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29화 (42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9화

    93. 가장 빛나는 별(6)

    2025년 9월 26일 금요일.

    피아니스트 최지훈의 복귀 소식에 유럽 클래식 음악 팬들이 집결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 일대는 언론사에서 나온 이들까지 더해져 북적댔고 이제는 익숙해진 교통마비를 겪고 있었다.

    “와. 우리 주차하는 데만 두 시간 걸렸어.”

    “그러니까 내가 버스 타고 오자고 했잖아. 공연 있을 때마다 번잡한 거 알면서.”

    “에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기분 풀어. 마왕과 최의 공연이라고.”

    팬들은 젊고 유망한 피아니스트에 게 찾아온 안타까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유년 시절을 그린 영화를 비롯하여, 어렸을 적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 최지훈이었기에 팬덤의 대부분이 삼촌이나 이모와 같은 마음으로 그를 응원했었다.

    때문에 지난 1년 5개월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고 그런 만큼 오늘 무대를 기대하였다.

    “팸플릿 받았어? 순서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랑 배도빈 피아노 협주곡. 복귀 무대부 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몰라.”

    “이제 완전히 나았겠지. 연초에 가우왕에게 선전포고까지 할 정도로 자신 있어 했잖아.”

    “하긴. 세 개의 피아노를 위한 소 나타를 듣고도 그런 말을 했으니까. 아, 기대된다.”

    “좀 아쉬운 게 배도빈이랑 친분이 있는 건 알지만 배도빈 C장조 피아노 협주곡은 뭐랄까. 그저 그렇던 데.”

    “헌정받은 사람이 연주하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걱정 마. 내가 베를린 필하모닉 실연만 스무 번 넘게 다녔는데 단 한 번도 실망한 적 없음.”

    콘서트홀을 찾은 팬들이 기대감을 키워가며 입장하는 사•이, 오늘만을 기다렸던 피아니스트는 신경을 날카 롭게 세우고 있었다.

    “허허. 정말 안 가도 괜찮으냐.”

    “봐서 뭐 해요. 전 먼저 가 있을게요.”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연주 전 에 배도빈, 최지훈을 만나 보자는 스승 사카모토 료이치의 제안을 거 절했다.

    이내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엘리자베타는 스승과 떨어져 콘서트홀로 향했다.

    기자들이 스승에게 몰려 있는 터라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걸음을 서둘렀는데 기어이 한 기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최지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리스텀 지의 기자 사라 제인이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씨! 잠시 만요! 리스텀지에서 나왔습니다!”

    엘리자베타가 고개를 돌렸다.

    인파를 뚫고 나온 그녀가 너무나 필사적으로 보여, 엘리자베타는 예 의를 갖춰 대했다.

    “안녕하세요.”

    사라 제인이 기쁜 듯이 웃으며 인 터뷰를 진행했다.

    “라이벌 최지훈 피아니스트의 복귀 무대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라이벌……

    엘리자베타가 사라 제인의 말을 반 복했다.

    그녀가 최지훈에게 경쟁심을 가진 것과는 무관히, 어떤 언론도 최지훈 에게 항상 밀렸던 엘리자베타를 그 의 라이벌로 언급하지 않았다.

    “네! 라이벌!”

    적당히 대하려던 엘리자베타는 자 신을 알아주는 듯한 말에 이끌려 성 실히 인터뷰에 응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량을 되찾았는지, 지난 17개월의 공백을 채웠는지 확인하려 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생긴 문제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그가 잘 극복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그라면 해낼 겁니다.”

    엘리자베타는 현재 최지훈이 어떤 지 몰랐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직은 어쩌 면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수준에 부 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라 기자의 말처럼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1년 이상 연주를 중단해야 했고, 그 감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믿었다.

    최지훈이라면 시간을 필요로 할 뿐, 분명 해낼 거라고.

