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31화 (43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31화

94. 라이징 스타⑴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조 심스럽고 따뜻한 아르페지오가 루트 비히 홀을 가득 채웠다.

시선을 건반에 고정한 최지훈의 입 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A108을 연주하면 엄마에게 안겼을 때가 생각났다.

잊혔던 감정이, 잊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 마음이 특유의 꼼꼼한 타건과 어울려, 나비의 단단한 소리와 함께 선명히 전해진다.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

젊은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비롯 된 음표들이 마치 문자처럼 전달되었다.

오늘만큼은 정장이 아니다.

최지훈은 지금까지와 같이 잘 재단 된 옷을 입히지 않았다.

작곡가 배도빈이 만든 A108은 노

트와 노트 사이의 간격이 여유로워 연주자가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했다.

최지훈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곡에 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부여했다.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가 좋아했던 상아색 스웨터를 기억하며 나비에게 입혔다.

화려한 장신구는, 트릴은 필요치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때의 행복과 그것을 추억하는 기 분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배도빈은 최지훈이 마침내 정체성을 찾았음을 오늘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알 수 있었다.

이미.

가우왕과 같이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기술적으로 최지훈이 이르 지 못한 영역은 없다시피 하였다.

남은 것은 자아.

숙련된 연주자와 거장을 구분하는 확고하고 호소력을 지닌 그만의 정 체성.

투쟁의 상징 배도빈처럼.

세상을 멸시하며 군림하는 가우왕

처럼.

최지훈은 그만의 옷으로 관객들을 품었다.

피아노의 경쾌한 멜로디가 이어지는 가운데,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를 시작했다.

퍼즐처럼 최지훈의 연주를 단단히 잡아주는 듯한 어울림.

곡을 만들면서, 17개월을 기다리면 서 최지훈은 이렇게 연주할 거라고 생각했던 배도빈의 상상 그대로.

최지훈은 배도빈이 선물한 A108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몸에 딱 맞으면서도 적당한 긴장을 주고 그러

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옷.

이렇게 나비와 같이 즐겁게 놀아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도리어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옷.

‘좋다.’

무슨 일을 해도 부드럽게 받아주는 엄마와 같은 곡.

솔직하고 대범해질 수 있었다.

‘뭐야, 이게.’

앞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의 장대함에 압도되었던 관객들이 어느새 웃고 있었다.

‘너무 귀엽잖아.’

너무나 귀엽고 포근했다.

방금 그 격렬하고 웅장한 곡을 연주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A108은 아기자기했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불안하고 어두운 멜로디가 나와도 이내 전환되는 분위기를 반복하며, A108이라면, 저렇게 밝은 연주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저 응원할 뿐.

화려하거나 격렬한, 비장한, 자극적 인 음악에 노출되었던 관객들은 배도빈이 이런 곡을 만들었단 사실에 놀라는 동시에.

최지훈이 날개를 되찾은  사실에 기뻐 했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나풀거리는 나비는 언제 다쳤냐는 듯, 관객들 사이를 누볐다.

두 번째 제자가 마침내  경계를 넘어섰음을 확인한 스승은  눈물을 흘렸고.

어린 벗의 고독을 우려했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그에게 정말 훌륭한 친 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배도빈이 없는 피아노계에 서 군림하고 있는 남자는 도전자의 기량을 확인하곤 미소 지었다.

감히 어느 누구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던 사자를 향해 날아든 나비는 그저 해맑은 날갯짓으로 사자를 희 롱했다.

앞발을 아무리 휘둘러도 나비는 유 유히 빠져나갔고.

사자는 이내 나비를 쫓는 걸 포기 하곤 그의 왈츠를 보며 엎드렸다.

이내 나비가 사자의 콧잔등에 앉았다.

연주는 이제 종반부에 이르렀다.

최지훈은 부드럽게 타원을 그리는 배도빈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감이 온전히 사라져 있었다.

너무나 어두워서 배도빈밖에 보이 지 않았는데, 하늘에 이르자 밤하늘 에 수없이 많이 펼쳐진 별을 볼 수 있었다.

은하수.

서로 색도 밝기도 형태도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네 집이었구나.’

나비와 함께 어울리는 백여 대의 악기들. 빛나는 악기들. 그것을 연주 하는 사람들.

최지훈은 배도빈이 왜 오케스트라 에 미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롭게 보였던 그가 진정 행복해 보였고 멀리서 찾아온 자신을 진정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던 소년과.

동떨어져 있던 별 모두 찬란히 빛 나는 별들 사이로, 그들의 노래와 어울리며 마음껏 춤췄다.

최지훈이 마지막 노트를 연주하며 오늘의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첫 번째 곡을 마쳤을 때의 격렬한 환호는 없었다.

그러나 천천히 번져나가기 시작한 감동의 물결을 이루는 수많은 박수 소리에 순수한 감격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차채은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끄으억억엉꺼허으억.”

감동을 받아 눈물을 훔치던 진달래는 그녀가 갑자기 곡을 하는 바람에 당황하고 말았다.

“야, 야, 왜 그래.”

“꺽어허억. 훙어어억. 저흑둔팅이가 꺽 힘 들학어 도흡내 색 흐으응도안하고 끄읍맨날혼꺽 혼자울고끕맨날끕. 허 어어어엉.”

“뭐라는 거야.”

진달래가 손수건을 꺼내 주곤 차채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최지훈. 성공적인 복귀!]

