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30화 (430/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30화

93. 가장 빛나는 별(7)

여명을 열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이 재개되었다.

전쟁터와 떨어진 수도의 아침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마음에 싹튼 불안은 자꾸만 고개를 내민다.

오보에가 나서서 그들을 위로한다.

피아노와 어울려 여명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포근히 끌어안는다.

‘이것이다.’

배도빈은 그가 구상했던 그림이 그 려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짧은 시간 내에 너무도 훌륭히 따라와 주었고 최지훈은 긴 기다림을 달래듯, 과거 그 어떤 때보다 근사했다.

‘나의 오케스트라.’

이러한 앙상블을 바랐다.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 비로소 현실이 되었음을 느꼈다.

고독했던 마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과거.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루트비히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극 히 일부였다.

마음을 준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타인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에게 현실은 절망이었고 인간은 배신과 타락을 일삼는 추악한 존재였다.

망나니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형 제를 방치해 결국 병들어 죽게 했다.

어머니를 잃은 상처 탓에 다시는 그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던 루트비히는 가족만은 지켜내려 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쏟아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루트비히가 가족에게 애틋 했던 만큼, 그의 가족은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첫 번째 동생 카스파는 루트비히의 악보를 무단으로 팔아댔다.

루트비히가 지정했던 출판사와의 계약을 무산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뒷 돈을 챙겨 다른 곳과 몰래 계약했다.

동생을 때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그는 결국 동생을 용서했다.

그러나 카스파는 상냥한 루트비히를 이용하고 무시할 뿐이었다.

루트비히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판 이 좋지 않던 여성과 결혼하였으며 끝내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병들어 죽었다.

카스파의 아내는 가산을 탕진하고, 외도를 일삼았다.

그런 부모 아래서 카스파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를 방치할 수 없었다.

동생이 남긴 마지막 부탁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기나긴 법정 싸움 끝에 카를의 양육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카를은 끝끝내 루트비히를 따르지 않고 자살을 기도, 서로에게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두 번째 동생 요한은 나폴레옹이 벌인 전쟁을 틈타 적국에게 약을 팔아 큰돈을 벌어들인 매국노였다.

한때 곤궁했던 루트비히는 동생 요 한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했는데, 요한은 형 루트비히에게 돈 버는 법 좀 배우라며 비아냥거렸다.

어머니를 잃은 상처 때문에 누구보 다도 가족을 지키려 했던 루트비히였으나 그에게 가장 가혹했던 이는 두 동생이었다.

주변 인물들도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은 루트비히를 구속하여 자 신의 뜻대로 부리려 했다.

출판사, 음악가, 평론가 등은 어떻게든 루트비히의 유명세를 이용하고 자 하였다.

루트비히는 조금씩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간혹 선망했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존경했던 하이든의 가르침 에 회의를 품었고 열렬히 사랑했던 괴테에게 실망했으며 영웅으로 칭송 했던 나폴레옹에게 분노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뿐일까.

루트비히를 이용하려던 이들은 그 가 죽은 뒤, 그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는 루트비히 가 남긴 400여 권의 필담집을 챙겨 비싼 값에 팔아먹고, 나머지 260여 권은 태워먹었다.

루트비히와 관련한 자신의 거짓이 들킬까 두려워, 그 소중한 기록을 말소하였다.

조국에서는 광기에 눈이 먼 자들이 루트비히의 이름을 내세워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인을 학살하고 다녔다.

자유와 환희를 노래했던 루트비히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

신분과 나이, 약속과 배신, 열망.

끝에는 이별뿐이었다.

함께한 사랑의 맹세는 더 없이 소중한 듯했지만 결국 아무짝에도 쓸 모없는 일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에게 있어 타인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사랑이란 일시적인 감정.

연민은 하찮은 일.

타인은 거리를 둬야 하는 존재.

믿을 것은 오직 음악과 그것을 행 하는 자신뿐.

