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50화
98. 아무도 당신을 알아주지 못한 다고 생각할 때(4)
‘레이라’의 연주가 시작되고 채 1 분도 지나지 않아, 심사 위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앞선 1차전에서 레이라의 곡을 들었던 터라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단순한 주제를 너무도 명쾌히 풀어내고 있었다.
니아 발그레이, 파울 리히터, 찰스 브라움, 프란츠 페터 모두 저마다 훌륭한 곡을 썼지만.
바이올린을 켜는 레이라는 그 누구 와도 비교할 수 없이 찬란히 빛났다.
‘훌륭해.’
배도빈이 레이라가 제출한 악보를 살피며 내심 감탄했다.
깔끔한 듯 보이지만 고민한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려고 애썼는지 그런 부분들은 반복 수정한 자국이 남 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연주되고 있는 것처럼 고심 끝에 완성한 악보는 너무도 완벽히 구성되어 있었다.
1차전에서 느꼈던 작은 거리낌조차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누구지?’
바이올린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악장 단에 비해서도 나으면 나았지 못하 다고 할 수 없었다.
‘캐논’의 전 주인이었던 니아 발그 레이의 전성기와 바이올린의 황제 찰스 브라움에 비견할 만한 수준.
음악을 해왔다면 무명일 리 없었다.
명성이 중요한 시장이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선에서 해당되는 이야기.
배도빈은 이만한 음악가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대중이 몰랐다면 적어도 음악인들 사이에서라도 소문이 퍼졌어야 정상 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레이라의 연주가 절정을 향해 치닫는 순간 하찮은 문제가 될 뿐이었다.
‘열정적이야. 순수하고 솔직해.’
배도빈은 레이라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멋을 부리거나 의미 없는 치장 따 위 없는 진솔한 말투였다.
세련된 화법으로 이야기를 능숙하 게 전달하니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 이게 되었다.
잔잔하면서도 부드럽고.
때로는 정열이 넘치는 멜로디.
레이라는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였다.
‘내 생각이 짧았어.’
배도빈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츠 페터라는 거대한 원석을 발견하고 그것이 세공되는 과정에 즐 거운 나머지 눈이 멀고 말았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나 멋진 음악가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분명 어딘가 또 있겠지.’
배도빈은 언젠가 또 그를 즐겁게 할 또 다른 음악가를 만나길 바라며, 레이라가 펼치는 이야기 속에서 흡족해했다.
그런 한편.
마리 얀스는 괄목상대한 손자의 연주를 들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목 언저리가 꽉 조여들어 침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웠다.
‘듣고 있으냐.’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 부부에게 물었다.
너희의 아들이 이렇게나 자랑스럽게 성장했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함께 듣고 싶었다.
‘다 컸구나.’
지금껏 자신을 숨기고 억제하려고 만 했던 아리엘 얀스가 비로소 자신 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마리 얀스는 줄곧 우려했다.
아침부터 바이올린을 보러 가자고 졸랐던 탓에 테러에 휩쓸린 거라고 자책했던 어린 손자.1)
1)〈
다시 태어난 베토벤〉301화, 66. 라이든샤프트(3)에 소개.
어쩌면 지금도 그 날의 사고를 본 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닐 지.
그래서 무엇을 하든 그렇게 자신을 억누르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한 경향은 음악에서도 드러났다.
자신을 숨기다 보니 음악은 조심스 럽고 신중해져, 담백한 맛은 있어도 가슴에 와닿지 못했다.
타인에게 들려주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하는 음악.
아리엘 얀스의 음악은 그러했다.
그러나 마리 얀스는 계기만 주어진 다면 아리엘이 그를 구속하는 껍데 기를 찢고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론과 팬들의 비난이 빗발쳐도.
성장통을 겪는다 해도 끝내 날아오를 거라 믿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고치 속에서도 그 찬란한 빛의 전조를 볼 수 있지 않았는가!
스스로를 감추고 외부와의 연결을 끊어냈음에도 아리엘 얀스의 재능은 감춰지지 않았다.
낭중지추.
그것을 보았기에 많은 이가 그를 응원하고 그의 음악을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누구보다도 노력하면서도 저평가 받았던 아리엘은 비로소 온전한 모 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리엘이 연주를 마치고.
