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22화
92. 차채은(1)
망측한 복장으로 무대 위의 풍기를 문란케 했던 가우왕이 받은 근신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4주간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으로서 예정되어 있던 활동만이 금지되었을 뿐, 개인 리사이틀을 포함한 외부 활동은 허용되었으니 모두 배도빈이 악단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형식 상의 제재를 가했던 것으로 여겼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품위를 유지하되 사실상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가우왕도 배려한 처사였다.
팬덤, 언론은 물론 악단 내부에서도 만 19세의 어린 악단주가 악단 운영을 노련히 한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가우왕은 그 일로 인해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빌어먹을 꼬맹이.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날 차?”
올림픽 주제가를 작업하고 있던 배도빈이 소파에 드러누운 가우왕을 보며 인상을 썼다.
뒷담화보다야 낫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나오니, 과거 빈에서 미치광이로 모차르트와 순위를 다투던 그로서도 가우왕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 나가요.”
“망할 꼬맹이. 지가 좀 커 봤자 꼬 맹이지.”
배도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세상이 다 인정하는 날 걷어차고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 어? 나 없이 어디 잘해봐.”
지저분한 악보 위를 춤추던 깃펜은 이미 본분을 망각한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어디 가서 나 같은 인간 찾아보라 그래. 벤츠 버리고 암만 뒤져 봐. 굴러가기나 하나.”
배도빈이 무선 마우스를 냅다 던졌다.
가우왕을 향해 쇄도한 마우스가 아 슬아슬하게 빗겨나갔고 깜짝 놀란 그가 일어나 외쳤다.
“죽일 셈이야!”
죽일 셈이었던 배도빈이 아쉬운 나 머지 입을 쌜쭉거리곤 다시 악보에 집중했다.
한풀 꺾인 가우왕은 턱을 받친 채 옆으로 누워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늘 하루 일정이 비었기에 배도빈 과 오랜만에 ‘두 대의 피아노를 위 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싶었던 가우왕은 슬슬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었다.
“순딩이는 요즘 뭐 한대?”
답이 없었다.
정말 집중하고 있는 듯하여 가우왕 은 오늘 합주를 포기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깬 가우왕은 통통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프란츠 페터도 제 집인 양 소파에 누워 있는 가우왕을 의아하게 보았다.
“어? 왜 여기서 주무세요?”
“그러게.”
마침 깃펜을 놓았던 배도빈은 가우왕이 아직도 집무실에 있었다는 사 실에 놀라면서도 짜증이 났다.
‘지가 모르면 누가 알아.’
프란츠 페터가 최근 발표한 곡의 수정본을 들어 보였다.
“첨삭해 주신 거 고쳤어요.”
“궁금한 건?”
“여기 이 부분은 화음 처리를 하는 게 나은 거 같은데 풀어서 쓰라 하 신 이유를 모르겠어요.”
“연주하기엔 편해도 듣기에는 풀어 낸 게 더 명확해지니까. 화음으로 할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면 푸는 편 이 듣기 쉬워.”
프란츠 페터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배도빈은 무조건 정답은 없다며 프 란츠 페터가 의문을 가진 부분의 예 외 사항을 덧붙여 설명했다.
“알 듯 말 듯한데 좀 더 공부해 볼 게요.”
“좋아.”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것 같자 가우왕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끝났으면 피아노 치자.”
배도빈이 시계를 확인했다.
“이따가 오디션 봐야 하니까 한 시 간만 해요.”
“뭐?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가우왕이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기에 참고 있는데 배도빈이 프란츠를 가리켰다.
“나 가면 얘랑 놀아요.”
배도빈의 말에 프란츠가 악보를 든 채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본래 피아노로 크리크 국제 콩쿠르 에서 우승했던 만큼 피아노를 사랑 하는 프란츠 페터는 가우왕과 같이 합을 맞출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에 찰 리 없었다.
“얜 아직 덜 여물었어. 순딩이 정 도라면 모를까. 아, 그래서 걔 어떤데? 괜찮대?”
“저번 주부터 병원 안 가고 있어요. 아니, 저저번 주였나.”
좌절했던 프란츠가 반가운 소식에 벌떡 일어났다.
“그럼 지훈이 형 이제 예전처럼 연주할 수 있는 거예요?”
“1년이나 놀았던 손이 제대로 움직 이기나 하겠냐?”
“아……. 지훈이 형 A108 듣고 싶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대단했으니 까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요?”
“꿈 깨. 시작부터 그런 곡 연주했다간 되찾을 감도 잃으니까.”
“왜요?”
“기억이랑 다르니까 열만 받지. 그 럴 땐 천천히 하는 게 최선이야.”
가우왕과 프란츠의 대화를 듣던 배도빈은 완치를 확인한 뒤 매일 10 시간씩 하농만 반복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곤 빙그레 웃었다.
가우왕은 그 말을 듣곤 이상한 이 야기라도 들은 듯 인상을 썼다.
“그 더럽게 재미없는 걸 잘도 하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빠르고 바른 길이라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차채은은 푸르트벵글러호에서 벌어 진 ‘콩을 차지하라’ 이벤트를 바탕으로 배도빈과 그 주변 음악가를 소개하며 또 한 번 인지도를 쌓았다.
가우왕의 호전적인 성향과 찰스 브라움의 고상함, 나윤희의 포용력을 언급하며 배도빈의 방대한 음악 세계관을 담아냈다.
배도빈이 추구하는 쉬운 음악처럼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해당 칼럼은 여러 음악 팬에게 호평받았다.
