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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27화 (42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7화

    93. 가장 빛나는 별(4)

    베를린 필하모닉은 2025년 9월 26 일로 예정된 특별 공연을 위해 정규 일정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배도빈 피아노 협주곡 C장조, ‘A108’을 준 비하는 데 할애했다.

    개인 연습을 마치고 처음 합을 맞추는 날.

    악단주이자 상임 지휘자 배도빈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깐깐하고 엄 격하게 단원들을 이끌었다.

    배도빈이 지휘봉을 내리자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를 중단하였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고 충분히 음을 표현하도록 하세요. 안단테로 가죠.”

    다시금 연주가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이번에는 좀 더 진행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배도빈이 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바이올린과 첼로는 트리플 포르티 시모. 피아노 등장에 앞서 존재감을 확실히 하죠. 다시.”

    “악센트. 악센트 유의합니다.”

    “악센트를 주라고 했지 빨라지라 하지 않았습니다. 음이 충분히 전달 되도록 합니다. 다시.”

    “오보에는 주제를 이끌고 있어요. A108에서 피아노만큼 중요한 역할 입니다. 지금 그대로라면 문제가 생 길 거예요.”

    “오보에 빠릅니다. 음음음음 정도로 가죠.”

    끊임없이 쏟아지는 지적에 베를린 필하모닉 B팀은 정말 오랜만에 한 계를 맞이한 듯했다.

    합동 연습이 끝나고.

    섹션별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단원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전 빈 필하모닉 오보에 부수석이자 현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오 보에 수석 진 마르코는 영혼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뛰어난 여러 오보이스트 중에서도 유독 특출했던 그로서는 배도빈에게 이렇게 혹독히 지적당한 적이 처음 이었는데, 그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벌리고 초점 없는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마르코 수석이 오늘처럼 지적받은 적이 있었나?”

    “아니. 처음이야.”

    “넋 나간 거 봐.”

    “지금 마르코 수석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우리도 고쳐야 할 부분이 산더미인데.”

    “하. 속 탄다. 시원한 맥주 한 잔

    생각나네.”

    그때 가우왕이 최지훈이 연습에 나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습실을 찾았다.

    “뭐야. 없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배도빈과 최지훈은 보이지 않았고 전투라도 치른 듯 죽어가는 단원들만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 왜 이래?’

    가우왕이 특히나 심각해 보이는 진 마르코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고 있어?”

    “야.”

    가우왕이 한 번 더 부르자 마르코 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가우왕 씨.”

    “무슨 일인데 다들 죽어가?”

    진 마르코가 허탈하게 웃었다.

    “새 레퍼토리 준비하고 있거든요.”

    가우왕은 B팀이 피아노 협주곡 C 장조, ‘A108’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떠올리곤 의아해했다.

    오케스트라 대전 전에는 한심한 모 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 B팀

    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악단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A108이 표현력이 중요시되는 곡이 라고는 해도 이들이 소화하지 못할 곡은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서요. 어떻게 외우기는 했는데 표현이 까다로워서 어렵 네요.”

    “그래? 어떤데?”

    진 마르코가 짧게 연주를 들려주니 가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마르코의 연주는 평소와 같이 훌륭했다.

    어중간한 연주자는 3일 만에 악보를 외우지도 못했을 테고 그와 같이 연주하는 건 불가능했을 터.

    다만 배도빈과 진 마르코가 바라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름값은 하네.’

    가우왕은 역시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이라 생각하며 악보를 보았다.

    잘 정리된 악보의 몇몇 부분에 배도빈의 코멘트를 메모해 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긴 좀 까다롭겠네.”

    “네. 제일 벅찬 부분인데 호흡이 딸린다는 느낌은 처음 받아요. 그러니까 저도 모르고 자꾸 빨라지고.”

    진 마르코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호흡을 좀 남기면……. 길 게 가기 힘들겠지. 그렇다고 안 하자니. 아아아악.”

    가우왕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 다가 마르코의 등을 토닥였다.

    “원래 피지컬이 딸리면 머리가 고 생하는 법이야. 열심히 고민하라고.”

    효과적으로 연주하기 위해 호흡을 배분하는 일은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일인데 피지컬이 부족하면 고 생하는 법이라니.

    진 마르코는 당장 반박하려다가 가우왕이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피아니스트 라는 걸 떠올렸다.

    ‘진짜 피지컬 문제인가.’

    확실히 폐활량이 더 좋았다면 크게 문제 될 구간이 아니었다.

    토라진 마르코 곁으로 스칼라가 다 가왔다.

    스칼라는 가우왕을 위아래로 훑고는 능숙한 독일어를 입에 담았다.

    “너 잘났다.”

    일부 단원이 통쾌하여 웃었고 가우왕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잘났지. 그럼 고생하라고.”

    가우왕이 연습실을 나서자 한 단원 이 마르코에게 다가왔다.

    “가우왕 씨가 그동안 왜 미움받았는지 알 것 같아요.”

    20대 때부터 건방진 행동으로 음악계 원로들에게 ‘깊이가 없다’, ‘교 만하다’, ‘예절이 없다’ 등과 같은 혹평을 받고 그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마다 가우왕에게 학을 떼는 이 유를 알 것 같았다.

    “피아노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그럴싸한데?”

    다른 악기와 달리 피아니스트는 학생 때부터 혼자 활동하는 시간이 압 도적으로 길었다.

    필연적으로 다른 악기와 자주 어울려야 하는 여러 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릴 정도로 독립적이었으니 프로 무대에 서도 실력과 인지도만 갖췄다면 혼 자 활동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덕분에 모든 피아니스트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주로 내성적 이거나 혹은 가우왕처럼 안하무인으로 나뉘었는데.

