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23화 (423/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3화

92. 차채은⑵

인사를 나누고 적당한 이야기로 분 위기를 풀어낼 즈음, 사회자가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모임에 참석해 주 신 회원님들과 내빈해 주신 지성들 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올해 14번째를 맞이한 우리 등대는 음악이 나아

가야 하는 방향을 보고, 비추겠다는 사명 감으로 발족하였습니다.”

사회자는 올해 처음 찾아온 이들을 위해 ‘등대’를 간략히 설명했으며 뒤이어 첫 번째 날의 담론 주제를 공개하였다.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한 음악계 에 시대연주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게르트 카리우스 교수께서 선 발언하시겠습니다.”

차채은이 고개를 돌렸다.

한이슬과 인사를 나누었던 로날도 그라우트와 함께 현대 음악사를 크게 뒤흔들었던 사람이 호명되었기 때문인데,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볼 이 파일 정도로 마르고 눈매는 날카 로워 깐깐해 보였다.

‘저 사람이 라이든샤프트를.’

차채은은 음악사학계에서 처음으로 배도빈의 등장을 새로운 시대로 명 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게르트 카 리우스의 말에 집중했다.

그는 단호했고 다소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시대연주는 언제든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제가 말하듯 음악은 항상 변화하며 언젠가는 잊히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뛰어난 음악 가가 새로운 풍조를 가지고 나온 현 재와 같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요. 기록과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시 대연주의 가치에 변함은 없습니다.”

게르트 카리우스가 일단의 발언을 마쳤다.

차채은은 ‘격정의 시대’를 정립하 고 누구보다도 배도빈을 추앙하는 게르트 카리우스가 시대연주를 옹호 하는 듯하여 의아했다.

그러나 게르트 카리우스의 발언을 모두 듣고는 그의 시각을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기록으로서의 가치 이상은 없다는 말이었네.’

게르트 카리우스는 시대연주를 부 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음악사의 일 부로 여기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지 만 어디까지나 학문의 일환으로 여 길 뿐이었다.

만약 그가 시대연주의 예술성을 인 정했더라면 시대연주의 의의를 기록 과 재현에 국한하지 않았을 터.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해.’

차채은은 영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다음 발언에 집중하였다.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누었던 로날도 그라우트의 차례였다.

“시대연주와 역사를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역사와 변화 또는 발전을 분리할 수도 없지요. 그 변화와 발전을 짚고 넘어가는 게 수순입니다.”

로날도 그라우트는 잔뜩 날이 서 있는 게르트 카리우스와 달리 주변 과 사담을 나누듯 여유로웠다.

“배도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배도빈은 연주자에게 새 로운 수준을 요구하였습니다. 최근 몇 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더욱 정교해졌고 나윤희, 찰스 브라움, 가우왕과 같이 불가능하게 여겨 지던 연주를 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되었죠. 이미 여러 통계가 보여주듯 배도빈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변화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1)

1) Donald Jay Grout, '「서양음악사』, 민은기 역, 이앤비플러스, 200 7, p.27 참고.

“베토벤의 작품은 청중과 연주자에 게 새로운 수준을 요구했으며, 그 과 정에서 청중이 음악에서 기대하는, 청중이 생각하는 음악의 가치가 새롭 게 규정되었다.”

로날도 그라우트의 발언은 사실임 과 동시에 먼저 발언했던 게르트 카 리우스의 의견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걸 브루노 발터와 아르투로 토스카 니니가 보여주고 있죠. 고전을 향한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관은 급박하게 변화하는 현재,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발언 이후, 차채은은 이 곳에서 말하는 법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사실과 상대방의 의견 중 일부를 인정, 존중하면서 틈을 보이지 않아야 했고 동시에 주장을 확고히 해야 했다.

언어의 명확성, 두괄식 작문에 익 숙해져 있던 차채은으로서는 학자들 의 발언을 따라가기 버거웠다.

그때마다 한이슬이 필담으로 각 발 언의 요지를 알려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게르트 카리우스는 시대연주에 기 록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하고, 로날도 그라우트는 반대 입장이네.’

차채은이 두 사람의 발언을 나름 정리하고 있을 때 게르트 카리우스 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반론을 시작했다.

