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49화 (44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49화

98. 아무도 당신을 알아주지 못한 다고 생각할 때(3)

한편.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국장 카밀라 앤더슨은 퇴근 후 베를린의 자택에서 ‘거장의 선택’을 시청하고 있었다.

“빌과 도빈이가 점수를 후하게 줬네. 어린이 교실 강사로 두기엔 아까운 사람 아닌가?”

그녀는 타마키를 알아보지 못했지 만 곧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어린이 타악 교실의 계약직 강사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를 상대했던 이자벨 멀핀으로부 터 상당히 다급하고 간절해 보였다 고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빈이는 프란츠 외 에는 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던데.’

배도빈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으며,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려는 의지도 강하지만 이미 악단주가 총애하는 인물이 있는 상황이었다.

‘안 됐네.’

그를 정식 직원으로 들이는 건 어 떠냐고 물어보려 했던 카밀라는 어 쩔 수 없는 일도 있다 여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덧 ‘거장의 선택’도 마무리가 되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진 카밀라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채널을 돌릴 뿐이었다.

“볼 게 없어.”

예능 프로그램이 재미없기로 유명 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 방송은 탁월히 지루했다.

덕분에 클래식 음악이나 연극, 오페라와 같은 문화가 발전, 향유되기 도 했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약속 없는 밤을 보내기엔 절망스러운 환 경이었다.

최근에는 ‘너만 모름’이나 ‘거장의 선택’ 등 볼만한 프로그램도 생겨나는 추세지만 그뿐.

그 외 시청할 프로그램은 뉴스 정도였다.

카밀라는 뉴스를 틀어놓고 우유를 데우러 주방으로 향했다.

-아리엘 얀스가 탈퇴하며 지휘자를 물색 중이었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단원들의 반대에 부딪쳐, 당분간 감독직을 공석으로 두게 되었습니다.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담은 컵을 넣은 카밀라가 뉴스 보도에 반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랑받았나 보네.’

얀스 가문의 젊은 천재가 언론으로 부터 물매를 맞아, 감독직을 내려놓았던 일로 명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카밀라는 단원들이 새로운 지휘자를 거부한다는 소식에 그들과 아리엘 얀스의 관계가 알려진 것보다 끈 끈했음을 알 수 있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 중 일부가 방사선 피폭에 고통 받고 있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 졌습니다. 독일에서만 네 명. 피해 선수들은 일본 정부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한 상 황입니다.

“세상에.”

카밀라 앤더슨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소식에 놀라고 분노했다.

“저 나라는 변하는 게 없네. 선수들 불쌍해서 어쩐다니.”

그리고 데워진 우유를 조심스레 꺼 내 마셨는데 문득〈피델리오〉아시 아 투어 때가 떠올랐다.

‘도빈이는 알고 있었구나.’

본래 예정은 서울, 부산, 도쿄, 고베, 베이징, 상해, 싱가포르 등 대규모 도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악단 주 배도빈의 지시로 중간에 도쿄, 고베 일정이 취소되었다.

‘그땐 가우왕 일로 경황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피델리오〉아시아 투어는 홍콩에 서 가우왕을 구출한 일 뒤에 이루어졌는데.

배도빈은 베이징, 상해 등 중국 영 토에서의 일정은 그대로 진행한 반 면, 일본 일정은 취소하였다.

당시에는 악단 전체가 어수선하였기에 최대한 일정을 줄이고 안정화 하려는 의도로만 생각했거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일정을 줄 일 의도였다면 가우왕 일로 관계가 껄끄러워진 중국 공연을 취소하는 것이 나았다.

더군다나 일본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주 수입처.

카밀라 앤더슨은 배도빈이 일본 공연을 취소한 이유는 저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일본에 안 간 지 꽤 됐는데?’

카밀라 앤더슨은 베를린 필하모닉 이 클래식 음악 부문, 아시아 최대 시장인 일본에 상당히 오랜 시간 들 리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렸다.

배도빈도 개인 일정만을 위해 몇 차례 갔을 뿐 그 인지도와 인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쿄 올림픽에 참 가해 피해 입은 선수들의 소식이 달리 다가왔다.

‘저기 사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야? 총리 바뀌고 좀 나아지나 싶었더니 똑같네. 똑같아.’

-첫 번째 제출자가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과제를 받고 개인 작업실에 있던 아리엘 얀스는 스피커를 통 해 전달된 소식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주어진 화음을 어떻게 더 아름답게 표현할지.

그의 신경은 온통 과제로 주어진 여섯 음계를 향하고 있었다.

고심 끝에 바이올린을 켜보고 펜을 들기를 반복한 끝에 조금씩 그의 악보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처음과 끝을 정하고.

드라마틱한 구절을 배치한 뒤 마치 퍼즐을 맞추듯, 앞과 뒤가 완벽히 맞아들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표들은 마치 원 래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듯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제출자가 연이 어 나왔군요.

아리엘은 바이올린을 들어 처음부 터 끝까지 연주했다.