    혈액형 미신과 같이 음악을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공감하는 흔한 이야기였다.

    그때 직원 여덟 명이 연습실로 들어섰다. 모두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는데, 음료와 쇼트케이크 등이었다.

    직원이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 쉬는 시간이죠?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지쳐 있던 단원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몰려든 단원들이 커피와 간식을 나눠 받았다.

    “어. 여기 비싼 곳인데.”

    베를린의 유명 바리스타와 파티시 에가 콜라보로 공동 운명하는 매장의 물건이었다.

    일반 가격보다 월등히 비싼 탓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는데 맛을 보니 확실히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당근 케이크 맛있는데?”

    “혼나느라 목이 탔는데 마침 잘됐네. 시원해. 시원해. 여기처럼 얼음 넣어서 파는 곳 좀 많아졌으면 좋겠네.”

    단원들은 음료와 디저트를 즐기며 배달까지 해준 직원들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보스가 주는 거예요?”

    “고생한다고 보너스 준 모양인데?”

    “아뇨. 가우왕 씨가 사신 거예요. 다들 연습하고 있을 테니 나눠 먹으라고.”

    직원이 전달한 말에 단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웃으며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 나쁘긴 해도 이런 점은 괜찮은 사람 같아.”

    “맞아. 사람이 어떻게 장점만 있어.”

    “좋은 사람이었네.”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게 되면서 최근 부쩍 바빠진 사카모토 료이치는 오랜만에 휴가를 냈다.

    최지훈의 복귀 무대를 관람하기 위함이었는데, 배도빈과 최지훈이 이 번에는 또 어떻게 감동을 줄지 기대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만들어 빅 히트를 쳤던 동요를 흥얼거리며 짐을 챙겼다.

    “엉덩이 닮은 복숭아. 복숭아 닮은 원숭이 얼굴〜 원숭이 얼굴 닮은 엉 덩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카모토 료이치의 이마에 땀이 송 골송골 맺히기 시작할 때 초인종이 울렸다.

    방문 예정인 사람이 없었기에 사카모토는 의아해하며 현관으로 나섰다.

    “얀스 군.”

    기분 좋게 문을 여니 생각지 않은 손님이 그에게 인사했다.

    “연락도 없이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가르침을 청하고자 무례를 무릅 쓰고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시게.”

    사카모토 료이치는 팔을 한쪽 가슴에 대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아 리엘 얀스를 안으로 들였다.

    사석에서는 첫 만남이나 오랜 지기 마리 얀스의 손자이며 동시에 뛰어 난 음악가인 그가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사카모토가 차를 권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조부께선 건강하신가.”

    “네. 제 걱정을 하시느라 여러모로 신경 쓰고 계신 것 같지만 건강하십니다.”

    사카모토가 차로 목을 축였다.

    “흐음. 기사로는 접했네. 로스앤젤 레스 필하모닉도 자네도 너무나 큰 것을 잃었어. 혹 그와 관련된 이야 기인가?”

    “그렇습니다.”

    “허허.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만. 어디, 편히 말씀하시게.”

    아리엘 얀스가 사카모토를 바로 보 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사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를 변호하다 보니 상황은 점점 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리엘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언론, 평단과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전달하였다.

    명료하게 정리된 이야기를 듣고 난 사카모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었군. 조부께서는 뭐라 말씀하셨는가.”

    “직접 나서려 하시기에 말리느라 고생했습니다.”

    “껄껄껄. 그 점잖은 양반이 화를 냈다니. 자네 사랑이 끔찍했나 보군. 잘했네.”

    사카모토 료이치는 화를 내는 마리 얀스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토마스 필스 경이 타계하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지휘자로서 힘들 때가 온다면 마에스트로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네게?”

    “ 네.”

    아리엘 얀스가 고개를 숙였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관객들을 되찾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사카모토 료이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젊은 음악가를 안타깝게 바라 보았다.

    비록 오늘 처음 대면하나 손자 자 랑이 지극한 마리 얀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었기에 사카모토는 가슴 이 아팠다.

    음악만이 있던 그에게 로스앤젤레 스 필하모닉과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은 구원이었을 터.

    모든 걸 잃은 남자는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그저 정중히 부탁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애써 무시하고 있을지.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작은 희망이 라도 있는지 묻고 싶었다.

    장고 끝에 사카모토가 입을 열었다.

    “음악가는 음악으로 말하는 법이지.”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카모토의 말처럼 아리엘 얀스의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의 이정표였던 토마스 필스가 경 애하는 사람이었고, 존경하는 할아 버지와 나란히 살아 있는 전설로 추 앙받는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이었기에 아리엘 얀스는 눈을 빛냈다.

    “역시 그뿐이군요.”

    아리엘은 긴 싸움을 각오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팬들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리라 생각해 왔지만 그것을 거장에게 확인받아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지. 하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쩌면 평생을 다해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럼 안 되지. 껄껄. 유망한 음악 가가 그런 일에 힘을 낭비하면 손해 일세.”

    사카모토 료이치는 아리엘을 배도빈의 좋은 라이벌로 생각할 만큼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아리엘의 음악은 마치 모차르트와 같아서 정돈되어 있고 고상하며 그 속에서 돌출되는 천재적인 발상이 듣는 이를 즐겁게 하였다.

    “문학을 좋아하는가?”

    “좋아합니다.”

    “오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어.”

    사카모토 료이치가 서재로 향하고 잠시 뒤 책 한 권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낡은 책을 아리엘에게 권했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의 이름을 확인한 아리 엘 얀스는 프랑스의 고독했던 천재 소설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싸우려거든 적의 의표를 찔러야지 않겠는가?”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껄. 재밌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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