방청객과 참가자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낸 끝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젊은 사람 중에 저 녀석 말고 이런 음악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또 있다니.”
토스카니니가 말하는 ‘저 녀석’이 배도빈을 뜻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 은 없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지휘자가 레이 라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꼽히는 배도빈과 비교한 것이다.
‘거장의 선택’이 방영된 이후 줄곧 쓴소리를 해왔던 아르투로 토스카니 니의 발언에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지. 설마 이 단순한 주제로 이렇게 나 멋진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거라 고는 생각지 않았다.”
토스카니니는 레이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무명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알려진 음악가 중 어느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군. ……지켜보지.”
토스카니니가 점수를 기입했고 세 트장 정면에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 에 숫자 10이 표시되었다.
“이거 놀랍네요! 마에스트로 토스 카니니가 레이라에게 최초로 10점 만점을 부여했습니다. 그의 총점이 기대되는데요. 마에스트로 얀스, 심 사 부탁드립니다.”
우진의 부탁을 받은 마리 얀스는 말없이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촉촉해진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힘겹게 연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무척 잠겨 있었다.
“훌륭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 하라는 뜻에서 9점 드리죠.”
“마에스트로 얀스께서 레이라의 곡에 깊이 감동한 듯싶습니다. 역시나 높은 점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진은 좀 더 자세한 심사를 부탁 하고 싶었지만 마리 얀스가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을 보곤 적당히 마무 리 하였다.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열었다.
“악보의 모든 요소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참가 곡과 더불어 본인이 누군지,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가 음악에 고 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토스카니니에 이어 푸르트벵글러까지 찬사를 이어가자 방청석과 채팅 방에 난리가 났다.
푸르트벵글러는 한 번 더 악보를 살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서든 통할 곡이다. 이렇게 솔 직한 이야기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안다면 크게 사랑받겠지. 개성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은 큰 재능이다.”
푸르트벵글러 역시 토스카니니, 배도빈과 마찬가지로 레이라가 무명일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는 알아도,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진 못한 것 같군. 자넨 이 녀석처럼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푸르트벵글러가 턱짓으로 옆에 앉아 있는 배도빈을 가리켰다.
토스카니니에 이어 두 번이나 언급 된 배도빈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나, 푸르트벵글러의 발언이 끝나지 않았기에 잠자코 있었다.
“다음에는 무대 위에서 봤으면 좋겠군.”
푸르트벵글러가 9점을 주며 레이라 의 최다 득점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상태에서 배도빈이 마이크를 잡았다.
두 번째 과제 내내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참가자들에게 쓴 소리를 했던 배도빈이 무슨 말을 꺼낼지.
모두가 긴장했다.
“저라면 여기 세 번째, 네 번째 마 디는 좀 더 빠르게 진행했을 거예요. 작은 차이지만 도입이 빠르게 진행되는 편이 몰입하기 좋으니까.”
배도빈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악보를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머지않아 차트에 당신의 이름이 오를 것 같네요. 서로 멋진 음악을 하죠.”
배도빈의 발언에 우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까지 참가자들의 정신과 의지를 무자비하게 꺾었던 마에스트로 배가 또 한 번 놀라운 발언을 하였습니다!”
배도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현재 클래식 음악 앨범 순위는 몇 년째 마에스트로 배가 독식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 아시아 시장을 가리지 않고 말이죠.”
우진이 촬영진에게 눈짓하자 눈치 빠른 PD가 화면에 전 세계 클래식 음악 앨범 판매 순위표를 띄웠다.
1위에서부터 10위까지 정리된 그 표에, 작곡가 배도빈이 발표한 앨범은 총 아홉 개.
나머지 하나도 사카모토 료이치가 배도빈과 공동 작업한 ‘Honor’가 수록된 앨범이었다.
그야말로 독식.
“차트에서 이름을 볼 수 있을 거란 말씀은 레이라 씨가 마에스트로의 앨범 판매량을 넘어설 거라는 뜻인 가요?”
우진의 질문에 배도빈은 무심하게 답했다.
“ 가능하겠죠.”
