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45화 (44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45화

    97. 격정의 세대를 말하며(2)

    어둠 속.

    마차가 불길한 바람을 헤치며 숲 속을 달려나간다.

    가우왕이 연타하는 건반이 말발 굽 소리를 냈고 찰스 브라움의 파 이어버드가 바람이 되어 숲을 헤 친다.

    다니엘 홀랜드의 콘트라베이스가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중, 나윤희의 블러드 와인이 아이처럼 묻는다.

    ‘아빠, 그가 다가오고 있어요.’

    ‘아들아, 창밖을 보지 마라. 귀를 막아라. 내 품에 안겨 어느 것도 믿지 마라.’

    왕소소의 첼로가 제2바이올린의 멜로디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불안을 감춘다.

    피아노가 더욱 맹렬히 달려나간다.

    불규칙한 전개는 말과 마부가 얼 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지 들려주었고 찰스 브라움의 칼날 같은 하강과 상승은 제2바이올린과 첼로의 대화 사이마다 끼어들었다.

    ‘아빠, 그가 왔어요.’

    ‘아들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마 라. 속아선 아니 된다.’

    ‘아빠, 그가 속삭여요. 문을 열라 고. 뛰어내리라고 말하고 있어요.’

    ‘사악한 마귀야! 어찌하여 나의 보물을 탐하느냐!’

    나윤희와 왕소소의 하모니가 절 정으로 치닫고 다니엘 홀랜드의 베이스가 웅장하게 드리운다.

    마치 마왕과 같이.

    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아빠, 숨이 막혀요.’

    ‘이 아이는 내 것이다. 내 것이야! 누구에게도 보낼 수 없어!’

    ‘아빠, 너무 아파요.’

    ‘조용히 하거라. 마왕이 네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블러드 와인은 잦게 떨며 겁에 질 린 아이를 그렸다. 아이는 아버지의 억센 팔에 안겨 숨이 막힐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말발굽 소리와 불 길한 바람은 누가 더 빠르고 날카 로운지 추격을 계속해 나간다.

    ‘아빠, 너무 추워요.’

    아이는 몸을 벌벌 떤다. 헤지고 얇은 옷과 마차의 얇은 벽은 겨울 숲의 한기를 막아내지 못한다.

    ‘이리 오너라. 더 꼭 안으면 나을 게다.’

    아이는 너무나 추워, 아빠의 솜옷 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더욱 숨이 막혀 괴로웠다.

    ‘아빠, 배가 너무 고파요.’

    얼마나 흘렀을까.

    벌써 며칠째 굶주린 아이는 처음으로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이 사악한 마왕이 내 아이에게 시련을 주는구나! 저리 물러나지 못할까!’

    아이는 아버지의 입김에서 빵 냄 새를 맡으며 그것으로 배고픔을 달랬다.

    그때.

    벼락이 쳤다.

    가우왕의 피아노가 폭발적으로 터지며 말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아버지를 표현하던 첼로와 아이를 그리던 블러드 와인이 동요한다.

    베이스와 파이어버드마저 연주를 멈추고 잠시간의 정적.

    숨 가쁘게 따라오던 관객들은 그 잠깐의 시간으로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마차 문이 끼이익 섬뜩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빠는 아들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외쳤다.

    ‘물러나지 못할까! 이 아이는 내 것이다! 내 것이야!’

    첼로가 질러대는 악에 뒤이어 다 니엘 홀랜드의 베이스가 천천히 음계를 높여 왔다.

    아빠의 솜옷에서 간신히 고개를 돌린 소년은 깜짝 놀라고 만다.

    문밖의 마왕은 날개가 여덟 장, 뿔이 네 개 꼬리는 셀 수 없이 갈라져 있었다.

    마왕이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첼로는 콘트라베이스의 연주에 필사적으로 대응했으나 아이는 마성에 이끌리고 있었다.

    추위에 떨었던 탓인지 자꾸만 마왕이 내민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 졌다.

    마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린 아이는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놈! 어딜 가려 하느냐! 너는 내 것이다! 내 것이야!’

    ‘하, 하지만.’

    아이는 마왕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간절했다. 너무 추워 자꾸 만 눈이 감기려 했다. 손발이 얼어 아팠다.

    마왕은 다시 한번 말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마, 마왕님은 어째서 그렇게 따 뜻한 거예요?’

    ‘이 녀석이! 말하지 마라! 듣지도 마라! 마왕이 잡아간다!’

    아빠의 다그침에 깜짝 놀란 소년 은 문득 고개를 든다.

    그곳에는 따뜻한 솜옷을 입고 입 에서 구수한 빵 냄새를 풍기는 살 찐 남자가 있었다.

    소년의 마음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블러드 와인의 음색이 변모하기 시 작했다. 가냘프고 여린 목소리에 의 심이 담겼다.

    ‘아빠는 어째는 따뜻한 옷을 입고 있어요?’

    ‘아들아, 속지 마라! 마왕의 속삭 임에 귀기울여선 안 된다!’

