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17화
91. 이름(1)
【행복을 전하는 항해】
지난 8일,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대형 크루즈 푸르트벵글러 호가 출항했다.
〈피델리오> 아시아 투어 때의 이벤 트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는 첫 출항이었기에 많은 이가 기대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배 옆면에서 황금빛 찬란한 조명으로 빛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이름과 거대한 크루즈를 목도한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 설렘 탓인지, 아니면 푸르트벵글러호의 위용 탓인지 승선신고서를 제출하고 배에 오르자 잠시 어지러운 것도 잠시.
선상에 준비된 야외 뷔페와 어딜 가도 들리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명 곡들 그리고 항구에서 쏘아올리는 폭죽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선수에는 대형 풀장과 야외극장,
그리고 주류를 포함한 드링크바, 작은 무대가 있었다.
작은 무대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실내악팀 또는 일부 연주자가 매 일 저녁 시간에 짧게 공연을 하여 9 박 10일 내내 가장 인기 있었다.
선상을 둘러보며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지만 객실로 들어서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르트벵글러호의 객실은 특실을 제외하고 여덟 등급으로 나뉘는데, 창문 여부와 발코니 여부, 방 크기 등에 따라 달라졌다.
가족과 함께 머문 특실은 킹 베드 하나와 더블 베드 세 개가 있었고 고풍스러운 목재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거실과 작은 방이 따로 있고 복층 구조라 화장실 겸 욕실 위에도 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푸르트벵글러호의 여러 소개 문구 중 WH호텔의 객실에 배치된 물건과 동일하다는 내용 그대로 고급스럽고 안락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푸르트벵글러호는 대체 어디까지 놀 라게 할 생각일까.
다음 날, 쇼핑을 마치고 산책을 나 온 나는 투명 유리로 된 바닥을 걸으며 그 아래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덜덜 떨며 40미터 위에서 바다를 즐긴 뒤 찾은 18층의 선 덱.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미니 스 파와 선 베드가 줄지어 있으며 앞쪽 에는 파티션이 있어 독립된 공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회보다 중요할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세 명의 비르투오소가 펼치는 경합이었다.
출항 4일차, 악단주 배도빈과 가장 어울리는 연주자가 누군가 하는 주제로 시작된 이벤트의 참가자는 바이올린의 황제 찰스 브라움과 피아노의 황제 가우왕 그리고 푸린 나윤희.
현재 가장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세 사람이 연주하는 배도빈은 승객 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세 사람은 각자 배도빈에게 헌정받 은 곡을 차례로 연주했다.
나윤희 악장의 ‘잠자는 숲속의 공 주’는 왜 그것이 최근 1달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듣는 곡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해냈고.
찰스 브라움 악장이 직접 편곡한 ‘찰스 브라움’을 홀로, 훌륭히 소화해 냈다.
가우왕은 여전히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세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우왕’을 완벽히 연주하여 우승과 근 신을 차지하였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관객들의 반 응으로 보나, 개인적 감상으로 보나 그들이 악단주이자 작곡가인 배도빈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들의 끈끈한 유대를 알 수 있는, 즐겁고 꿈같은 시간이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선 행복을 싣 는다는 제목을 다소 식상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에든버러의 관객들이 느끼 기에 푸르트벵글러호는 그야말로 꿈을 싣고 온 배였다.
첫 항해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영 국 에든버러에서 하루간 오전과 오 후 두 차례 공연을 하였고 모두 매진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향한 사랑이 더 할 수 없이 부푼 지금, 여건상 그들 의 연주를 찾아들을 수 없는 이들의 아쉬움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앞으로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푸르트벵글러호를 운용하여 세계 각지를 직접 찾아다닌다고 한다.
배도빈과 그 단원들의 항해에 축복 이 깃들고 그들의 연주를 직접 듣는 행운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함께 하길 바란다.
-차채은(칼럼니스트)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공식 항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세 연주자의 경합은 큰 화제를 낳았다.
