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25화 (42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5화

    93.  가장 빛나는 별⑵

    “멋진 연주네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연주를 마친 최지훈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척 고양되어 있었고 벅차오 르는 감정을 추스르듯 주먹을 쥐고 있었다.

    “선생님.”

    스승을 부르는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이제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통증을 느낀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으나 최지훈은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애써 자신을 달래 왔다.

    그러다 문득 이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그런 생각을 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16개월 동안 가장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마음껏 쳤다.

    성취감, 행복, 해방감.

    봇물 터지 듯 밀려든 감정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잠식해 버렸다.

    지메르만도 최지훈이 얼마나 기뻐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번 망가졌던 손과 잃어버린 기 량을 되찾기까지 속으로 수만 번은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던 제자는 그저 묵묵히 준비할 뿐 이었다.

    뛰어난 여럿 유망주에게서 미래를 앗아간 일이었음에도 최지훈은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가꾸어 왔다.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빨리 전과 같은 기량을 되찾았으니.

    지메르만은 그의 말버릇처럼 피아노를 사랑하니까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다시 나아갈 수 있으니 더는 기다릴 필요 없겠죠.”

    지메르만이 손짓했다.

    최지훈은 의아해하며 스승을 따라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황금 프레임이 선명히 비치는 검은 색 드레스를 입은 피아노.

    최지훈은 마치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금빛 구두를 사뿐히 모아두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해, 그 아름다움 에 홀려버린 최지훈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표면은 미동조차 없이 잔잔한 호수 같아서 얼굴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피아노를 만났지만 아름답 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최지훈이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를 빼내 앉으니 보면대 뒤로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었고, 웃는 입술 사이로 88개의 치아가 가지런 히 놓여 있었다.

    폴보드를 들고 덮개를 치우니 마침 내 그녀가 온전히 드러났다.

    최지훈은 악기가 관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C음을 눌렀다.

    ‘가벼워.’

    가볍지만 존재감은 확실했다.

    누르는 감각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 만 손가락을 뗄 때 살짝 밀어내는 듯한 감각이 달랐다.

    음색은 단아하고 기개가 있었다. 흐트러지지 않고 본디 소리를 길게 이어나갔다.

    “선생님.”

    “마음에 드나요?”

    “……반했어요.”

    최지훈의 말에 지메르만이 웃었다.

    “작년 6월에 주문했던 게 이주 전에야 완성되었네요. 스타인웨이에서 당신을 위해 만들어 줬어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최지훈은 그저 감격할 뿐이었다.

    현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공산품이 라 생각하는 이가 많았지만, 그렇다 고 명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막 만난 사이지만 최지훈은 그녀가 그 어떤 피아노보다도 아름 답게 노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 것과 같은 프레임을 쓰고 있어요. 자매라고 하더군요.”

    지메르만이 최지훈의 손을 포개었다.

    “이미 많은 일을 겪었죠. 앞으로는 더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분명 현명히 대처할 거예요. 나는 정말 기뻐요.”

    “선생님.”

    “근사한 연주를 해요. 내게 더 멋 진 연주를 들려줘요.”

    사랑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최지훈은 마찬가지로 손을 포개어 스승 에게 감사했다.

    빈을 떠나 베를린으로 돌아온 최지훈은 배도빈과 차채은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새 피아노를 보여주 고 싶었고 무엇보다 전과 같이 연주 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빨리!”

    “뭔데 대체.”

    “자, 잠깐. 오빠! 악! 나 무릎 박았어!”

    두 사람을 끌다시피 연습실로 데려 오고 나서야 최지훈은 만족할 수 있었다.

    자신이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친구 역시 넋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와!”

    차채은은 최지훈이 바라던 그대로 감탄했다.

    배도빈은 처음에는 피아노의 좌우를 훑더니 차마 다가가진 않고 상체를 왼쪽으로 기울여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를 빛냈다.