    ‘아빠, 저도 빵 먹고 싶어요.’

    ‘이곳만 벗어나면 배불리 해주마. 조금만 참아라.’

    ‘아빠, 너무 아파요. 놔주세요.’

    ‘마왕이여! 결국 내 아이를 홀리고 말았구나! 아들아, 속지 마라. 속으면 안 된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마왕을 본다.

    여덟 장의 흉악한 날개와 네 개의 창과 같은 뿔 징그럽게 꿈틀대던 꼬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소년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빠를 보았다.

    포근했던 솜옷은 짐승의 가죽으로, 빵 냄새를 풍기던 입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났다.

    아이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 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혹독히 불어닥치던 파이어버드의 바람이 일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바람이 되었고 벼락처럼 울리던 피아노는 이슬처럼 떨어졌다.

    마왕의 위용을 과시하던 콘트라 베이스는 그 어떤 목소리보다 중 후하고 자비롭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다니엘 홀랜드와 나윤희가 같은 음을 연주하며 어울리자, 첼로가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그 녀석은 내 것이다!’

    그러자 콘트라베이스가 단호히 외쳤다. 묵직한 소리를 뿜어내며 호통쳤다.

    ‘치졸한 마귀야, 이 아이는 네 것 이 아니다. 감히 탐하려 들지 마라.’

    소년은 마왕의 품에 안겨 온기를 느끼며 잠에 빠진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그의 낡고 해진 옷이 비단으로 바뀐 것도 모른 채 잠든다.

    프란츠 페터가 지휘봉으로 가로 선을 그으니 모든 악기가 마지막 음을 내며 조용히 안식에 들어갔다.

    ㄴ 와 개미쳤닼ㅋㅋㅋ

    ㄴ 수준 미쳤네 진짴ㅋㅋㅋ

    ㄴ 배도빈 제자라더니 이름값 하네.

    ㄴ 듣는 내내 소름 돋았다.

    ㄴ 진짜 전율이다. 전율. 배도빈 이 후로 이렇게 서사성 강한 곡은 처음 이었음.

    ㄴ 참가자들 놀란 거 봐. 다들 어이 없어 하는 것 같은데?

    ㄴ그럴 만하지. 이건 슈베르트의 마왕이랑도 비교할 만 함.

    ㄴ 오바 1_ 1_ 그 정도까진 아님.

    심사 위원들은 말을 잃었다.

    ‘이것을 정녕 열여섯 먹은 아이가 만들었단 말인가.’

    ‘맙소사. 믿을 수 없군.’

    그들은 배도빈이 왜 그렇게 우려 했는지, 걱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란츠 페터의 관악 7중주 A단 조, ‘마왕’은 놀랍도록 완벽한 서사를 갖추고 있었다.

    전개와 발전부를 이어가는 능력 은 탁월했고 각 악기의 역할도 분 명하였다.

    제2바이올린의 아래서 그를 보호 하던 첼로가 전개를 바꾸었을 때는 최고의 지휘자 다섯 사람마저 놀라고 말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혼란스러 웠다.

    배도빈이 제자를 들였다는 이야 기는 들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배도빈이 새로운 장르를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곡이 연일 발표되고 있었지만 배도빈이 이룩한 새로운 풍조를 벗어난 경우나 발전시킨 경 우는 없었다.

    한동안, 아니, 또 다른 천재가 나 타나지 않고서는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푸르트벵글러는 배도빈이 이룩한 세계관 안에서 더욱 발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를 발견하고 말았다.

    배도빈이 왜 프란츠 페터에게 집 착하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구나. 참으로 놀라워.’

    다른 심사 위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사카모토 료이치는 프란츠 페터의 곡을 들으며 그가 하루빨리 성장해 주길 바랐다.

    ‘완벽하진 않다. 도빈 군처럼 처 음부터 완성되어 있진 않아. 하지 만. 하지만 정말 믿을 수 없군.’

    사카모토 료이치는 배도빈을 처 음 알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만 3세의 배도빈은 이미 그때부터 완 성되어 있어, 사카모토는 그와 함께하길 바랐다.

    프란츠 페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원석이 이제 막 자기 색을 찾아가는 단계였다.

    저것이 온전히 세공되면 대체 얼 마나 큰 빛을 발할지, 아름다울지

    상상할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네.’

    사카모토 료이치는 가능하다면 자신도 프란츠 페터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어떻게 깎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그에게 좀 더 여러 가능성을 보여 주고 싶었다.

    심사 위원들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참가자들도 충격에서 벗어나 기 시작했다.

    프란츠를 배도빈의 보조로만 생 각했던 파울 리히터와 니아 발그 레이는 진정 놀랐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베를린 필하모닉에 또 다른 후계자가 준비되 고 있었단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설레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마왕의 제자라더니.’

    한편 아리엘 얀스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배도빈이 지향하는 음악은 명확히 달랐는데, 배도빈은 서사성이 뚜렷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프란츠 페터 역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선명했다.

    아리엘은 프란츠의 곡에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마왕이 사퇴한 것은 아쉽지만 이 대회는 저 아이와 겨루게 되겠어.’

