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18화 (41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18화

    91. 이름(2)

    “흐아아.”

    악보를 검토하던 프란츠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팔을 쭉 뻗어 엎드리기에 지쳤나 싶다.

    “잠깐 바람 쐬고 와.”

    “아, 괜찮아요.”

    이탈리아에서 된통 당한 뒤로는 필요한 것을 말한다든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게 되어 신경 쓰지 않고 깃펜을 들었다.

    대교향곡 작업이 아무래도 신통치 않다.

    ‘9번도 11년이나 걸렸으니까.’

    급하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기에 3악장의 전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느긋하게 여겼다.

    하여 2032년 서울 올림픽 주제가를 잡고 있는데, 여러 생각 끝에 오 리지널로 가기로 했다.

    아리랑을 편곡할까도 생각했지만 지역마다 다르기도 하고 또 여러 음악가가 편곡하기도 하여 식상한 탓 에 기각.

    다만 민요가 공통으로 보이는 박 자, 특히 한국 특유의 싱코페이션을 활용하고자 했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민족답게 참으로 흥미로운 템포라 작업 속도가 나기 시작한다.

    “역시 이해할 수 없어요.”

    집중하던 차 프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32년을 함께한 악단에서 나가서 새로운 도전을 하다니. 정말 대단한 것 같은데, 저는 겁이 날 것 같아요.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고.”

    파울 리히터 이야기다.

    “음악가니까.”

    프란츠가 자세를 잡아 관심을 보이 기에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피아노 칠 때 무슨 생각해?”

    “으음. 무슨 의도였을까? 하고요.”

    “그럼 지금은.”

    얼마 뒤에 처음 발표할 곡을 준비 중인 녀석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멤버 분들의 개성을 잘 살릴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잘 이해한 것 같아 다시 깃펜을 들었다.

    “그게 뭐예요! 형은 너무 어렵게 설명해요!”

    아닌가 보다.

    “연주할 때 작곡가의 의도를 살핀 다고 했지?”

    “네.”

    “그건 네 생각이지. 너와 작곡가가 나눈 대화야. 곡을 쓰는 것도 마찬 가지야. 연주자를 생각하며 그들의 개성을 살리고 싶은 것도 너고.”

    “음악을 한다는 건 결국 본인이 근 본이 된다는 뜻이야. 자기 이야기를 해야 비로소 음악가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류일 뿐이 지.”

    “아.”

    “파울도 본인을 찾고 싶은 거야. 지휘자에 따르는 게 아니라 본인만 의 이야기를 펼치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나가려는 거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럿 있지만 완성시키는 것은 단 하나.

    아이덴티티다.

    자아가 없고서야 아무리 노력해도 기계를 흉내 낼 뿐이고 무엇보다 그 런 행위가 즐거울 리 없다.

    나는 배도빈으로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은 파울 리히터란 이름으로서 자신만의 음악을 펼치려 할 뿐이다.

    마왕이니 희망이니 신이니 하는 수식어 따위, 아무리 좋게 붙인다 해 도 배도빈이라는 이름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음악가가 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는다.1)

    1)왜 작곡을 하는가.

    내 마음속에서 샘솟는 것이 세상 밖으로 나와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곡을 짓는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하지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좋은 음악가가 아니라고도 하셨잖아요.”

    “아니. 그건 네가 잘못 이해한 거야.”

    녀석이 다가와 책상 앞에 손을 걸쳐놓고는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자기 이야기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말하는 법이 기량이지. 기분 나 쁜 멜로디와 엉망인 연주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깃펜으로 프란츠의 이마를 쿡 누르 며 말했다.

    “사람들이 네 말을 들을 수 있게 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 즐겁게 들을 수 있다면 더더욱. 최고는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거지.”

    “오늘 형 되게 멋있는 거 같아요. 안 하던 말도 막 하시고.”

    파울 리히터가 떠난다고 하니 나도 감상적이게 된 모양.

    “쓸데없는 말 말고 돌아가.”

    “히히.”

    웃음이 많아져 보기 좋다.

    “어? 이게 뭐예요? 못 보던 건데.”

    녀석이 바이올린 미니어처를 가리 키며 관심을 보이기에 다그쳤다.

    “집중해. 얼마 안 남았잖아.”

    “넵!”

    녀석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펜을 드는 모습을 보곤 나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노을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방을 채우고 있었다.

    프란츠가 있던 자리가 잘 정돈되어 있었는데, 아마 나간다는 소리도 못 들었던 모양.

    슬슬 돌아갈까 생각하며 짐을 정리 한 뒤 복도로 나서자 북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것 없이 일정한 간격을 두 고 나는 소리라 무심코 지나치는데, 마치 매트로놈처럼 정확하다.

    의아하여 좀 더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꺼내 헤아려보니 정확히 5초마다 한 번씩 울린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잠자코 있으니 10분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북소리가 유지되었다.

    ‘디스카우인가?’

    대부분의 음악가가 뛰어난 박자 감각을 가졌지만 이만한 시간, 간격을 두고 조금도 틀리지 않는 건 드문 일이다.

    매트로놈을 두고 연주하지 않는 이상 조금씩 틀릴 수밖에 없는데, 타 악기 수석 디스카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같이 슈퍼 슈바인에 가자고 할 요량으로 소리를 따라갔다.

    ‘ 뭐야.’

    어린이 타악 교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타마키 히로시와 산타 웨인 둘만이 있었다.

    타마키는 산타와 시계를 번갈아 볼 뿐이고, 디스카우라고 착각할 만큼 놀라운 박자 감각을 보인 어린 드러 머는 입을 쭉 내밀고 북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게 또 얼마간.