선상에서의 공연 영상이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에 등재되면
서 뒤늦게 해당 이벤트를 확인한 팬들은 절망하는 찰스 브라움과 눈이 튀어나온 가우왕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우울해하는 나윤희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에는 짓궂은 팬들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하나는 민망한 차림 때문에 가우왕 이 악단주로부터 직접 근신을 지시 받은 것과 3점이라는 치욕적인 점수를 받고 분에 못 이긴 찰스 브라움 의 중요 부위가 재발한 일이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두 명의 간판스타가 강제 휴가를 떠났으며.
최근 얼마간 계속해서 시끄러웠던 베를린 필하모닉 내부는 평화를 되 찾을 수 있었다.
‘좋구만.’
하루도 빠짐없이 싸우던 두 사람이 없어지자 배도빈은 그 고요함을 즐 기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랜드 심포니.
모든 악기를 사용하겠다는 오만한 발상으로 시작한 대교향곡 작업은 동양풍의 1악장과 배도빈 특유의 격 정적인 2악장이 완성되었고.
목관과 금관을 주로 한 3악장의 주제만을 선정해 둔 상태였다.
천재적인 악상 전개 능력으로 200년 이상 세계를 놀라게 했던 배도빈 이지만 1악장과 2악장의 자연스러 운 흐름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욕심으로 다소 정체되어 있는 것도 사실 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 올 즈음, 배도빈에게 한 통의 서신 이 날아들었다.
똑똑“
“보스, 계신가요?”
“네. 들어오세요.”
이자벨 멀핀이 배도빈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평소와 같이 여러 서류를 들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러 단체에서 보낸 초청장 또는 사업요 청서였다.
“루드 캣에서 또다시 제안을 보내 왔습니다. 이번에도 제임스 터너 디 렉터시네요.”
그리운 이름이다.
사카모토와 함께 호우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어떻게 더 실감나 게 녹음할지 고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함께 녹음했던 클래식기타의 명인 롤랑 리옹도 오래 연락을 못 했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리 여유롭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과 달리 하나의 작업만 해도 되었으니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든 게임이든 오페라든 이야기 가 있는 일에 음악을 입히는 것도 즐겁지만, 지금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최근 몇 년간 다른 사람이나 독립 되어 있는 이야기를 주제로 곡을 만 들었기에 지금은 대교향곡이든 짧은 곡이든 내 이야기를 담고 싶다.
계속 거절하게 되어 미안하긴 해도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진 않다.
“정중히 거절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퍼 스트 오브 미 후속작과 메트로펑크 까지 두 차례 거절하셨는데도 이렇게 나오니, 작은 성의 정도는 보여 주시는 게 어떨까요? 제임스 터너 디렉터와 친분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루드 캣의 사업 제안서를 보면 신 곡 작업 이외에도 베를린 환상곡을 사용하고 싶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이센스 허가 정도야 어 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해주세요.”
이자벨 멀핀이 미소 지었다.
“다음은 월드 디자인 뮤직 그룹과 의 일입니다. 내년 개봉 예정인 플 래닛 워즈 시리즈의 녹음 작업입니다. A팀이 두 차례 나섰으니 이번 에는 B팀이 어떨까요?”
인터플레이의 영향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잠시 재정적 문제를 겪었을 때, 월드 디자인 컴퍼니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10년간의 업무 협약을 제시하였다.
그로 인해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오케스트라 대전을 거쳐 과거 전성기를 훨씬 웃도는 거대 오케스트라로 거 듭날 수 있었다.
현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서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좋네요. 케르바 슈타인과 B팀에게 맡겨주세요.”
“그리고.”
“ 네.”
“파울 리히터 악장이 개인 면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이자벨 멀핀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파울 리히터를 기다리며 그의 이력을 살폈다.
1968년생으로 올해 만 56세.