    단한 번의 연주로 아리엘은 프 란츠 페터를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 했다.

    추구하는 음악성도 대비되었다.

    배도빈, 프란츠와 달리 아리엘 얀 스는 색채감에 비중을 두었다.

    소리의 본연에 충실하여 그만큼 듣기 편안하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잘 정제되어 보다 순수한 음악에 가까웠고 아리엘 얀스는 이미 그러한 음악에 정점을 바라 보고 있었다.

    ‘마왕과의 대결 이전에 좋은 상대가 되겠어.’

    그는 지휘할 때의 박력은 사라지고 다시 수줍어하는 프란츠 페터를 보며 적의를 불태웠다.

    ‘……그러고 보니.’

    그러나 그러다 문득 진달래의 충고를 떠올리곤 가슴속에서 피어오 르는 호승심을 가라앉혔다.

    심사 위원 마리 얀스가 마이크를 들었다.

    “잘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놀랍군요. 수준을 놓고 말하 면 최고는 아닙니다만, 천부적이군요.”

    마리 얀스가 악보를 살펴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전개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습니다. 여기 있는 배도빈 지휘자에 게 제대로 배운 것 같군요. 아직 다듬을 곳이 있습니다만 분발한다 면 그와 같은 흡입력을 가질 잠재 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나 선 명한데, 혹시 곡을 쓸 때 생각한 이야기 같은 게 있을까요?”

    “아, 네, 넵!”

    긴장한 프란츠 페터가 말을 더듬 으니 나윤희가 슬며시 소년의 등을 쓸어주었다.

    뒤에 함께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덕에 프란츠는 긴 장을 덜어낼 수 있었다.

    “어, 어렵게 살았거든요. 먹을 것 도 없고 춥고. 덥고.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어요.”

    소년은 두서없이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허투루 듣지 않았다.

    “나쁜 거 알면서, 이상하다는 거 알면서도 너무 배고파서. 그래도 가끔 빵을 주니까 그래서 믿었어요. 고아원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런 데 가면 동생과 떨어질 거라 했어요.”

    “나쁜 어른들이요?”

    “……네.”

    프란츠가 심사 위원석에 앉아 있는 배도빈을 보았다.

    “그때, 그때 도빈이 형이 와주셨어요. 저는, 저는……

    감정이 격해져 결국 울먹이고 말았다. 심사 위원들은 어린 소년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 따뜻한 목소리랑 손이 너무 감사해서. 이, 이 곡으로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프란츠 페터가 배도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배도빈은 뜻하지 않은 헌정에 기쁜 내색을 감추려 애썼다.

    브루노 발터가 나섰다.

    “감정을 아주 잘 담아냈습니다. 다음부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도 잘 표현할 수 있게 노력하시 길 바랍니다. 합격 드리겠습니다.”

    브루노 발터에 이어 사카모토,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까지 전원 합격 의사를 밝히자.

    프란츠 페터가 배도빈에게 뛰어 들었다.

    배도빈이 난감해하면서도 흐뭇해 하는 모습이 중계되며 ‘거장의 선 택’ 두 번째 방송은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떨어져! 콧물 묻잖아!”

    “어헉허컹허합.”

    “떨어지라고!”

    한참을 실랑인 끝에 프란츠가 겨우 진정했고 배도빈은 프란츠의 눈물과 콧물, 침이 묻은 외투를 벗었다.

    프란츠가 그것을 얼른 낚아챘다.

    “세, 세탁해 올게요!”

    “버려.”

    “그, 그러면 너무 죄송해서.”

    배도빈이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으로 손짓하자 프란츠 페터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 얼굴이 밝았다.

    ‘해냈어. 해냈어!’

    첫 번째 과제를 통과했을 뿐이지 만 프란츠 페터는 다섯 거장에게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화장실. 화장실.’

    프란츠는 배도빈의 옷을 빨기 위 해 화장실을 찾다가 한 사람과 마주쳤다.

    레이라였다.

    소년은 어색해하며 그에게 인사 하곤 지나치려 했는데, 레이라가 품에서 흰 장미를 꺼내 그에게 향 했다.

    “어……. 왜, 왜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말을 못 한다는 설정을 해두었기에 아리엘 얀스는 묵묵히 백장미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호, 혹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프란츠는 혹시나 싶어 물었고 ‘레 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 번 더 물었다.

    “왜……

    이유 없이 물건을 받는 게 위험 하다고 생각하는 프란츠는 잔뜩 경계했다.

    아리엘이 핸드폰을 꺼내 텍스트를 적어주었다.

    [멋진 곡이었어.]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란츠가 ‘레이라’의 호의에 거듭 감사하곤 백장미를 받아 화장실로 향했다.

    ‘예쁜 것만 아니라 마음도 상냥한 분이셨어.’

    프란츠는 더 없이 행복해했고.

    진달래로부터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들은 아리엘 얀스는 해야 할 일을 마친 자신에게 뿌듯해하며 세트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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