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28화 (42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8화

    93. 가장 빛나는 별(5)

    사카모토 료이치는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리엘 얀스는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자기 앞의 생.’

    아리엘 얀스는 사카모토가 넘긴 책을 다시금 들여다보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렸다.

    ‘에밀 아자르.’

    작가 에밀 아자르는 ‘새들은 페루 에 가서 죽다’, ‘새벽의 약속’, ‘하늘의 뿌리’로 유명한 소설가 로맹 가 리의 또 다른 필명이었다.

    ‘로맹 가리.’

    로맹 가리는 일찍이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 공쿠르 등 여러 문학상을 차지하였으며, 그의 소설은 항상 평단 과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그가 남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 화도 여럿 제작, 개봉될 정도로 로맹 가리는 문학성과 대중성을 갖춘 몇 대문호였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20세기 초, 전쟁의 광기는 유대인 출신의 모자(母子)가 살아남기에 너무도 가혹한 환경이었다.

    ‘너는 기필코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그 척박한 삶 속에서도 로맹 가리 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항상 꿈을 심어주었다.

    그 덕분일까.

    큰 꿈을 꾸었던 소년은 어렸을 적 부터 자신했던 대로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복잡한 가족사와 역사의 거대한 움 직임 속에서 그는 이혼을 경험했고 더불어 노년에 이른 그는 평단으로 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 했다.

    ‘고루하고 진부하다.’

    과거 대문호였던 남자는 자신을 향 해 날카롭게 서 있는 평단의 펜촉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맹 가리는 끝났다.’

    ‘그의 문체는 고루하기 짝이 없다.’

    로맹 가리는 괴로워했고 조금씩 대중들도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 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때마침 비교하기 알맞은 인물이 대두되었으니.

    신원미상의 천재 작가, 에밀 아자 르가 발표한 ‘자기 앞의 생’.

    얼굴도 나이도 국적도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의 존재는 로맹 가리를 향한 비난을 더욱 가속 시켰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

    ‘새롭고 기발한 언어.’

    ‘로맹 가리는 이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

    고루하고 진부한 로맹 가리.

    획기적이고 천재적인 에밀 아자르.

    심지어 대문호 로맹 가리가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를 표절한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모순으로 점철된 비난 속에서도 로 맹 가리는 끝끝내 자신이 에밀 아자르란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 ‘연(Les cerfs-volants)’조차 평단과 대중에게 주목 받지 못하였고 그렇게 그는 이혼한 아내가 자살을 기도한 지 1년 뒤 1 980년 12월,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이후 다시 1년 뒤.

    그의 유작과 유서가 발표되고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 인물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문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단 한 번의 중복 수상을 인정하지 않았던 권위 있는 문학상, 공쿠르를 한 사람이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사례였으며.

    로맹 가리에게 혹평을 쏟아냈던 평론 가들의 뒤통수를 폭격한 사건이었다.

    대중들은 놀랐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글을 쓰는 로맹 가리가 그 누구보다도 기발한 글을 쓰는 천재 에밀 아자르란 사실에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스캔들은 지금까지도 여러 평단을 비판하는 사례로, 로맹 가리라는 비극적 인물에 대한 초상으로 회자 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아리엘 얀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름을 숨기고 활동하란 말씀이십 니까?”

    사카모토 료이치가 빙그레 웃었다.

    “마음에 안 드는가?”

    “이름을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아리엘 얀스는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었다.

    당당하고 싶었다.

    굳이 편법을 사용하여 결백함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신념을 걸고 맞서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도 이별했다.

    토마스 필스가 남긴 말을 따라 조언을 구하긴 했으나 아리엘 얀스는 사카모토 료이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카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을 존중하네. 강요할 생각도 없지. 그저 하나 묻네만.”

    “음악가 아리엘 얀스는 무엇에 기 인하는가?”

    아리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음악입니다.”

    그리고 대답과 동시에 사카모토 료이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 이시군요.”

    음악가는 음악으로 자신을 대변한다.

    그것만이 진리.

    자신의 음악으로 활동한다면 지칭 하는 단어가 그 어떤 것이든 중요치 않았다.

    이름에 현혹되어서야 그가 혐오하는 평단과 다를 바 없었다.

    “로맹 가리가 말했네. 얼굴 없는 작가의 책 속에는 내 기존 책과 정 확히 일치하는 감수성, 문장과 표현, 인물들이 나온다. 그러나 소위 평론 가들 중에 누가 그것을 읽어냈는가? 라고.”

    아리엘 얀스는 그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로맹 가리가 살아생전 남긴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자네가 싸울 방법은 음악뿐일세.”

    사카모토가 식은 차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굳건한 자아로 마음껏 노래하게. 그들이 아리엘 얀스라는 음악가를 향해 모순된 비난을 한다 해도 자네 의 음악을 이어가게나.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세. 본인을 지키는 일이지.”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사카모토 료이치가 웃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아리엘 얀스를 향해 그가 애 써 웃음을 참으며 이야기했다.

    “껄껄껄. 그리고 상상해 보게나. 얼 마나 통쾌하겠는가.”

    ‘특이한 분이시군.’