“우리는 음악사와 음악의 실재를 분리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 연주의 음악사적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하나 라이든샤프 트에 열광하는 대중은 현재 음악이 갖춰야 하는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B-2를 봐주십시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전체 클래식 음악계 매출의 31%를 차지 하고 있는 것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게르트 카리우스가 언급한 참고자 료 B-2는 2024년 기준 클래식 음악의 경제 지표를 담고 있었다.

그의 발언대로 배도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이 전 체에서 3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세대로 평가받거나 배도빈의 주변 인물까지 포함하면 70퍼센트 이상이었다.

배도빈이 음악계를 평정하여 군림 하고 있다는 농담과도 같은 반응을 차치하더라도 현재 대중이 어떤 음악을 향유하는지, 어떤 음악을 원하 는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자료였다.

“음악은 시대를 반영하는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배도빈의 자유롭고 명확하며 강렬한 성향이 현 시대가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라 봐야겠죠.

시대연주는 어디까지나 특정 소수가 향유할 뿐. 시대를 반영하고 다수 청중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게르트 카리우스의 발언에 차채은 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음악의 다양성을 두고 보았을 때 시대연주 역시 존중받아야 하 며, 과거 음악들 역시 고유의 예술 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록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게르트 카리우스의 발언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는 본인의 관점을 음악의 변화와 발전에 두고 있음을 앞서 밝혔다.

그는 현재를 아우르는 ‘라이든샤프 트’를 주류로 보고 있었으며, 과거 음악의 의의를 인정하되 그것이 주 류가 되어서도, 될 수도 없다고 말 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화하면 라이든샤프트도 주류가 될 수 없다고 말할 거야.’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누적된 ‘역사’를 말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로날도 그라우트가 부드럽게 반격을 시작했다.

“의견을 좁히려면 우선 청중, 즉, 대중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계층, 국가, 계층, 연령 등 여러 기준에 복합적으로 소속되 어 있는 대중은 같은 음악을 듣더라 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카리우스 박사께서도 본인의 논 문을 통해 음악에 다양화가 필요하 다는 점을 강조하신 적이 있습니다.”

게르트 카리우스가 고개를 살짝 끄 덕이며 긍정했다.

“저는 그 역시 현재를 표현하는 일 이라 판단합니다. 7할 이상의 매출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다른 형태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시 대연주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일

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큰 변화를 겪은 현재라면 더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차채은은 조금씩 누구의 말이 맞는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게르트 카리우스가 주장하는 ‘시대 연주는 거시적 관점에서 음악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말도 일 리가 있었으며.

로날도 그라우트가 말하는 ‘그 역시 음악사의 일부다’라는 말도 일리가 있었다.

‘주류’와 ‘전체’에 대한 관점 차이라 차채은은 담론이 이어지는 내내 두 천재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본인 만의 생각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 끄아아아우우웁.”

긴 담론이 끝나고 객실에 들어선 차채은은 침대에 엎어져 과열된 머리를 식혔다.

한이슬은 빙그레 웃고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자, 그럼 복습.”

늘어져 있던 차채은이 벌떡 일어났다. 오랜 시간 집중한 터라 지쳤을 텐데 복습하자는 말에 바로 반응하 니 한이슬은 속으로 그녀를 잘 데려 왔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들어볼게.”

한이슬의 말에 차채은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게르트 카리우스는 주류를 중시하는 것 같았어. 대다수의 사람이 바 라는 음악이 곧 현 시대를 대표하 고, 시대연주는 그 바깥에 있으니까 기록과 다양성에 의의를 두고 있다 고 말했고.”

한이슬은 차채은을 바라볼 뿐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로날도 그라우트는 좀 더 포괄적이었는데 과거 음악을 답습하고 유 지하는 것도 현재에 포함된다고 했어.”

“좋아. 그럼 두 사람의 차이는?”

한이슬이 핵심을 물었고 차채은은 담론 내내 정리했던 생각을 풀어놓았다.

“게르트 카리우스는 음악과 음악사를 분리하여 생각하고, 로날도 그라 우트는 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느낌?”

“정답.”

한이슬이 웃었다.

“게르트 카리우스는 공격당하기 쉬 워. 주류를 언급하는 게 언뜻 보면 독선적이고 편협해 보일 수 있으니까.”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음악 현 상에 대해 말할 뿐. 음악사가로서의 그는 누구보다도 시대연주를 중요시 여기지. 그가 말하는 주류, 라이든샤 프트는 현 시대를 대표하는 고유성 이야.”

