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20화 (420/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20화

91. 이름(4)

연주자와 합창단이 무대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때 위기를 겪었으나 지난 수십 년간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던 베를린 필하모닉 베테랑 단원들의 면모는 늠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

관객들이 평소와 다른 등장에 의아해했다.

A팀의 모든 연주자가 자리를 잡은 뒤에 몇 사람이 더 나섰기 때문.

제일 처음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 악장이자 현 고문 니아 발그레이가 길을 텄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왕소소, 나윤희, 찰스 브라움, 헨리 빈프 스키 악장이 줄지어 섰고.

B팀의 지휘자 케르바 슈타인이 지휘봉을 든 채 그 옆에 섰다.

배도빈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포디움 앞에 서서 지난 32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의 기둥으로 있었던 영웅을 맞이했다.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도빈 악단주가 직접 손짓하여 A 팀을 일으켰고 객석 한쪽에 모여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 단원이 그 와 함께했다.

관객들 역시 베를린 필하모닉의 뜻을 이해하고는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전에 이러한 이야기를 전달받지 못했던 파울 리히터는 자신을 향한 따뜻한 눈빛에 목 아랫부분이 묵직 해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주치는 시선들은 각각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니아 발그레이와 마주한 파울은 손을 맞잡아 서로의 어깨를 대고 등을 쓸어내렸다.

가장 오래 함께했던 헨리 빈프스키와 마주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참 지 못하고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케르바 슈타인은 오늘 파울 리히터가 사용할 지휘봉을 그에게 넘겨주 면서 눈물을 보였다.

배도빈은 아쉬움과 응원을 담아 손을 내밀었고 파울 리히터는 그것을 맞잡아 마찬가지로 새로운 왕이 지 금까지와 같길 바랐다.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앞에 둔 순 간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평생을 존경했고.

32년간 스승으로, 상사로 모셨던 전설적인 인물이 그를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구두를 닦았기 때문이었다.

제자의 구두를 닦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일어서 그의 넥타이를 다 듬고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선생님.”

푸르트벵글러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제자를 아련하게 바 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아쉬움과 슬픔, 신 뢰, 응원과 같은 단어만으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지난 32년간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파울 리히터를 위해 준비한 작은 이벤트에 콘서트홀을 찾은 모든 이가 감동했다.

“선생님!”

파울 리히터가 스승을 끌어안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제자를 꽉 끌어안아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 했다.

두 사람의 감동적인 모습에 관객과 단원 모두 박수를 보냈다.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도 그 팬들도 정상 적인 형태로 이별한 적이 최근 몇 년간 없었다.

악단주 배도빈과 상임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엄격한 기준 때 문에 입단조차 쉽지 않았고, 명예와 부가 보장되는 자리에서 탈퇴하는 단원이 없던 베를린 필하모닉.

최근 떠난 사람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돌연 은퇴한 니아 발그레이와 런던 필하모닉으로 간 레몽 도네크 가 유일했다.

이러한 자리를 가질 수도 없었던 터라 단원들은 파울 리히터가 여정을 떠난다고 했을 때 아쉬움만큼이 나 그를 잘 보내주리라 마음먹었고.

팬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관객들의 박수는 계속 이어졌고 스 승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 갔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파울 리히 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허리 아프다.”

파울 리히터와 바로 곁에 있던 배도빈만이 그 말을 들었는데, 배도빈 이 순간 웃은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울 리히터가 물을 마시고 가슴을 다독인 다음 지휘대에 올랐다.

오늘 연주할 곡은 구스타프 말러의 2번 교향곡.

파울 리히터는 아내에게 ‘나의 시 대가 곧 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의 삶을 떠올렸다.

지금은 베토벤과 함께 최고의 교향 곡을 만든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누구보다도 작곡을 좋아했던 구스 타프 말러는 그 유명한 ‘탄식의 노래’로 베토벤상에 도전하나 실패하 고 말았다.

이상을 고집하기에 현실은 풍족치 못했고 말러는 지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휘자로서의 그는 탁월했다.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말러는 그의 오페라를 성공적으로 지휘 하며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쁜 와중 에도 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

자신 있게 발표하나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가 그의 열정을 끌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좌절했다면 ‘작 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역사에 길이 기록될 교향곡을 만들지 못했을 것 이다.

‘베토벤상을 받았더라면 작곡에만 전념했을 거라네.’

훗날 친구에게 말했듯이 구스타프 말러는 작곡을 포기하지 않았다.

말러는 곡을 짓기 위해, 지휘에 더욱 매진했다.

다행히 지휘자로서의 활동은 꾸준히 인정받아 함부르크에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고 말러는 시간을 쪼개 작곡을 이어나갔다.

열심히 산 노력의 결실일까.

당시 이미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었던 빈 국립 오페라에서 그에게 감독 직을 제안했다.

말러는 너무나 기뻤지만 이내 한 번 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교도가 아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종교적 문제 때문이었고 말러는 개종까지 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잡았다.

아내를 만나고 딸을 얻으며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비로소 찾은 안정적인 삶과 가족으로 인해 말러의 창작 의욕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그 스스로 말했듯이 말러의 시대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못 했다.

딸의 죽음, 심장병은 그의 정신을 무너뜨렸고 유대인이었던 그를 향한 맹목적인 폭력은 그에게 안정적인 삶을 제공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을 앗아갔다.