18세가 되자마자 하노버 국제 콩쿠르 우승을 비롯해 만하임 국립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때까지 숱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3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베를린 필하모닉 입단하여 1996년 악장 취임한 이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만 32년간 재직한 그는 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아꼈던 다섯 명의 악장 중 하나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멀핀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마음을 정한 듯하여 잡아야 할지, 보내줘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안에 있느냐.”
“네.”
푸르트벵글러의 목소리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역시나 그 리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의 서운함과 분노 그리고 슬픔으로 가 득 차 있었다.
소파에 깊이 앉은 푸르트벵글러가 짧게 숨을 뱉더니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하고 싶어요.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강요 할 순 없잖아요.”
푸르트벵글러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파울의 이력서를 살피는데.
“아니지!”
노인네가 목청도 좋다.
갑자기 소리를 쳐 깜짝 놀랐는데 있는 대로 버럭댄다.
“나도 작년부터 지휘봉 내려놓는다 고 하지 않았느냐! 왜 나랑 파울이 랑 취급이 달라? 어!”
“푸르트벵글러는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요즘 허리도 아프고 숨도 가쁘고 아주 죽겠단 말 이다!”
너무나 건강한 모습을 지그시 쳐다 보니 본인도 말이 안 되는 걸 인지 하곤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등을 파묻고는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그 녀석이 악단 내 에서 어떤 인물인지 알 게다. 온갖 굳은 일은 다 도맡아하면서 꾸려왔지. 집사장이나 마찬가지였어. 특히 나 레몽이 떠난 뒤로는 더더욱. 나 만큼이나 베를린 필하모닉에 필요한 사람이야.”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공감하며 커 피를 마시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파울 리히터다.
“하하.”
어색한 웃음 뒤에 파울이 자리에 앉았다. 푸르트벵글러와는 물론, 나와도 격 없이 지냈던 그가 이러니 정말 마음을 굳힌 듯하여 못내 아쉬 웠다.
커피를 타 가져다주었다.
“아, 고마워.”
“안 돼.”
그가 잔을 들기도 전에 푸르트벵글러가 엄포를 놓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안 돼. 나가려거든 나 죽고 나서 나가.”
“세프.”
그가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지라 파울 리히터가 난감해했다.
“장례식까지 10년도 더 남은 것 같은데 너무하시잖아요.”
“뭐, 뭐!”
“하하하하하하.”
파울 리히터가 웃어서 나도 작게 웃었다.
“은퇴하려는 거예요?”
푸르트벵글러는 이 자리 자체가 못 마땅한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 단지, 이제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란 이름을 내려놓고 싶어.”
“……일이 힘들어서 그렇다면.”
파울 리히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리어 너무 즐거워. 몇 년 전만 해도 관객은 자꾸만 줄고, 다른 악단들이 치고 올라오는 통에 죽을 맛이었는데. 요즘엔 옛날 생각도 나고 정말 좋아.”
“그런데 왜!”
푸르트벵글러가 끼어들었다 .
파울 리히터는 스승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가 고 싶어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서 활 동한 지 32년.
‘푸르트벵글러의 아이’였던 그는 바이올리니스트나 파울 리히터로서 의 삶을 살지 못했다.
니아 발그레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 지만 파울 리히터만 한 연주자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명성이 낮은 것 도 모두, 실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있었기 때문.
만약 그가 솔로로 활동했더라면 지 금의 찰스 브라움이나 데이비드 개 릭 못지않은, 어쩌면 더 큰 명성을 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일도 아니라 음악가로서 본인 의 자아를 찾고 싶다는 말에.
나도 푸르트벵글러도 그를 잡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으니까.
“받아주는 곳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획사도 찾아서 투어도 다녀보고 싶고 앨범도 내고 싶어요.”
파울 리히터는 우수에 찬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았고 푸르트벵글러는 검지와 엄지로 눈 주변을 홅으며 애 써 그 시선을 피했다.
32년을 함께한 두 사람 사이에 얼 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서로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 마음 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나눌 것이 더 없는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은퇴식은 거창하게 치를 거예요.”
“이거 기대되는데?”
파울 리히터가 사람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