상처 입은 음악가는 스스로를 보호 하기 위해 견고해졌으며 오랜 세월 다져진 탓에 타인을 배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순수한 영혼은 끝끝 내 행복이 올 거라 믿으며, 각자의 삶 속에서 투쟁하는 모든 이를 위해 노래했다.

현실이 가혹하게 매질할 때마다 스 스로를 지키기 위해 고난 끝에 비로 소 환희를 맞이하리라는 믿음으로, 신념으로 버텼다.

고독한 싸움이었다.

어쩌면 절망 속에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신념만큼이나 강렬히, 영혼을 지배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면서 야수와 같던 그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어쩌면 갈망하던 환희를 맞이한 것은 아닐까.

실로 그리 생각했다.

처음은 어머니와 아버지였고 두 번 째는 바로 등 뒤에서 피아노를 연주 하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배도빈은 지금도 최지훈이란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야. 왜 그래?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좌절한 거야?’

모두 그랬다.

여러 음악가를 만났지만 대부분이 그에게 압도되었고 좌절하였고 끝내 시기하였다.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은 앞선 거장 들을 따라할 뿐이다.

복잡하고 난해하다.

청력을 잃었다는 말은 유명세를 얻기 위한 거짓이다.

그에게 사생아가 있었다.

매음하여 매독에 걸려 죽은 것이다.

모두 루트비히를 시기했던 이들이 만들어낸 거짓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너도 그런 사람이냐고.

‘천재가 정말 있었구나. 정말 있었어. 대단하다, 너.’

어린 탓일까.

최지훈은 질투하지 않았다. 시기하 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함께 피아노를 치고 여러 음악가에 대해 말하고 좋아하는 곡을 주제로 수다를 떨면서 시작되었다.

여전히 믿지 않았지만 조금씩 가까 워 졌다.

믿고 싶기도 했지만 배도빈은 알고 있었다.

이 순수한 관계도 최지훈이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깨어질 거라고.

자신이 음악을 하면 할수록 두 사람은 동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애써 미래를 부정했다.

‘좋아. 내년에 안 나갈게. 5년마다 있다고 했지? 6년 뒤에 나가면 되겠네.’

‘싫어.’

‘고집 부리지 마. 너 지금 무리하 고 있어. 이렇게 안 해도 몇 년 뒤 면 분명.’

‘아는 척 말하지 마!’

‘약속했잖아!’

‘콩쿠르에서 서로 봐주지 말자는 거라면 나중에 해도.’

‘네가 콩쿠르에 나갈 이유가 되어 준다고. 내가 약속했잖아!’

‘힉. 힉. 끄윽. 약속했잖아아. 왜 까 먹은 거야아아앙.’

사실.

콩쿠르에 나갈 이유 따위 필요 없었다.

음악을 하는 데 수상이력이 필요하 다면 따내면 그만이었다.

그에게 콩쿠르는 그저 그런 정도, 하찮은 일이었다.

다만, 언젠가 최지훈과의 관계가 깨질 거라 생각했던 배도빈은 애써 그것을 부정하며 어린아이를 달래려 했을 뿐이었다.

너무나 달콤하고 편안한 순간이었기에 그것이 깨질 것을 알면서도 잠 시나마 보존하고 싶을 뿐이었다.

같이 콩쿠르에 나가자는 약속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만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누구보다도 진실되었다.

함께하자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최지훈도 자신을 시 기할 거라 생각했던, 더는 상처 받 기 싫어서 쌓았던 강철벽을 무너뜨 리고 말았다.

함께 음악을 하자는 말을.

터무니없이 어린, 까마득히 어린 녀석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때부터 배도빈은 최지훈을 진정 자신의 형제로 여겼다.

매일 16시간 가까이 연습하고 끝내 무리해서 실신하고 그러고도 웃는 최지훈을 보며 구원받았다.

그 순수함.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배도빈부터 차채은, 니나 케베리히, 가우왕까지.