    자신을 항상 이겨왔던, 자신보다 항상 한 발씩 앞서 나갔던 남자라면 거기서 포기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믿음이시네요. 한 가지 더. 이제 약 네 달 뒤에 펼쳐질 베를린 필하모닉 퍼스트 피아니스트 공개 오디션에 참가하실 의향 있으신가요?”

    사라 제인은 확신했다.

    최지훈이 출전하기로 약속된 오디션에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나서 지 않을 리 없었다.

    작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지훈이 자진 하차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상을 거부한 사람이었다.

    최지훈을 향한 엘리자베타의 호승 심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런 그녀가 최지훈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데 무관심할 리 없었다.

    ‘지금 최지훈 눈에는 가우왕밖에 안 보일 테니까.’

    사라 제인은 목표로 하는 남자가 자신을 보지 않는 걸,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타가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출전합니다. 최지훈뿐만 아니라 가우.”

    “오! 바비잖아.”

    엘리자베타가 포부를 밝히려던 때 목까지 내려오는 밝은 금발이 아름다운 여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또 한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 니나 케베리히.

    사라 제인의 눈이 순수한 욕망으로 반짝였고 엘리자베타는 못 볼 사람 이라도 본 듯 인상을 썼다.

    “작년에 보고 처음이네? 잘 지냈어? 지금도 귀엽네!”

    “반갑게 인사할 정도로 우리가 친 했나요?”

    “지금부터 친해지면 되지? 콩쿠르 도 같이 했잖아, 바비.”

    “……멋대로 부르지 마세요. 바비 가 아니라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입니다.”

    “어려워. 애칭으로 하자.”

    “싫어요. 그리고 자꾸 아이 대하듯 이 말씀하시는데 저 당신이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요.”

    “정말? 이렇게 작은데?”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눈썹이 꿈틀댔다.

    “니나 케베리히 씨! 리스텀지의 사 라 제인입니다. 툭타미셰바 씨와는 어떤 사이인가요?”

    “아무 사이 아닙니다.”

    “동료? 라이벌?”

    엘리자베타와 니나가 동시에 대답 했다.

    니나는 잔뜩 서운한 듯 울상을 지었고 엘리자베타는 그녀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다.

    “저랑 당신이 라이벌이라고요?”

    “우리 아무 사이 아니라고?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 서운하게.”

    엘리자베타는 진지하게 되묻는 니 나 케베리히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 절레 젓고는 콘서트홀로 향했다.

    “도망갔네.”

    니나 케베리히가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툭타미셰바 씨를 라이벌로 여긴다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인터뷰 대상을 놓친 사라 제인은 오늘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피아니스트에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니나 케베리히가 단호히 답했다.

    “피아니스트니까 당연히 동료고 라 이벌이죠. 다들 누가 더 멋진지 노 력 하잖아요.”

    그리고 막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 가우왕을 이길 지도 신경 쓰고 있으니까.”

    전 세계 클래식 음악 팬들의 관심 이 집중된 가운데, 베를린 필하모닉이 무대에 올라섰다.

    콘서트홀을 찾은 이들은 지난 일주 일간의 강행군으로 독기가 오를 대 로 오른 B팀 연주진의 아우라를 느 낄 수 있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어느새 선배 A 팀과 같은 풍모를 갖추기 시작한 B 팀의 성장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오케스트라 대전 전만 하여도 완전히 신생 악단이었거늘.

    이제는 정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었다.

    ‘복도 많군.’

    사카모토 료이치는 진정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부러웠다.

    이렇게나 훌륭한 제국을 이루고 가 장 멋진 음악가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니 배도빈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은 여러 음악가 중에서 유일하게 그를 독점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백여 명의 젊은 연주진까 지 데리고 있으니, 사카모토는 아주 잠시 과거 빈 필하모닉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배도빈과 최지훈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들은 두 천재 음악가를 열렬히 맞이했다.