    산타가 채를 내려놓자 타마키가 팔을 쭉 펼쳤다.

    “신기록이야! 20분 동안 박자 유지 하기! 대단한데? 진짜 대단해!”

    “흐헷

    정말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측정이다.

    그러나 타마키도 산타도 즐거워하 고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나 싶다.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홈페이지 메인에 32년간 자리를 지킨 역사의 악장, 파울 리히터의 사진이 게시되었다.

    이자벨 멀핀의 설득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홍보 담당 직원으로 섭외 된 전 언론인 에드가 린센과 알롱 앙리는 파울 리히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은 지면을 활용해 소개하였다.

    그를 통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오랜 팬들, 특히나 베를린 시민들은 파울 리히터와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들도 파울 리히터란 인물을 새롭게 인지 하며 해당 게시물을 받아들였다.

    ㄴ 지금 보니 부모님과 같이 처음 봤던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 파울 리히터가 악장을 맡았던 무대였구 나. 그 공연을 잊을 수 없지. 이후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이 되었거든.

    ㄴ 최근 들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나 배도빈, 케르바 슈타인의 빈자리를 채워 지휘단에 오르는 걸 보고 더 많은 곡을 지휘했으면 했는데.

    ㄴ 그는 베를린의 영웅이야. 한때 무너질 수도 있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을 잘 지켜내 줬어.

    ㄴ 정말 이보다 훌륭한 세대교체는 없었지. 그에게 경의를 보낸다.

    ㄴ 마찬가지야.

    ㄴ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 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게 된 게 배도빈 때문이거든. 하지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읽으니, 그 가 얼마나 악단에 헌신했는지 알 것 같아.

    ㄴ 다음 주부터 파울 리히터가 두 차례 A팀을 지휘한대. 이럴 때는 시즌 티켓을 구하지 못한 게 너무 아 쉽다.

    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거리에는 이미 파울 리히터의 포스터가 줄지어 게시되어 있어.

    ㄴ 최고의 예우네. 좋아. 그는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야. 헌신적이었고 유능했지.

    ㄴ 스승과 동료 그리고 팬들은 나몰 라라 하고 영국으로 튀어버린 누구 랑은 참 달라.

    ㄴ 레몽 도네크 말이라면 나도 공감 해. 무엇이 그를 압박했는지 몰라도 그가 파울과 같이 행동했다면, 아마 지금과 같았을 거야.

    ㄴ 그에게는 그만의 길이 있었어. 나는 레몽 도네크를 용서하진 않지 만 그렇다고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ㄴ 그건 파울 리히터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다른 이유를 생각해 봐.

    ㄴ한 시대가 저물고 있구만.

    팬들이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2025년, 클래식 음악계에 세대가 교 체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파울 리히터의 소식이나.

    살아 있는 전설, 마술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그 후임자로 레몽 도네크가 선정된 것.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칭송 받았던 글렌 골드의 은퇴까지 구세대 와 신세대가 함께하던 시기에서 점차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시사했다.

    여전히 강력한 기성세대로 군림하는 찰스 브라움, 데이비드 개릭, 가우왕, 막심 에바로트, 보리스 베레조 프스키.

    그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나윤희, 니나 케베리히, 최성신,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그리고 잠시 휴식에 들 어간 최지훈.

    사카모토 료이치를 초빙하여 개혁을 단행한 빈 필하모닉.

    레몽 도네크 체제 아래 복고주의를 펼친 런던 필하모닉.

    또한명의 천재 아리엘 얀스를 중심으로 기반을 다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밀로스 발렌슈타인과 같이 신인들의 성장과 함께 힘을 비축 하고 있는 전통의 강호 체코 필하모닉까지.

    클래식 음악의 최대 축제, 오케스트라 대전의 양상이 어떻게 될지 주 목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변화를 느낀 여러 음악가는 평소와 같이 본인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을 분석하고 팬들에게 전달하는 차채은과 같은 글쟁이들은 바삐 움직여야 할 때였다.

    “끄아아아아.”

    기사를 살피던 차채은이 앓는 소리를 냈다.

    쏟아지는 소식들 속에서 도대체 무 엇부터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반년 뒤에 제2회 오케스트라 대전 예선이 시작되는데 너무 많은 변화가 있다 보니 정보를 취합하는 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과제 너무 많아아아.”

    더군다나 올해 입학한 대학도 소홀 히 할 수 없었고 거기다 조금씩 피아노를 연습하다 보니 하루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억울함에 사로잡힌 차채은은 여러 잡지를 훑어볼 뿐이었는데 그중 하나의 칼럼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아리엘 얀스. 제 2의 배도빈조차 못 된다?’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그의 음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더욱이 진달래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미친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들었기에 차채은은 이 평론가가 어떤 헛소리를 하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내용은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3개 의 곡을 발표한 아리엘 얀스는 첫 발표곡 ‘봄의 여신’ 이후 비슷한 곡 만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 엉망이잖아.’

    세 곡 모두 들어봤던 차채은은 이 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과연 평론가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세 곡은 모두 우아한 풍조를 보였지만 전개 방식, 구성 모두 달랐으며 장조였던 ‘봄의 여신’ 이후로는 모두 단조곡이었다.

    풍조가 비슷하다고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니고 도리어 아리엘 얀스라는 음악가가 가진 아이덴티티가 더욱 확고해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이런 인간 글은 묻히겠지.”

    차채은은 진달래가 이 글을 보지 않길 바라며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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