    인상을 쓰며 천천히 다가가서 황금으로 가득한 내부와 거울과도 같은 외관을 살폈다.

    “ 멋진데.”

    “그치!”

    최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배도빈도 너무나 맑은 그녀의 피부에 현혹되었다.

    마치 이 세상에 것이 아닌 듯해 손을 가져다댔다.

    “아, 안 돼!”

    최지훈이 냅다 지문을 닦았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배도빈은 한 번 더 만지고 싶었고 차채은도 마찬 가지였다.

    “나도!”

    “안 돼!”

    배도빈과 차채은은 헝겊을 들어 피아노를 허겁지겁 닦는 최지훈을 보 며 웃고 말았다.

    “소리 들어 봐. 빨리. 응?”

    최지훈은 배도빈이 외면을 만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고는 그를 의자 에 앉혔다.

    건반을 누르자 목소리에 한 번, 독 특한 감각에 두 번 놀랐다.

    대부분 황금으로 만들어진 피아노 내부는 하나의 음조차 단아하고 선 명하게 공명시켰다.

    “소리 좋다.”

    “좋은 울림이네.”

    “그치! 그치! 감도 좋지?”

    최지훈의 말대로 건반을 누를 때의 감각도 좋았다.

    쉽게 들어가고 뗄 때는 손가락을 밀어냈다. 무게감도 적당했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부담이 덜할 것 같았다.

    최지훈을 위한 물건인 듯했다.

    “어디서 구한 거야?”

    “지메르만 선생님이 주문 제작해 주셨어. 이름은 나비.”

    “엑.”

    차채은이 오만상을 썼다.

    배도빈은 나비를 살피고는 고개를 돌려 그저 방실방실 웃고 있는 최지훈을 향했다.

    “나비는 아니지.”

    “왜? 어울리는데?”

    “이건••••••

    배도빈이 다시 한번 나비를 살폈다.

    순수한 검은색을 띠면서도 사물이 선명히 비치는 외관과 욕망을 자극 하는 황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메피스토가 좋겠어.”

    “어? 이렇게 예쁜데?”

    “그럼 벨제부브.”

    최지훈이 인상을 썼다.

    “나비가 좋아.”

    “그리고리?”

    “나비라구! 왜 다 악만데!”

    “아니. 둘 다 구린데.”

    차채은의 일침에 배도빈과 최지훈 모두 충격받았다.

    그러나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게 아 니었다.

    배도빈과 차채은은 조금 떨어진 곳 에 앉아 최지훈에게 연주를 재촉했다.

    최지훈도 이름을 지켰다는 데 만족 하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분히 정신을 가다듬고 공기가 가라앉자 건반을 눌렀다.

    쇼팽 에튀드 작품번호 25의 11.

    겨울바람.

    오른손 2번 손가락으로 시작하는 고요한 밤.

    촛불을 켜자 외딴 숲의 산장에 온 기가 찾아든다.

    산지기가 창문을 달칵 열었다.

    밀려드는 한파.

    겨울바람이 칼날처럼 불어댄다.

    깜짝 놀란 산지기는 서둘러 문을 닫고 불안에 휩싸인다.

    밤이 지나면 날이 진정되어야 할 텐데.

    닫힌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 고 촛불과 벽난로만이 미약하게나마 온기를 전해준다.

    격동적인 곡이지만 빠르게 연주할 수록 음이 뭉개지기 쉬운 쇼팽의 겨 울바람.

    최지훈은 그동안 쌓인 한을 풀어내 듯 빠르게 더 빠르게 연주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정확한 타건과 나비가 가진 특유의 곧은 소리 덕에 심상이 선명히 펼쳐졌다.

    연주를 마친 최지훈도 크게 만족하여 고개를 돌렸다.

    “완전 멋있어! 이제 정말 괜찮나 보네!”

    차채은이 손뼉을 치며 자기 일인 양 좋아했다.

    그러나 배도빈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뭐, 괜찮네.”