    어느덧 성인이 된 두 사람을 보며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감개무량했고 동시에 그들의 시대가 황혼을 맞이했음을 느꼈다.

    오늘은 저 두 사람이 다시 걷기 시작하는 날.

    조금이라도 더 멀리, 그 모습을 담고 싶었다.

    최지훈이 피아노 앞에 앉았고.

    배도빈이 포디움에 올랐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자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장내를 채워나갔다.

    기대, 흥분, 설렘, 긴장.

    그 어떤 소리마저 없이 고요히.

    관객들은 약속된 환희를 기다릴 뿐 이었다.

    타종.

    최지훈이 건반을 눌렀다.

    처연한 종소리가 노을 끝에서 울려 퍼진다.

    한 번, 두 번 이어질 때마다 밤이 다가오고 있음을, 운명이 초래했음을 알리는 듯하여 관객들은 가슴을 졸인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 단조 1악장.

    피아니스트 최지훈은 있는 힘껏 무 게를 싣는다.

    종소리의 간격이 조금씩 짧아지고.

    그 소리가 점차 가까이 들리는 듯 하다.

    이내 온전히 이르렀을 때.

    배도빈이 지휘봉을 들어 장중한 아 르페지오와 함께한다.

    연이은 침략으로부터 위기를 맞이 한 제국의 성에서 황자는 희생된 군인들을 달래려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를 지키 기 위해 기꺼이 창과 방패를 든 이들.

    출정을 앞두고.

    피아노는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병사들을 그린다.

    그러나 추억하는 시간마저 허락되 지 않았다.

    턱없이 짧은 행복했던 순간 뒤에 오케스트라가 나선다.

    장면이 전환되고.

    피아노는 한 부부를 비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 아들을 걱정하

    는 부부는 아이가 어렸을 때를 추억 한다.

    젖을 달라며 보챌 때도, 열병을 앓 던 때도 알 수 없이 칭얼거릴 때도.

    그 모든 피로를 단 한 번의 미소 로 잊게 해주었던 아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

    처음 걷기 시작하고, 엄마라 불리 고, 서툰 글자를 보여주고, 품을 떠 나 친구를 데려오고 웃으며 노래했던 아들을 떠올리면 부부는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아들을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 아들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다치진 않았을까. 힘들진 않을까. 괜찮을 거야. 왜 내 아들이 희생해 야 해? 차라리 날 데려가. 제발 살아 있는지만 알아봐 주세요. 추울 텐데 이 옷만이라도 제발 전달해 주 세요.

    명예로운 전쟁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는 부부만은 그 럴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와 그 끝에 이르러서는 절망뿐.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가열차게 다가온다.

    매일 아들이 떠났던 방향을 바라보던 부부는 저 멀리 지평선에서 가까 워지기 시작한 기수와 깃발을 발견 했고.

    그 순간 희망에 찬 1악장이 끝났다.

    적막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아주 작은 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저 피아니스트 최지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남긴 진한 심상만이 가슴 속에 스며들어 이다음 악장만을 바 랄 뿐이었다.

    압도적인 호소력.

    믿을 수 없는 표현력이었다.

    피아노가 첫 서주를 어떻게 연주하는지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 곡 2번은, 최지훈에 의해 새로운 이 야기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옷으로 풀어졌다.

    제자의 복귀 무대를 기대했던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고.

    사카모토 료이치는 놀라워했다.

    가우왕은 팔짱을 낀 채 만족하였고 니나 케베리히는 부상 입기 전보다 훨씬 정제된 연주에 기뻐했다.

    ‘공백은?’

    그의 라이벌 엘리자베타 툭타미셰 바는 진정 오늘의 연주가 1년 이상 공백이 있던 사람의 연주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1년 5개월 전의 기량 이라도 되찾았길 바랄 뿐이었던 엘 리자베타의 바람이 무색하게.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러시아 의 풍모를 표현했다.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엘리자베타가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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