“시청자 여러분! 세계 음악 시장을 제패한 마에스트로 배도빈이 레이라 씨를 그의 라이벌로 인정하였습니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세 명의 음악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 배도빈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배도빈이 점수를 기입하였고.
다시금 화면이 전환된 스크린에는 배도빈의 이니셜 아래, 숫자 10이 표시되었다.
ㄴ 도빈이도 10점이라고?
ㄴ 와ㅋㅋㅋㅋㅋㅋㅋ
ㄴ 경사다 경사!
ㄴ 우진이 개오바 떨긴 했지만 배도빈 입장에서는 진짜 최고의 찬사를 보낸 듯. 10점이라니.
ㄴ 니아 발그레이한테 8점, 찰스 브라움이랑 파울에게 7점, 프란츠에게 6점 준 거 생각하면 진짴ㅋㅋㅋㅋㅋ
ㄴ 저 정도면 오바가 아니라 진짜 라이벌 인정한 거 아님?
ㄴ 말이 되냐. 무명 음악가랑 클래식 음악 올타임 레전드에게 라이벌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음?
ㄴ 유망한 음악가에게 배도빈이 응원 차 어느 정도 립서비스 해줬다고 봐야지. 사실 지금 클래식 앨범 시 장에서 배도빈 기록을 깨는 건 불가능함.
ㄴ 왜?
ㄴ 매년 싱글앨범을 내는데 그중 제일 적게 팔린 ‘A108’이 지금 누적 320만 장임. 판매 추이는 떨어졌어 도 여전히 계속 팔리고 있고.
ㄴ 괜히 마왕이라고 하는 게 아냐. 배도빈 혼자서도 깡패인데 연주진도 그 베를린 필하모닉임. 기량으로도 인프라로도 세계 최강이라는 베를린 필하모닉. 판매량 싸움으로 가면 노 답이야.
ㄴ 클래식 팬들의 종착지가 오케스트라인 걸 감안하면 베를린 필하모닉이 진짜 너무 크네.
ㄴ 솔직히 빈, 런던 심포니, 런던 필, 암스테르담 정도 아니면 명함도 못 꺼내긴 하지.
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나 거기 좋아했는데.
ㄴ 얘는 언제적 이야기야ㅋㅋㅋ 토마스 필스 살아 있을 때는 비빌 만 하긴 했지.
ㄴ 아무튼 배도빈의 저 발언은 그만 큼 인정해 준다는 뜻이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
ㄴ 글쎄? 저 심사 위원들이 다 인정 하는 거 보면 난 가능성 있다 보는 데.
ㄴ 배도빈이 독재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솔직히 계속 될 것 같긴 해 ㅋㅋㅋ
ㄴ 그런 배도빈이 인정하는 거잖아. 레이라 곡 진짜 너무 선명해서 지금도 계속 들리는 거 같음. 난 저 사람이 앨범 내면 무조건 살 거임.
시청자들은 채팅을 나누는 도중에 사카모토 료이치와 브루노 발터가 각각 9점씩 주는 것을 확인하고 더 욱 크게 놀랐다.
총합 56점.
정체불명의 음악가가 내로라하는 참가자 중 아무도 이르지 못한 마의 50점을 훌쩍 넘겨 버리고 만 데 경 악하고 말았다.
스크린은 곧장 두 번째 과제에 참 가한 이들 중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여덟 명의 이름을 정리해 보여 주었다.
1st 레이라 56점
2nd 니아 발그레이 49점
3rd 파울 리히터 47점
3rd 찰스 브라움 47점
5th 프란츠 페터 42점
6th 박준수 39점
7th 타마키 히로시 38점
8th 제니 헤트니 34점
그것을 확인한 아리엘 얀스는 이제 겨우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이라 여기 며 담담히 2라운드 진출자들과 함께 무대로 걸어나갔다.
프란츠 페터는 2라운드 진출에 감 격하여 두 손을 번쩍 들었고.
타마키 히로시는 자신보다 위에 있는 여섯 명의 음악가들의 압도적인 기량에 심각해졌으며.
니아 발그레이, 파울 리히터는 무 섭게 치고 올라오는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에게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기다려!”
찰스 브라움은 배도빈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그를 자극하는 바이올린 연주에 흥분해 레이라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