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35화
95. 수수께끼의 천재와 지옥에서 올라온 비올리스트(1)
곧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침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나카무라 이데의 불평에 히무라가 웃고 말았다.
“미안. 시차를 생각 못 했네. 잘 지내나 싶어서 연락했지.”
나카무라가 기지개를 켜곤 답했다.
-잘 지내지. 어젠 요코랑 산책도 했어. 무려 5분이나 걸었다고.
“5분이나? 신기록이잖아!”
히무라가 격앙되어 되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기쁘게 들려, 나카무라도 신나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지긋지긋한 휠체어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벗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감회에 젖은 그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하반신이 마비된 지 10년.
나카무라 본인조차 포기하고 있을 무렵, 그는 배도빈에게 빈 의과대학의 신기술을 소개받았다.
신경 치료 및 연결에 탁월한 성과를 보이던 빈 의과대학은 진달래에게 신경 반응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의수를 만들어 주었으며, 몸 왼쪽에 마비가 온 니아 발그레이를 정상 생 활이 가능한 정도로 치료하였다.
배도빈으로서는 당연히 나카무라 이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빈 의과대학에서는 더 늦기 전에 검사와 진료를 받 으라 권유했고 배도빈은 곧장 이러 한 사실을 나카무라에게 알렸다.
그는 망설였다.
치료와 재활에 들어가면 전 일본 클래식 음악 조합장으로서의 활동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회복 가능성이 떨어진대요.’
‘후임자는 찾으면 될 일이야.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대체 뭘 걱정하는 거야? 2, 3년 공백이 있다고 무너질 것 같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못 했을 일이야. 정 신 차려. 마지막 기회라잖아.’
배도빈과 사카모토 료이치, 히무라 쇼우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격 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일본 클래식 음악계는 여전히 과거 타락한 일본 클래식 음악 협회와 새 롭게 결성된 전 일본 클래식 음악 조합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나카무라는 고 민을 거듭했고 전처 와타나베 요코 덕분에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자의식이 강한 거야 아니면 본인을 과대평가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 면 당신 말고 이 나라 사람 모두 바보라고 생각해?’
‘요코••••••
‘정 불안하면 둘 다 하면 되잖아 왜.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아? 당신 다리랑 협회 중에 하나 포기하는 건 쉽고?’
쉬울 리 없었다.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뇌물과 청탁, 매수로 점철되어 있던 일본 음악계가 처음 맞이한 투명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양쪽 모두 포기할 수 없으니.
재활과 함께 일 처리를 하는 데 따라오는 고통과 피로 따위, 얼마든 지 감내할 수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다치기 전이었다면 당연히 그리 생각했을 터인데.
나카무라는 저도 모르게 나약해진 자신을 탓하고, 예전 모습을 떠올리 게 해준 와타나베 요코에게 감사했다.
신경을 되살리는 치료 과정에서 발 생하는 통증이 그의 허리를 베어낼 듯했다.
단지 일어서기 위해 하루에도 6시간씩 안간힘을 써야 했다.
몇 번이나 탈진할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다.
그러면서도 여러 음악가를 상대로 협회를 나와 조합원이 되기를 권하고, 돈과 권력으로 매수된 이들을 상대로 싸워나가야 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이 정도면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포기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조차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카무라는 의지를 다졌고 결국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 요코 덕이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친구의 말에 히무라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요코 씨랑은 언제 다시 합치는데?”
-무슨 소리야?
“분위기 좋잖아. 서로 오해도 풀었고 지금도 같이 살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던 나카무라도 히무라만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한데……. 한 번 헤어졌으니까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다 하더 라. 지금 이렇게 얼굴 보는 것으로 도 행복해.
나카무라가 화제를 돌렸다.
-요즘 도빈이는 어때? 이렇게 얌전히 지낼 녀석 아니잖아.
그는 매년 폭풍처럼 새로운 곡을 발표했던 배도빈이 좀처럼 활동이 뜸한 것을 우려했다.
“조만간 한 번 크게 터뜨릴 예정인 데, 너한테도 비밀이야.”
"뭐?
“재밌을 것 같으니까 기대하라고.”
히무라가 실실 웃었다.
가장 신뢰하는 동료이자 오랜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낀 나카무라는 괜 히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래, 뭐. 아,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
-너야말로 청첩장은 언제 보낼 생각이야? 미리미리 알려줘야 나도 일 정을 조절하지.
히무라가 당황했다.
“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갑자기는 무슨. 프러포즈 받아줬 다고 자랑한 지가 언젠데 갑자기래?
“급할, 급할 필요 없으니까.”
-설마 아직 날짜도 안 잡았어? 생 각 잘해라. 너 같은 아저씨 좋다고 해주는 사람 선영 씨밖에 더 있냐.
