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26화 (426/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6화

93. 가장 빛나는 별(3)

다음 날.

긴급 소집된 미팅 자리에서 악단주 배도빈이 추가 공연을 바란다는 소 식을 접한 단원들은 아연실색하였다.

단 한 번도 연주해 보지 않았던, 심지어 들어보지 못한 단원도 있는 곡을 내일 무대에 올리자는 말을 납득할 리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나. 헛소리가 들리네.’

‘난청이 심해졌나 봐. 어떡하지.’

단원 중 일부가 귀 언저리를 만지며 청력을 걱정했고 일부는 몹시 당 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도빈이 물었다.

“왜들 그래요?”

“왜 그러긴!”

단원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애초에 하루 만에 준비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맞다! 폭력이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배도빈의 노력으로 마침내 사람다 운 삶을 보장받은 노예들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30분 분량의 곡을 단 하 루 만에 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찌어찌 외운다고 해도 합을 맞추는 건 별개의 일.

더군다나 A108은 서정적인 분위기 로 표현력이 중시되는 곡이었다. 연주만 한다고 해서 베를린 필하모닉 이 지향하는 완성도 높은 연주가 가능할 리 없었다.

“그래요?”

배도빈이 아쉬운 듯 펜을 내려놓고 순순히 항의를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죠.”

결사항전을 각오했던 단원들은 배도빈의 태도를 의아하게 여길 수밖 에 없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이상으로 꽉 막힌 그가 이렇게 순순히 고집을 꺾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 뭐야.’

‘이렇게 쉽게?’

‘ 이상한데.’

그러나 그들의 보스는 그저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쉽다.”

배도빈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길게 내쉰 숨은 너무도 미약하여 쉬이 흩어지고 말았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항상 고집스럽고 집요하며 간혹 무자비했던 배도빈에게 익숙해진 단원 들은 생전 처음 보는 배도빈의 슬픈 표정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단원들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그렇게 충격인가?”

“최하고 각별했잖아. 보스 입장에선 오래 기다렸을 테지.”

“그게 저렇게까지 슬퍼할 일이야?”

“A108이 잘 안 되긴 했잖아. 계속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그래도 하루 만에 준비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너무 슬퍼하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이자벨 멀핀은 조금씩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당황했다.

“당장 내일은 무리더라도 최대한 빨리 준비하자고 해볼까?”

“그래. 3주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단원들의 격렬한 항의로 공연 일정을 미룰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했는데, 단원들 사이에서 동정론이 퍼 지고 있었다.

‘더 노련해지셨어.’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는 전 혀 다른 방식이었다.

그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다른 의견을 묵살했다면 배도빈은 단원들이 스스로 납득하도록 하였다.

찰스 브라움에게 휴가를 약속하고 왕소소에게 디저트를 주었던 것처럼 당근을 주며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여태껏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슬퍼하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단원들을 홀리고 있었다.

왕소소가 나섰다.

“도빈.”

배도빈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단원들끼리 합의한 내용을 읊었다.

“3주 뒤에 하자. 다들 노력한대.”

왕소소의 뒤에서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빈은 그들을 둘러보고는 작게 웃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그러고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고 다 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는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낙엽이 지네.”

다시 긴 한숨.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보스 가 아니었다. 마치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듯, 지금이 아니라면 안 된다는 듯 애절해 보였다.

왕소소가 물었다.

“빨리 해야 하는 이유 있어?”

“그냥요.”

배도빈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두 고 있었다. 모두 그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겨 답답해하는데 짧게 한 마 디 덧붙였다.

“반응 안 좋았으니까.”

그가 남긴 말에 단원들은 그들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였다.

가장 그럴듯한 추론은 A108에 대 한 아쉬움.

피아노 협주곡 Al()8은 배도빈의 곡 중에서 유일하게 상업적 성공에 실패한 곡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승 무대라는 더없이 좋은 홍보처를 두고도 다른 여러 곡과 달리 반응은 미미했는 데, 평단의 고평가와 달리 팬들에게 서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단원들은 배도빈이 그러한 평가를 뒤집길 바랐고 헌정했던 최지훈이 낫기를 기다렸을 거라 생각하니 그 의 조급함과 아쉬움을 어느 정도 이 해할 수 있었다.

항상 성공만 해왔고 완벽주의자인 악단주에게는 유일한 오점이었으니 말이다.

한 단원이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 일주일 정도 뒤라면 괜찮지 않을까?”

“일주일은 말이 안 되지.”

“그래도 저렇게 슬퍼하는데. 사실 보스가 우리 배려 엄청 해주잖아. 이번에는 우리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평소에는 노력 안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사실 나도 그래. 매번 있는 일도 아니고. 보스도 강요만 하는 건 아 니니까. 일주일이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아, 미치겠네.”

“최대한 해보자. 사실 새 레퍼토리 준비하는 거 오랜만이기도 하잖아.”

“그래. 난 보스가 저렇게 슬퍼하는 거 처음 봐. 우리가 아니면 누가 달래주겠어.”

단원들이 소곤대는 이야기를, 인지 의 한계에 이른 청각을 소유한 배도빈이 놓칠 리 없었다.

‘기특한 녀석들.’

배도빈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단원들이 기특할 뿐이었다. 그들의 예측대로 Al()8은 그가 만든 여러 자식 중에서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헌정자 최지훈의 부상으로 녹음조 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실패한 곡이었다.

굳이 ‘배도빈의 곡’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수치.

배도빈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지휘하고 최지훈이 연주하면 실패할 리 없지.’