한 번 더 반복하곤 펜을 들어 음을 조정했다.

플랫을 붙이기도.

강세를 조절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갔다.

모든 요소를 오직, 신이 오래전 안 배해 놓은 흐름에 맞춰 기입할 뿐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때야 아리엘 얀스는 모든 작업에 만족하여 깃펜을 내려 놓았다.

연주를 위한 준비도 마친 그는 제출 시각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았음을 확인하곤 눈을 감았다.

‘알 것 같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떠나고 몇 달간 자신을 돌이켜보았던 아리 엘 얀스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한때는 음악에 자신을 드러내기보 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데 집중해 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제야말로 가치.

때묻지 않은 음악이야말로 미.

그런 음악이야말로 유일한 연결처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의 바이올린을 손질했다. 이제는 기억 에서도 얼마 남지 않은 따뜻함에 기대어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음악.

부모를 여의고 나락에 떨어진 그에 게 음악은 구원이었다.

슬픔과 후회로 무너져 내리는 그를 지탱해 주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의 음악은 너무도 아름답고 자애 로워 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듯했다.

아리엘은 탐구하고 갈망했다.

그 끝에 곡을 쓰는 행위가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는 신의 메시지를 찾는 행위와 같다고 판단했다.

음악은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는 신 성하고 고결한 행위.

그 무엇도 더해지거나 빠져서는 아 니 되었다.

아리엘은 위대한 모차르트와 같이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음을, 신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본인이 구원받았듯이 저마다의 이유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싶었다.

정제된 음악만이 상처 입은 영혼을 낫게 해주었으니까.

그래서.

아리엘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배도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내는 소리는 너무도 매력적이라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이끌리는 힘이 있었다.

악마.

아니, 이 세상 모든 이를 홀린 그는 과연 마왕으로 불릴 만했다.

지극히 세속적인 음악.

심신의 안정보다는 감정을 더욱 격하게 하여 듣다 보면 웃게 되고 울게 되었다.

사람을 홀리는 음악.

아리엘은 그토록 훌륭한 기량을 가졌으면서 그런 음악을 하는 배도빈을 인정할 수 없었다.

몇 년이 흘렀다.

바른 음악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마왕을 향해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모두 어떤 음악이 옳은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제2의 배도빈, 고루한 음악가, 진부한 소리라는 말뿐이었다.

혼자였던 그를 받아주었던 토마스 필스가 물려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 상처까지 남겼다.

악단 운영진은 그를 저버렸다.

팬들조차 등을 돌렸다.

아리엘은 자신을 탓했다.

신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했다면 이렇게 될 리 없다고 자책했다.

그러다가 겨우.

자신을 돌아보고 수많은 질문을 던진 끝에야 알 수 있었다.

세속적이고 유해한 음악으로 여겼던 배도빈의 곡들이 왜 사랑받는지.

‘대화였습니다.’

지하철 테러 이후.

줄곧 홀로 지냈던 아리엘은 타인과 대화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 야 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토마스 필스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그의 첫 사회였다.

그 탓에 그의 음악은 듣기 편했지만 불친절했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하면서.

진달래를 만나고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여태껏 유일하다고 믿었던 음악에 여러 답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상적인 화음 배치와 효율적인 리듬 전개.

세상 밖으로 나온 미숙한 천재는 녹음된 음원과는 전혀 다른, 살아 있는 음악을 접했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완벽, 고결, 절제.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자신의 아집이었단 사실을 인정하기까 지 오래 걸렸다.

은사 토마스 필스와 단원들을 사랑함으로써.

진달래를 사랑함으로써 뜨기 시작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본 그는 비로 소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신의 목소리를 쫓지 않을 겁니다. 제 이야기를, 제 목소리로 부를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아버 지, 어머니. 필스 경.’

청년은.

그를 지지하는 단원들과 손을 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연인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긴 사색을 마치고.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운영 스태프에게 악보를 건네고 당당히 걸어나가 이 시대 최고의 음악 가들 앞에 섰다.

마리 얀스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손자를 보며 생각했다.

‘참가곡을 들으니 네 심경에 변화 가 있는 것 같더구나. 이번 곡으로 그것이 좋은 일인지 알 수 있으면 한다.’

‘레이라’와 심사 위원들이 준비를 마치자 사회자 우진이 베토벤 기념 콩쿠르 1라운드 두 번째 과제의 마 지막 순서를 알렸다.

“드디어 모든 참가자가 제출을 마 쳤습니다. 예상을 뒤집고 많은 분들 이 기한 전에 발표하였죠. 지금까지 최고 점수는 니아 발그레이가 획득 한 49점. 현재 8등은 34점입니다.”

시청자들은 1등서부터 8등까지 정 리된 표를 볼 수 있었다.

1st 니아 발그레이 49점

2nd 파울 리히터 47점

2nd 찰스 브라움 47점

4th 프란츠 페터 42점

6th 타마키 히로시 39점

“레이라 씨가 2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총점 34점을 넘겨야 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우진의 질문에.

아리엘 얀스가 바이올린을 받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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