 너 이거 안 놔!”

    큰 소란 후.

    일행은 본래 일정이었던 살바토르 레스트랑을 대신해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가우왕을 연행했다.

    “정말 찰스 동생이랑 만나고 있어요?”

    “ 결혼해.”

    “지금까지 계속 숨기신 거예요?”

    “날짜 잡아.”

    “찰스 동생 누군데요?”

    “신혼여행 내가 예약해 줄게.”

    “어떻게 만난 건지 알려주세요.”

    “놓치기만 해봐. 납작 엎드려서 빌 어. 결혼해 달라고 빌어.”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협박에 지 친 가우왕이 결국 자백하고 말았다.

    “찰스 예나. 대학 다닐 때 아르바 이트로 피아노 가르쳐 줬던 애야.”

    배도빈, 왕소소, 나윤희, 스칼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진지한 관계 아니야.”

    그 모습이 부담스러워 가우왕은 말을 꺼내기 전에 선을 분명히 했으나

    일행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신 차려요.”

    “쓰레기.”

    “실망이에요.”

    “상종 못 할 남자군.”

    배도빈, 왕소소, 나윤희, 스칼라로 부터 차례로 비난 받은 가우왕의 이 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냥 가끔 만나서 어떻게 지냈는 지 물어보고 밥이나 먹는 사이라고. 너희가 지금 이렇게 할.”

    “영화도 보지 않았나.”

    “너 대체 어디까지 쫓아온 거야!

    아니, 대체 왜 따라다녀!”

    언론을 의식하여 철저히 비밀로 붙이고 행동에도 조심했던 가우왕은 스칼라가 대체 어떻게 자신을 추적 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훌륭한 사냥꾼은 사냥감이 추적당 한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지.”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단둘이 식사하고 영화 보는데 진지 한 관계가 아니라됴.”

    “친구라고 했잖아.”

    “ 결혼해.”

    “넌 아까부터 자꾸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가우왕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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