애초에 최지훈을 두고 본인이 직접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할 것을 상 정하고 만든 터라 배도빈은 여태 연주, 녹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녹음본이 있을 리 없었고, 현재로서 Al()8을 들을 수 있는 루트는 작년 퀸 엘리자베스 결승 무대 영상과 그 기념 앨범뿐이었다.

‘잊힐 만도 하지.’

직후 발표했던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와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A108의 아쉬 움을 가렸지만, 배도빈에게 있어서 심혈을 다해 만든 A108의 초라한 성적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최지훈이 예전 기량을 이른 시일 내에 회복하면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당장 내일 공연을 잡으라 했으나, 이성을 되찾은 그는 A108을 허 투루 무대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빠르고 완벽하게.

더 기다릴 수 없었고 또한 A108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던 탓에 단원들을 평소보다 더 끌어올려야만 했고.

그의 간악한 술수는 조금씩 통하고 있었다.

“난 몰라. 네 말대로 뭐, 매일 이 러는 것도 아니고. 보스 소원인데 까짓것 한번 해보자고.”

“3주는 필요한데……

“저기 좀 봐. 저게 평소 모습이냐 고. 그 콧대 높은 인간이 얼마나 신 경 쓰고 있었으면 저렇게 우울해하겠어.”

“맞아. 도빈이 성격에 화를 냈으면 냈지 저럴 리가 없잖아. 어지간히 심각한 거야.”

“마음고생 했겠지. 친구가 크게 아프고 자기 곡은 제 빛을 못 보고. 사실 보스 아직 19살밖에 안 됐잖아.”

“그래. 우리가 아니면 누가 위로해줘. 해보자.”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되자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한 한스 이안 악장이 나섰다.

“ 보스.”

배도빈은 한스 이안의 말을 들었음 에도 대꾸 없이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스 이안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알았어. 할게. 한다고.”

배도빈은 신중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스 이안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고는 무슨 뜻이냐며 물어보듯 눈썹을 모았다.

“해보자고. 당장 내일은 무리지만 어떻게든 빨리 준비하면 일주일 정 도면 될 거야. 멀핀 부장님, 그 정 도면 사무국에서도 괜찮죠?”

‘위험해.’

이자벨 멀핀은 이미 보스의 간교한 계략에 넘어간 단원들을 보며 위기를 느꼈다.

평소라면 한 달은 준비해야 할 일을 일주일로 당기다니.

그러나 슬픔에 빠진 보스를 위로하 기 위해 합심한 단원들의 훈훈한 분 위기를 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절하면 나만 나쁜 사람 되잖아.’

오늘 미팅을 통해 단원들을 포섭, 함께 배도빈의 요구를 거절하려던 이자벨 멀핀과 카밀라 앤더슨의 목 적이 틀어지고 있었다.

‘안 돼.’

그러나 이자벨 멀핀은 어떻게든 최 소한의 시간만은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준비를……

그녀는 입을 연 순간 가련해지는 단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가여운 눈빛을 보냈

고 우수에 젖은 악단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저 불쌍한 사람을 보라는 듯 한 행위에 이자벨 멀핀은 자신도 모 르게 시선을 돌렸고.

배도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단원들을 앞에 둔 이자벨 멀 핀은 초롱초롱한 단원들의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틀만 더 주시면 준비해 보겠습니다.”

“좋아!”

본래 30일 정도 여유를 둘 일을 9일로 줄인 단원들이 기뻐했다.

* * *

“다음 주 금요일로 잡혔어.”

배도빈이 전한 소식에 최지훈은 깜 짝 놀라 나비를 닦고 있던 헝겊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나 빨리?”

“어. 토요일부터 나와.”

기량을 되찾긴 했어도 무대에 오르 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하다 생각 했던 최지훈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는데 공연에 필요한 여러 준비가 단 일주일 만에 해결될 리 없는 탓이었다.

공연 기획자가 아닌 최지훈이 생각 하기에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정 이었다.

하루에 한 곡만 연주하는 것이 아 니기에 세트 리스트를 결정하는 것 부터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였다.

그에 따라 조명 등 여러 부분에서 연주진과 기획자가 의견을 나눌 필 요도 있었다.

장소야 베를린 필하모닉의 루트비 히 콘서트홀을 사용하면 된다 하더 라도 악기 배치 문제가 남아 있었다.

객석이 무대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두르고 있는 루트비히 콘서트홀의 특성상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은 테크니컬 라이더(동선, 조명, 악기 배치 등 공연에 필요한 기술적 제반 사항을 설명하는 서류)를 깐깐 하게 보는 편이었다.

시스템 팀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중음악과 달리 음향 효과를 사용하지 않기에 하는 일이 적다고 생각 할 순 없었다.

디지털 콘서트홀을 운영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최고의 퀄리티로 영 상을 송출하기 위해 녹음, 촬영 설 비를 철저히 하였다.

연주에 따라 조명을 배치하는 것도 중요한 일. 반복된 리허설로 조명 메모리를 설정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해결한다 해도 가장 큰 문제가 남았으니, 연주 진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는가에 대한 여부.

베를린 필하모닉이 제아무리 대단한 악단이라 해도 단 한 번도 연주 하지 않은, 들어보지도 못한 곡을 일주일 만에 연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배도빈이 공연 날짜까지 가져오니 최지훈은 비로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구나?”

“아니.”

“그래. 그래.”

낫자마자 달려왔는데 배도빈이 시 큰둥한 반응을 보여 못내 서운했던 최지훈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라고 해도 분명 미리 기다리며 단원들에게 A108을 준비시켰을 거 라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어? 복귀 무대는 A108로 하고 싶었는데.”

“몰랐다니까.”

“부끄러워하네?”

최지훈이 베실베실 웃으며 헝겊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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