한이슬이 물로 목을 축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반면 로날도 그라우트는 음악 현상 전체를 음악사에 대입하는 사람 이지. 그래서 좀 더 넓은 의미로 바 라보고 있어. 하지만 관점이 다를 뿐 두 사람의 말 모두 합당하고 근 거도 탄탄해.”

차채은은 두 음악사가의 대화를 듣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것이야말 로 진정한 음악학, 평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질 낮은 이들의 평론을 보며 지쳤던 그녀에게는 마치 빛과 같이 여겨 졌다.

“멋있어. 진짜 멋있어. 나도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언젠가는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카리우스랑 그라우트 같은 사람들 만 있으면 도빈 오빠도 평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텐데. 아 니, 그것도 아닌가.”

한이슬이 턱을 괸 채 차채은의 말을 들었다.

“오빠는 평론가가 무슨 말을 하든 한 사람의 팬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해. 자신의 관점을 그럴 듯하게 말 할 뿐인데 있는 척하며 독자와 음악 가를 가르치려고 해서 마음에 안 든 대.”

“하하하. 매스컴에 알려져 있는 이 미지 그대로네.”

“응. 근데 게르트 카리우스와 같이 음악과 음악사를 별개로 보는 사람 이라면 오빠도 인정할 것 같아. 아, 근데 음악이 다양해야 한다는 점에 서는 로날도 그라우트랑 더 맞는 것 같은데.”

“모든 의견이 일치할 순 없으니까.”

“응.”

차채은이 객실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뜯어 냈다.

“어때. 재밌었어?”

“응. 말 같지도 않은 말만 보다가 정말 오랜만에 배운다는 느낌이었어. 근데 말이 너무 어려워서 좀 막 막하기도 하고. 합.”

차채은이 껍질을 벗긴 바나나를 크 게 베어 물었다.

한이슬은 유망한 후배가 학계의 원 로들을 통해 시야를 넓혔다는 사실 과 의욕을 얻었다는 데 안심했다.

“내일은 오늘 같지는 않을 거야.”

“왜?”

“더러운 모습도 볼 거거든.”

한이슬이 팸플릿을 꺼내 내일 일정을 가리켰다.

라이든샤프트를 대표하는 두 음악 가에 대한 토론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현재 가장 큰 반응을 보이는 배도빈 과 아리엘 핀 얀스에 관해서였다.

고개를 든 차채은은 한이슬의 올곧 은 시선을 볼 수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오늘 있었던 담론 은 평론도 겸하기는 하지만 어디까 지나 학자들의 대화야.”

“응.”

“진짜 평단은 자기 배 부풀리고 돈 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곳이 라는 것도 알았으면 해. 자기 글이 읽히지 않으면 굶기 딱 좋은 직업이 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더러워져. 내일은 그 모습을 조금 볼 수 있을 거야.”

“채은아.”

한이슬의 목소리는 다정하기도, 단 호하기도 하여 마치 선생 같았다.

“나는 너의 그 순수함이 좋아. 그 래서 네가 열심히 하는 것도 좋고 또 부조리한 일에 얼마나 화낼지도 알아. 평론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깨 끗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또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는 쪽을 소개해 주고 싶기도 했고.”

한이슬은 어린 차채은이 평단에서 활동하면서 겪을 수많은 부조리를 예상하며, 다른 길도 있음을 알려주 고 싶었다.

학계도 그 나름의 폐단이 있겠지만 적어도 평단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 뜻을 이해한 차채은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괜찮아. 음악 공부도 좋아하지만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한이슬은 차채은이 쉽게 생각하지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음악을 사랑 하는 차채은은 18살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분명 괴롭고 힘들겠지만 그 이상으로 이 일을 좋아하고, 그럴 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본인도 그랬으니까.

“도빈 오빠가 개 짖는 소리에 대꾸 하면 개가 지 말이 통하는지 안다고 했어. 무시할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억울한 일도 생길 테고, 근거 없이 비난 받을 때도, 자신을 숙여야 할 때도 올 것이었다.

더욱이 생계와 명예가 걸린 문제니 그런 부조리함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좋아한다면.

자신의 의지를 견지하는 용기가 있다면 힘들어도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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