[감동적인 연주가 루트비히 홀을 채우다]

[세계를 미소 짓게 한 피아니스트]

【아름다운 자태의 황금 피아노, 최지훈을 위해 스타인웨이가 제작]

【최지훈 복귀 무대. A108 순간 동 시 시청자 1,100만 명 기록!]

【라이징 스타! 복귀와 동시에 기록을 세우다!]

【최지훈, “오늘 공연으로 제 위치를 알았습니다.”】

[배도빈. “만족한다.]

【크리스틴 지메르만. “더는 가르칠 게 없습니다. 그는 이미 저와 가우왕과 같은 무대에 서 있습니다.”]

[사카모토 료이치, “매우 성숙한 연주였습니다.”】

[가우왕, “내가 더 잘한다.”]

【니나 케베리히, “완전 멋있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그는 달 라지지 않았다. 본래 그런 사람.”】

[평론가 차채은, “끄흡허어억헝." 감동으로 말을 잇지 못해]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 최지훈 의 복귀 무대는 크나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존 클래식 음악 팬들은 편안하고 달콤한 그의 연주에 향수를 느꼈고.

최근 몇 년간 배도빈, 가우왕과 같이 격렬하고 화려한 연주에 열광했던 클래식 음악 팬들은 소리가 내는 온전한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상기 해 보는 시간이었다.

ㄴ 가우왕 인터뷰 진짜 도랏ㅋㅋㅋ

ㄴ 어떻게 들었냐는 질문에 자기가 더 잘한다고 대답하는 거 뭔뎈ㅋㅋ

ㄴ 진짜 미쳤다. 최지훈이 원래 이렇게 잘했나?

ㄴ 차채은이 누구?

ㄴ 신기하네. 어떻게 17개월을 쉰 사람이 이런 연주를 하지?

ㄴ 저 정도 되는 연주자들은 실제 연습보다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하던데.

ㄴ 그것도 손이 움직일 때 말이지. 1년 이상 건반에 손도 못 댔던 사람이 그런 게 가능하겠냐?

ㄴ ㅇㅇ. 감 되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ㄴ 히익. A108 실황 녹음된 디지털 앨범 3일 만에 10만 개 팔렸대.

ㄴ 배도빈이 만든 곡 중에서 유일하게 망한 거였는데 최지훈 버프 오지네.

ㄴ 나도 샀어. 진짜 힐링 받는 기분이라 안 살 수가 없었음.

ㄴ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듣다보면 실실댐.

ㄴ 이번 공연에서 하나 느낀 게 있는데 진짜 연주자에 따라 곡이 바뀐다는 거야.

ㄴ 맞아. 작년 퀸 엘리자베스 결승 전에서 니나 케베리히가 연주했을 때는 뭐랄까 캉캉 같은 느낌인데 오늘은 미뉴에트 같았음.

크리스틴 지메르만, 사카모토 료이치, 배도빈 같은 거장들의 극찬 속에서 A108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실황 앨범 판매량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고 그것은 곧 ‘배도빈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의 순위에 반영되었다.

배도빈의 유일한 실패작을 재조명한 것이 팬덤의 마음에 크게 작용하였다.

1st 베를린 필하모닉(32.0%)

베를린 환상곡(11.6%), 베토벤 교향곡 운명(10.5%), 드보르자크 교향곡 신세계로부터(9.9%)

2nd 최지훈(18.1 %)

배도빈 피아노 협주곡 C장조, A10 8(18.1%)

3rd 나윤희 (15.2 %)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잠자는 숲 속의 공주(7.8%), 스트라빈스키 불 새 (7.4%)

4th 가우왕(12.4%)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9.1 %), Dobean,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 주곡, 태풍(3.3%)

5th 사카모토 료이치(11.5%)

Honor'd 0.5%), 악마의 축복(1.0%)

해당 앙케트 결과에 팬들은 역시 ‘콩을 차지하라’의 심사위원을 맡을 자격이 있었다고 반응했고.

“장난해!”

최지훈에게 밀려 4위에 랭크된 가우왕은 눈을 부라리며 새로고침 버 튼을 반복해 눌렀다.

“내 연주 나온 지 1년이 지났어 2 년이 지났어! 8개월밖에 안 되었는 데 그새 밀렸다고!”

극도로 분노한 가우왕은 헤실대는 최지훈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양호한 편이었는데, 이제 아예 순위에서 누락되어 버린 찰스 브라움은 숨이 넘어갈 지 경이었다.

‘콩을 차지하라’에서 3점을 받았던 치욕이 바로 어제 같은데 연이어 순 위에서도 밀리니 그의 자존심이 용 납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서고 말았다.

찰스 브라움은 무엇이 문제인지 고 민했고 그 결론은 너무나 당연했다.

최근 그의 활약이 없었던 것.

실력이 부족할 리 없기에 찰스 브라움은 부상으로 인해 활동이 어려웠던 것만을 이유로 여겼다.

게다가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퍼스트 피아니스트 경연이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팬들과 언론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지는 뻔했다.

“뭔 수를 내야 해.”

가장 좋은 방법은 배도빈이 찰스 브라움을 위한 곡을 만들어 그것을 성공적으로 연주하는 일이었지만, 최근 올림픽 주제곡과 대교향곡 작 업에 매진 중인 그가 시간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찰스 브라움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과 같은 고민을 마누엘 노 이어 수석에게 털어놓았다.

“이게 뭐야? 배도빈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가?”

마누엘 노이어는 생전 처음 보는 앙케트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투병으로 인해 수척해진 찰스 브라움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너 찌질하다, 찌질하다 듣더니 진짜 찌질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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