    아리엘 얀스는 사카모토 료이치가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마에스트로 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지하지만 막혀 있지는 않다.

    클래식 안에서도 고전과 낭만, 현대, 뉴에이지 등 여러 시대와 장르를 다루고.

    팝, 록, 재즈, 포크, 블루스 등 여러 음악을 소화하는 그의 음악성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이런 분이라 믿으셨군요.’

    아리엘 얀스는 그제야 토마스 필스 의 뜻을 이해하고는 앞으로 자신이 어찌 행동할지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결단이 섰을 때 고개를 숙였다.

    “고견 감사합니다.”

    “껄껄. 별말을. 실은 나도 이름이 여러 개거든.”

    사카모토 료이치의 고백에 아리엘 얀스가 깜짝 놀랐다.

    “이름은 음악 이전에 이미지를 구축하지. 왜, 베토벤도 제목을 붙이기 싫어했다고 하지 않나.”

    “당시 음악가들 대부분 그랬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참으로 어려운 것이야. 제목으로 의미를 명확히 할 수도 있지만 제약이 되기도 하지. 오해를 낳기도 하고. 그저 음악이 음악으로서 존재 할 수 있다면 좋겠네만. ……우리 같은 음악가들에게는 평생의 과업이 될 테지.”

    선명한 심상과 온전한 전달력 그리 고 작곡가와 청자의 공감을 기반으로 한 대화.

    그것이 작곡과 연주, 감상이란 과 정 속에서 고스란히 가능하다면 그 것이야 말로 온전한 음악.

    완벽한 음악이지 않을까.

    세상 모든 음악가가 추구하는 완벽 한 음악이란 그런 것이지 않을까.

    그 생각에 깊이 공감한 아리엘 얀 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도빈 군과도 비슷한 담화를 나눴던 것 같군.”

    사카모토 료이치가 배도빈을 언급 하자 아리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왕 말씀이십니까.”

    “껄껄. 그렇네.”

    그 반응이 재밌어서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야기를 계속 풀어나갔다.

    “알다시피 도빈 군에게 여러 별명 이 있지 않은가. 자네가 방금 말했다시피 마왕이라든가.”

    예의 바른 아리엘 얀스는 배도빈을 진짜 마왕으로 여겼지만 굳이 대선 배의 말을 끊어내진 않았다.

    “어느 날 도빈 군이 그러더군. 그런 별명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쁜 이야기는커녕 도빈 군을 칭송 하는 별명뿐이었으니 의아했지. 그 래서 물었네. 왜 싫으냐고.”

    사카모토가 찻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오만상을 쓰며 말하더군. 그런 말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고. 도리어 규정할 뿐. 그때 도빈 군의 나이가 아마 10살쯤이었을 텐데, 껄껄. 참으로 신기하지.”

    배도빈이 일찍이 오래 전부터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는 말에 아리엘 얀스는 입을 다물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제는 식다 못해 차가워진 차를 마시며 아리엘에 게 시간을 주었다.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아가 확고했군요.”

    사카모토 료이치가 빙그레 웃었다.

    옹졸한 사람이라면 배도빈의 발언을 그저 오만하게 여길 것이고 평범 한 사람이라면 배도빈이니까 할 수 있는 말로 생각할 터였다.

    그러나 아리엘 얀스는 배도빈의 생각을 관통하여 그가 ‘나를 수식하는 단어는 오직 배도빈이라는 이름뿐이다’라는 말로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을 이해하였다.

    “그러네. 음악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지. 자아. 정체성. 그 것을 음악으로 전달하길 바라기에 계속 힘낼 수 있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사카모토의 말에 이미 각오를 다진 아리엘 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 믿음직하군.”

    사카모토가 시계를 보았다.

    “이런. 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어떤가. 함께하세.”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나도 즐거우니 부탁하는 걸세.”

    사카모토 료이치가 주방으로 향했고 아리엘 얀스도 그를 돕기 위해 따랐다.

    음식을 준비하고 접시를 닦는 사이.

    문득 사카모토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있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흐는 우주를 말했고 모차르트는 인간을 노래했으며 베토벤은 그 자 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었다는 말 말일세.”

    “더글라스의 말이로군요.”

    “음.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더글라 스의 말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 만 적어도 베토벤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네.”

    “그의 곡들은 호소력이 짙어 공감 하기 쉽습니다.”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어찌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남들이 좋아 할 수 있단 말인가. 안 그렇나?”

    아리엘이 처음으로 웃었다.

    사카모토의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과정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가의 정체성이자 고유 함이며 동시에 상업성을 갖췄다는 말이었다.

    마치 로맹 가리처럼.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던 이야 기를 베토벤은 그 당시 이미 답을 내렸던 것 같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심상을 사색을 통해 솔 직하고 쉽게 풀어낸다. 정말로 멋진 일이지.”

    “마왕과도 같군요.”

    “마왕? 아, 도빈 군 말인가. 흐음. 확실히 그렇군. 껄껄. 우리 모두 그렇지만 말일세.”

    우리 모두 그렇다.

    천재 아리엘 얀스는 비로소 이해받는 듯하여 그를 괴롭히던 여러 말 사이에서 조금씩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느끼는 안도감은 그 어 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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