유럽 출판업계와 평단에서도 작지 만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아직 전문성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특유의 넓은 시야와 그것을 글로 옮기는 데 능숙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관중석’을 통해 배도빈, 최지훈, 나윤희, 이승희 등을 소개하며 독자를 확보했지만, 언 어 문제로 유럽에서는 일부 업계인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차채은이 기반을 다진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급속도로 친해진 한이 슬 평론가만큼은 차채은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 사람 이야기만 쓰는 건 좋지 않아.”
“지훈 오빠 이야기도 쓰잖아.”
“그래. 두 사람만 다루는 평론가가 어디 있니?”
차채은은 대꾸할 수 없었다.
나윤희와 이승희를 다루기도 했지만 발표한 글 대부분이 배도빈과 최지훈을 주제로 한 터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넌 이미 프로야. 취미로 하는 게 아니잖아?”
한이슬의 말에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저 음악과 친구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낯을 많이 가렸던 차채은은 배도빈, 최지훈과 만나면서 음악을 알게 되었고 사람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어렸을 적부터 바빴던 터라 함께할 수 있는 시 간이 적었고, 어린 차채은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배도빈, 최지훈이 나오는 TV나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랑 친한 오빠가 TV에 나와.’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두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주었으면 싶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뜻도 모른 채 주 저리주저리 읊었다.
다행히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녀의 부모는 딸이 관심을 보이는 일에 적 극적으로 반응해 주었다.
‘정말?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응!’
‘왜? 왜 그렇게 생각해?’
‘으음. 멋있으니까!’
부모의 질문에 어설프게 대답하길 반복하면서 차채은은 사고력을 키웠 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 법도 익혀나갔다.
단순히 정말 좋아서였다.
그 마음이 너무도 부풀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으로는 충족할 수 없게 되자 차채은은 블로그를 만 들어 어설픈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마침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배도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이 차채은의 글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필호 편집장의 눈에 띄었고 지금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까지 와 있었다.
크지는 않지만 영향력을 갖춰나가 고 있으며, 원고료를 받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째.
얼마 전부터 아리엘 얀스를 향한 비난이 들끓으며, 차채은은 처음으로 글을 쓰고 게시, 발표하는 행위 에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취미의 영역이라 할 수 없었다.
“언니 말이 맞아.”
“좋아. 그럼 공부하러 가자.”
“어딜?”
“잘츠부르크.”
등대.
현재 잘츠부르크에서는 ‘등대’라는 모임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세계 각 지의 클래식 음악 평론가들이 모여 한 해 전 곡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올해 상반기에 발표된 신곡 중 뛰어 난 작품을 가리는 자리였다.
내로라하는 인물들만 초청받는 행 사라 차채은은 아직 꿈도 못 꾸는 형편이었다.
“짠.”
한이슬이 초청장을 꺼내 보이자 차채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세계 클래식 음악 평론가 협회 로고를 확인 했다.
“참여할 순 없겠지만 견학 목적으로 한 사람 데려간다고 했어. 너라 고 하니까 흔쾌히 수락하던데?”
“사랑해!”
차채은이 한이슬을 와락 끌어안았다.
‘등대’는 배도빈 이후 클래식 음악계가 큰 폭으로 성장하면서 발족한 모임이었다.
시장성이 확보되고 자연스레 정체 되었던 정통 고전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현재는 관현악, 실내악, 취주악, 오페라 등 세부로 나뉘어 담론이 오가 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 모임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평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는 차채은에게는 견학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차채은은 이미 서너 차례 방문했음에도 작은 산 사이에 흐르는 강을 끼고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잘츠부르크의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빨리! 빨리!”
“왜 이렇게 신났어.”
“아, 빨리!”
한이슬은 몹시 흥분한 차채은에게 이끌리다시피 걸었고 두 사람은 곧 미라벨 궁전 근처의 한 호텔에 이르렀다.
파란 지붕과 순백의 외관이 주변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로비에 들어선 모임 시작 시간이 아슬아슬하여 한이슬은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체크인부터 서두르자. 아니, 먼저 들렸다 가는 게 맞나. 연회장이 어디지.”
“저기.”
제1회 오케스트라 대전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이 전세를 냈던 곳이라 내부를 훤히 꿰고 있는 차채은이 연 회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프론트에서 체크인과 짐을 맡긴 두 사람은 곧장 발을 옮겼다.
연회장 앞에 이르자 접수원이 한이 슬과 차채은에게 준비된 명찰과 팸플릿, 작은 책자를 나눠주고 안으로 안내했다.
연회를 위해 준비된 넓은 방에는 간단한 디저트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고 정면에는 책상과 마이크, 물 이 놓여 있었다.
한 노년의 신사가 서둘러 오느라 경황이 없던 두 사람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한.”
단정하고 선한 인상에서 묻어나오는 이지.
목에 걸고 있는 명찰을 확인할 필 요도 없었다.
차채은은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서양 음악의 역사’의 저자를 한눈 에 알아보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엄마야.’
코넬 대학의 교수로서 게르트 카리우스와 함께 학계를 양분하고 있는, 음악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남자.
로날도 그라우트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학부생 때 교수님의 책으로 공부했는데, 이렇게 뵐 줄은 몰랐네요.”
“하하. 많이 듣는 말이죠.”
로날도 그라우트의 가벼운 농담에 한이슬이 작게 웃었다. 가볍지도 인 색하지도 않아, 로날도 그라우트에 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차채은을 보았다.
“이런. 어린 학생이 들어왔나 싶었는데 베토벤을 계승한 자의 차였다 니.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가요?”
“아, 네, 네! 안녕하세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차채은이 허리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점잖은 장내가 잠시 차채은을 향했지만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제 분위기를 찾았고 로날도 그라우트는 차채은과 마주한 채 허리를 숙였다.
“힘찬 인사네요. 반갑습니다.” 차채은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로날도 그라우트의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