최지훈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상의 괴물들을 곁 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녀석은 웃었다.

슬럼프가 와서 스스로 한계를 직시했을 때도 녀석은 웃었다.

끝내 한계를 넘어섰다.

겨우 넘어섰는데,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목 놓아 울었다.

배도빈과 차채은 앞에서 방실방실 웃고, 뒤돌아 그의 침대 위에서 몇 날 며칠을 울었다.

그러나 다시 웃었다.

칠흑 같았던 배도빈의 가슴에 그의 부모가 낮을 가져다주었다면, 최지훈은 가장 어두운 밤을 지키는 별이었다.

지금 이렇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연주를 하지 않는가.

시간이 흐르고 방향을 잃어도 언제 나 짙은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 만 찾으면 되었다.

그곳에 그가.

별이 있었다.

‘좋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끝내고 최지훈이 숨을 골랐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무대의 긴장 감이 그를 설레게 했다.

관객들이 보내는 박수는 피로조차 잊게 하였다.

나비에게 옷을 입혀, 그녀가 런웨 이를 걸어 객석으로 향하면, 그래서 관객들이 기뻐하면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저 뒷모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해냈어.’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십 년도 더 전에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 무렵.

최지훈은 엄마가 그리웠다.

상냥했던 목소리도 포근했던 가슴 도 햇살 같은 미소도 사랑이 담긴 잔소리도 이제 더는 느낄 수 없음을 알아가던 시기였다.

엄마가 그리워서 붙잡고 있던 피아노를 엄마가 들어주지 못하면서, 피아노도 싫어졌다.

착하다고 얌전하다고 친구들에게 친절하다고 칭찬받는 것도 싫었다.

실은 영재 학원에 있는 아이들을 덜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고 배 웠기 때문이지, 어린애들과 어울리 기 싫었다. 유치했다.

신동이라고 천재라고 불리는 것도 싫었다. 부담스러웠다.

아빠가 좋아해서 그런 말을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랬는데.

한 아이를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음악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알았다.

받아쓰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말을 해댔다.

알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최지훈은 배도빈이야말로 진짜 천재라고 생각했다.

부러웠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지만 배도빈과 함께라면 어쩌면 자신도 천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먼 곳에 있었고 최지훈은 도무지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저 하늘 멀리 있는 별과 같은 존 재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반짝이는 빛이 너무나 선명했기 때 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천재라는 이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더 이상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칠흑 같았던 시기였기에, 배도빈은 유일한 빛이었다.

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별과 친해져 있었다.

평생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 생각 했는데 별이 놀러와서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너무나 먼 곳에 있어서 자 세히 볼 수 없었던 별은 보석처럼 예쁘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상처투성이였다.

수없이 많은 충돌로 크고 작은 크 리에이터가 나 있었다.

별은 외로워하지 않았다.

흉터를 부끄러워하지도 감추려 하 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음악을 할 뿐이었다.

최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장막 같은 하늘에서 빛나던, 유일 한 희망이었던 별이 사실 외롭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을 위로해 준, 나아갈 길을 알 려주었던 별은 가끔 놀러왔다가 다 시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생기면 그때 생각해 볼게.’

별은 최지훈의 전부였던 콩쿠르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자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를 왜 싫어하는지 당시의 최지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친구가 없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정말 비슷한 사람이 생기면 콩쿠르에 나갈 거야?’

‘뭐……

‘내가 그렇게 될게. 그러니까 언젠 가 꼭 함께 콩쿠르에 나가자.’

강하고 멋지지만 상처 많고 쑥스러 움도 많은 별이 외롭지 않게.

놀러올 때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그리로 가고 싶기에.

외로웠던 소년은 그 어떤 일을 겪 어도 다시 일어나.

최고의 무대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와 함께, 그에게서 헌정 받은 곡을 연주 할 수 있었다.

솔미미 파레레.

단순한 멜로디를 시작으로.

은하수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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