    “뭐야. 그 반응.”

    “ 괜찮다고.”

    “이상하다. 어디 잘못되었어? 잘한 거 같은데.”

    배도빈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당연한 일이잖아.”

    “하여간 못됐어. 아, 배고프다. 나 갑자기 알탕 먹고 싶어졌어. 알탕 먹자.”

    “베를린에 파는 데가 있어?”

    “몰라?”

    “그럼?”

    최지훈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배도빈이 나섰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실력을.”

    “도빈 오빠가 하는 건 안 돼. 맛있는 것도 없어지니까.”

    결국 만들어 달라는 말이라 최지훈 이 어색하게 웃었고 배도빈은 불쾌 한 듯 팔짱을 꼈다.

    녀석이 제 실력을 되찾았다.

    작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 서기 직전, 물이 올랐던 그대로다.

    치료가 끝나고 고작 서너 달이 홀렀을 뿐인데 그간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는 쉬었던 기간 이상으로 노력해야 할 텐데.

    기본이 탄탄했던 탓인지 아니면 그 지독한 성실함 덕인지.

    나답지 않게 벌써부터 녀석과 함께 연주할 A108을 기대하게 된다.

    해낼 줄 알았다.

    그래.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학대와 주변의 시기와 질투에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재능 차이와 특색이 없다는 혹평 속에서도, 혹독한 스케 줄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속에서 도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걸었던

    녀석이다.

    부상 따위로 무너질 리 없지.

    잃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타건도 예전과 같이 깔끔하다.

    그 멋대가리 없는 하농만 매일 10 시간씩 반복했다더니, 음이 뭉개지 기 쉬운 겨울바람을 배는 빠르게 연주하면서도 표현력을 갖추었다.

    사람 걱정시키기는.

    멀핀에게 연락해서 빨리 공연 일정을 잡으라고 해야겠다.

    아니, 녀석이 끓인 알탕을 먹고 바 로 날짜를 정해도 괜찮을 것 같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연주해 보지 않은 곡이라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정도는 우리 단원들에게 일도 아니다.

    오케스트라 대전 때는 일주일마다 곡을 준비했고 최근 일정도 널널했으니 재촉하면 될 것이다.

    당장 내일이면 어떨까.

    아니, 그건 심하니 모레가 좋을 것 같다.

    이자벨 멀핀은 보스에게서 떨어진 지령을 받고는 아연실색하였다.

    “또 시작이네. 또.”

    옆에 함께 있었던 카밀라 앤더슨 국장은 이틀 만에 공연을 하자는 배도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홍보랑 설비는 어쩌고. 티켓 판매는 언제 하고!”

    “어떻게든 해봐야죠. 그래도 최지훈 피아니스트 복귀 무대라면 게릴 라성이라도 괜찮을 거예요.”

    “직원들 죽어나가는 소리가 벌써부 터 들리는 것 같네. 아니, 준비하고 있는 게 있었으면 미리 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랬으면 좋겠어요.”

    잔뜩 불평한 카밀라가 사무실에서 간식을 주워먹고 있는 왕소소를 향해 물었다.

    “왕 악장, 잠깐만 볼 수 있을까?”

    양쪽 볼에 케이크를 잔뜩 채우고 있는 왕소소가 다가왔다.

    “방금 도빈이가 전화로 모레 추가 공연 잡으라고 하더라고. 준비하고 있는 거 있으면 미리 공유해 줄래? 도빈이 그런 거 잘 못하잖아.”

    왕소소가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

    왕소소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카밀라와 멀핀은 왕소소의 표정을 보곤 그녀가 이 일에 대해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이상하다. 최지훈 피아니스트랑 A108 한다고 했거든. B팀으로 잡으라 했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왕소소 가 서둘러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그런 일 없었는데.”

    심지어 왕소소는 A108이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것만 알고 있지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상하네요. 분명 모레라고.”

    왕소소는 1년 전의 가혹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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