그 과정에서도 작곡을 놓지 않았지 만 작곡가로서의 그는 여전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좌절을 반복하는 불굴의 음악가는 이제 지휘봉까지 빼앗겨 버렸다.

곧 자신의 시대가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한 천재의 삶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파울 리히터는 그런 말러를 깊이 존 경했으며, 설사 이루지 못할 꿈이라 도 평생을 좇았던 남자를 동경했다.

어쩌면 자신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아니, 케르바 슈타인, 헨리 빈프스 키, 레몽 도네크도 같은 입장이었다.

네 사람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열렬한 팬으로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길 꿈꾸었지만 애석하게도 서 로 너무나 뛰어났다.

모든 조건을 고려해도 어느 누구 하나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네 악장은 서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분발했다.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

니아 발그레이라는 천재는 그들 모두를 뛰어넘어 단숨에 ‘캐논’과 ‘후 계자’ 자리를 독차지했다.

파울 리히터는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지휘 자로서의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니아 발그레 이를 넘어설 수 없었으며, 긴 시간 뒤 들어온 어린 천재 배도빈에게서는 스승에게 느꼈던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일평생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도 지휘의 꿈을 놓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깨달은 파울 리히터는 꿈을 포기 하지 않은 레몽 도네크가 부럽기도 했다.

그가 런던 필하모닉이라는 명문 악단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축하하고 싶어, 구스타프 말러의 곡을 준비했고 친우를 초대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오랜 친구는 아집에 얽매어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며 자신의 영혼을 되찾길 바랐다.

파울 리히터가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1악장 빠르고 장엄하게(Allegro m aestoso).

바이올린이 떨고.

첼로와 베이스가 비장함을 보였다.

간격을 두고 한 차례 더. 이번에는 한음을 더 잇는다.

불길한 과거가 엄습해 오는 사이 오보에가 암운처럼, 호른이 그 사이로 비치는 달빛처럼 무대를 채워나 갔다.

달빛을 받은 이들은 검은 옷을 입 은 채 관을 짊어지고 있었다.

현악기들이 어울리기 시작하고 파 울 리히터와 베를린 필하모닉은 비장하게 밤을 가로지른다.

영웅의 가족 혹은 동료를 기억하는 이들은 행복했던 순간을 말하다가 슬퍼했고 이내 침통해한다.

우레가 내리치고.

빗줄기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 하는데, 영웅과 함께했던 추억과 이 제 그를 잃었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오보에와 호른이 조심스레 유족의 어깨를 도닥이고 그의 위업을 칭송한다.

파울 리히터의 지휘봉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보에와 첼로의 음색이 미약하게 나마 위로가 된다.

바이올린이 위로 받은 유족들처럼 눈물을 떨어뜨리고 관을 짊어진 이 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멀다.

영웅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유족 들은 발을 재촉한다.

관의 무게.

그와 동시에 이제는 그가 지키려 했던 평화를 자신들이 짊어져야 한 다고 굳게 마음먹는다.

그의 다정함과 용기를 떠올리는 와 중 다시 한번 벼락이 내리친다.

거센 빗줄기와 함께 천지가 울리고 정적.

묵직하고 엄중한 행진과 벼락이 반 복되며, 파울 리히터의 지휘 속에 레몽 도네크는 고개를 숙였다.

“니아 발그레이가 악장이라니. 그 나이에 입단한 지 1년밖에 안 됐잖아.”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 사실 세 프도 그간 계속 눈치를 주셨잖아. 악보를 가져오라든가.”

“……설마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모르지.”

“난 가능성 있다고 봐.”

“어떻게 그렇게 다들 태평하지? 다 들 지휘봉을 잡고 싶은 거 아니었나?”

“왜 아니겠어.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무슨 방법이 있는데?”

“레몽, 너도 알잖아. 발그레이가 얼 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베를린 필하모닉은 완벽하기 위할 뿐이야. 거기 에 사적인 감정은 필요치 않아.”

“레몽도 알고 있다고. 다만 분할 뿐이지. 나도 솔직히 말해서 좀 열 받는다고.”

“파울.”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는 거지. 우리에겐 음악뿐이니까. 그렇지, 레 몽?”

“물론.”

**

레몽 도네크는 그의 오랜 친구가 무리하여 자신을 초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 향곡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도 배도빈과도 다른, 그만의 진정성을 가 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어떤 오케스트라를 지휘 하더라도 파울 리히터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 같았다.

그가 지휘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파울 리히터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의 베를린 필하모닉이 배도빈과 케르바 슈타인을 중심으로 돌 아갈 거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악단과 팬들이 바라는 일이라 여겼 던 것이다.

레몽 도네크는 그것을 패배라고 생 각했다.

실패가 두려웠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베를린을 떠났다.

그러나 파울 리히터는 달랐다.

그가 사랑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와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서.

평생을 노력했던 일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지휘자로서.

또한 파울 리히터로서의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이별일 뿐.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과 평생의 노 력을 부정하지 않고 차이와 선택을 인정한 채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렇게 웅장한 곡을 자신

감 넘치게 지휘할 수 있을 터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가 끝나고. 레몽 도네크는 가장 먼저 일어나

반복되는 좌절 속에서도 끝내 정직 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는 친구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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