오랜 망설임 끝에 확신을 가지고 한 프러포즈를 박선영이 기쁘게 받아주었지만, 히무라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여러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박선영은 이미 북미 시장의 수완가로 알려져 하루에도 수십 건의 제안을 받았고 매 분기마 다 커리어하이를 갱신해 나가고 있었다.
엑스톤 시절부터 엔터테인먼트 사 업의 큰손으로 알려진 히무라 쇼우가 뒷선으로 물러나고도 사업이 확 장될 정도였으니, 그 기세가 계속되 길 바랐다.
“아, 내 정신 좀 봐. 세탁기를 돌 려놓고 깜빡하고 있었네. 나중에 통화하자. 끊는다.”
—야, 야!
다급히 전화를 끊은 히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당황하여 은근히 알리려던 소식을 전하지 못했음을 깨닫곤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곧 알게 될 터니까.’
베를린 필하모닉의 비올리스트 나 카무라 료코는 제1회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부쩍 성장해 있었다.
비록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비올라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몸소 느꼈고.
찰스 브라움, 왕소소와 같이 비올라를 전문적으로 연주하지 않음에도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이들 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본인만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첫 단계였고 한 음악가가 발전을 거듭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찾아온 반가운 소식 에 그녀는 크게 기뻐했다.
나카무라 료코가 배도빈에게 악보를 받고 고개를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배도빈과 함께 음악 하기를 목표로 삼았던 그녀는 설마 그가 자신을 위해 곡을 써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위대한 음악가로 칭송받는 배도빈이지 않은가!
그에게 곡을 받은 인물은 사카모토 료이치, 가우왕, 찰스 브라움, 나윤희, 최지훈과 같이 빛나는 인물뿐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고 머리가 새 하얗게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말을 해야 하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그저 악보를 꼭 쥔 채 배도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악보를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선은 배도빈을 향해 고정 된 채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했다.
“뭐 화나는 일 있어?”
“아니!”
배도빈은 손으로 원을 그리며 누가 봐도 화난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치켜 올라간 눈썹과 이글거리는 눈, 힘이 들어간 손과 당장 뛰어들 것만 같은 자세까지.
무엇부터 언급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에 료코는 혹시라도 배도빈이 마음을 바꿀까 싶어 다급히 진심을 표현했다.
“기뻐! 기쁘다고! 완전 날 것 같은 데!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도하게 씩씩하여 씩씩대는 것처 럼 보이는 료코를 보며 배도빈이 웃었다.
왕소소, 나윤희, 진달래와 어울리며 전과 달리 많이 솔직해졌다고 생각 했는데 너무나 큰 기쁨을 맞이해 본 래 성격이 드러난 듯했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라, 그녀를 이해하고는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베트호펜 기념 콩쿠르라고 들어본 적 있어?”
“사카모토 선생님하고 세프가 심사 위원 맡는다는 정도로. ……아, 웃고 떠드는 밴드도 참가한다고 들었어.”
겨우 진정한 료코가 차분히 답했다.
이름 정도만 들어봤다는 말에 배도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거기 참가할 곡이야. 일주일 뒤에 녹음해서 넘길 예정이니 오늘부터는 팀 연습 빠져서 그것만 준비하면 돼.”
료코는 배도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래 콩쿠르 참가를 꺼리기도 하고 더욱이 전 세계 모든 이가 그를 찬 양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배도빈이 그러한 대회에 참가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내 곡이라는 걸 밝히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 너도 아는 척하지 말고 누가 물어보면 대충 모르는 척해.”
더더욱 배도빈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료코가 물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뭔데?”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여 대충 넘겼다.
“이름을 숨겨도 성공하나 궁금해서.”
대충 둘러댄 이야기였지만 그의 오 랜 팬이었던 나카무라 료코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혹시 신경 쓰고 있는 건가.’
A108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달 전만 해도 배도빈 유일의 오점이었던 A108은 최지훈을 일약 스타덤에 합류시키며 2025년 하반 기 최고의 곡으로 급부상했다.
료코는 배도빈이 A108의 경험을 빗대어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진정한 도전을 하는 거라 여겼다.
‘그런 곡을 연주할 사람으로 날......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배도빈이라는 음악가에게 곡을 받는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해내고 싶었다.
저명한 평론가로 알려진 엄마와 전 일본 클래식 음악 협회장으로서 분 투하는 아빠의 영향을 받았던 노력 가 나카무라 료코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좋아. 그리고 이거.”
배도빈이 서랍을 열어 가면을 꺼냈다.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게임 시리즈를 상징하는 악마 형태였는데 그 기괴한 모습에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뭐야?”
“본선에 오르면 실연도 치러야 해. 그때 써.”
“나까지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이건 좀……
“대회 기간에는 너도 나도 활동 중 단할 텐데 네 얼굴이 알려지면 의심 받을 거 아니야. 끝나면 공개할 예
정이니까 그 전까지만 참아.”
나카무라 료코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배도빈이 건네준 악마 가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