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15화
90. 사랑과 전쟁 in 푸르트벵글러호(4)
마누엘 노이어의 저렴한 멘트와 이벤트의 특성상 즐기는 분위기였기에 웃었다고 눈총 받는 일은 없었다.
도리어 누가 우승자가 될지 대화를 나누었고 웃음소리도 간간이 나왔다.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의 싸움에 신이 난 마누엘 노이어는 그러한 분위 기를 흡족해하며 진행을 이어나갔다.
“우승 상품은 1년 치 두유! 콩으로 만든 우유라는데 생각만 해도 맛없을 것 같네요.”
건강식으로 유럽에서도 여러 바리 에이션을 두고 판매되고 있었지만 맥주 아닌 음료는 취급하지 않는 마 누엘 노이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품이었다.
마누엘 노이어가 오만 인상을 쓰며 웩 하자 관객들이 웃고 말았다.
“작정하고 웃기려 하네.”
“재밌잖아.”
이벤트 내용부터 상품 그리고 진행 자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이 오늘 공 연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하는지 분명했다.
배도빈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
참가자 중 두 명은 사생결단을 할 만큼 진지하지만 적어도 관객들은 재미로 즐겨주었으면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승희가 옆에 앉아 있는 료코에게 물었다.
“상품 데이비드 개릭 공연 티켓이라고 하지 않았어?”
“멀핀 부장님이 그런 걸 어떻게 공개 상품으로 내거냐고 했어요.”
“아아. 하긴.”
찰스 브라움이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고, 더욱이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 연주자로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자들의 경합이었다.
더욱이 ‘배도빈’이 주제였기에 아 무리 웃고 즐기는 이벤트라 하여도 타 음악가의 공연 티켓을 내걸 수는 없는 법이라, 이자벨 멀핀은 공식 상품만을 언급하도록 주문했다.
마누엘 노이어가 대본을 읽어나갔다.
“자, 그럼 첫 번째 연주자를 만나 보도록 하죠. 한국대 음대 졸업! 동 유럽 순회 공연으로 다져진 기본기! 때때로 대범해지는 베를린의 푸린! 푸린이 뭐야?”
“포켓몬이요.”
“뭔 몬?”
“아, 그냥 해요!”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 윤! 희!”
보조 요원의 재촉에 마누엘 노이어 가 힘차게 나윤희를 호명했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윤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본인은 잠들 수 없었고 더군다나 민망한 별명까지 얻어 버렸다.
팬들은 마왕과 푸린이 수마의 저주를 내렸다고 하지만 나윤희는 본인 이 저주를 받은 느낌이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무대로 나서 서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다부졌다.
‘ 어?’
객석에 앉아 있던 이승희와 몇몇 이들이 의아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출전하기 싫어 했고 더군다나 병적으로 싫어 하는 푸린이라는 별명이 언급된 탓에 단원 들은 나윤희가 무척 민망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대 위에 서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의연할 뿐이었다.
마치 이 이벤트에서 반드시 우승할 거라는 각오를 마친 듯 보였다.
“진지하네요.”
료코도 이승희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게. 하긴 윤희도 도빈이 많이 좋아하니까.”
이승희는 별일이라 생각하며 의자 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그 순간.
몇몇 장면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나윤희가 무엇을 궁금해하거나 빤 히 바라볼 때 항상 먼저 말을 걸어 주던 배도빈.
배도빈이 가장 바쁠 때 항상 먼저 나서서 공백을 채워주었던 나윤희.
‘설마. 설마 둘이 좋아해?’
이승희가 두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 할 때, 연주를 앞둔 나윤희는 각오를 다졌다.
‘개릭 보러 갈 거야.’
데이비드 개릭 리사이틀의 특별석 이라면 푸린이라는 부끄러운 별명도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의 닦달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배도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이미 내리고 있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오케스트라 대전 도중 발표된 차채은의 ‘베토벤을 계승한 자’를 읽고는 그에 깊이 공감했다.
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닮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또 그를 잇는 배도빈.
음악사를 관통하는 세 명의 위대한 음악가의 연결 고리야말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이벤트는 애초에 그녀 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만약 두 번째가 있다면 사카모토 료이치.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이 서로를 닮았다면 사카모토 료이치는 배도빈과 같이 자유를 꿈꾸면서도 그와는 또 다른 입장에 있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같은 곳을 향 해 협력하는 두 사람의 일화들은 나윤희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훈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세 번째가 있다면 최지훈.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윤희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있으면서 배도빈과 최지훈이 서로를 얼 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함께했던 탓일까.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것은 그와 함께했던 몇 차례의 피아노 협주곡 공연으로 증명되었다.
배도빈의 지휘는 최지훈의 다소 얌 전한 연주에 이야기를 부여했고 최지훈은 배도빈의 오케스트라에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혀주었다.
그다음은.
‘두 사람 중 한 명일 거야.’
둘 중에 고를 수는 없었지만 나윤희는 그다음 사람을 고르라면 가우왕이나 찰스 브라움을 꼽고 싶었다.
가우왕의 화려함도 찰스 브라움의 고상함도 모두 배도빈의 곡을 만났을 때 빛났기 때문.
생각해 보면 모두 너무나 멋진 하 모니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윤희는 이번 이벤트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답을 알고 있는데 굳이 나 서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비드 개릭 티켓 쟁탈전 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데이비드 개릭의 우수에 찬 눈빛과 야성적인 턱수염, 멋진 장발 그리고 마성 가득한 연주에 빠져 산 지 벌 써 16년째였다.
나윤희는 많은 이가 정통 클래식에 서 벗어난 데이비드 개릭을 비아냥 거려도 팬심을 잃지 않았던 골수팬 이었다.
과거 변변치 않은 수입과 치열한 티켓팅,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베를린 필하모닉 입단 뒤에도 시간이 없어 찾지 못했기에.
데이비드 개릭의 연주회에 대한 나윤희의 욕구는 더 없이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 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녀가 되더라도 말이다.
‘재울 거야.’
나윤희는 최지훈이 지나치듯 농담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면 관객들을 재우는 일이야 손쉬웠다.
잠에 빠진 관객들은 뒤에 나올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의 연주를 비몽 사몽간에 들을 터.
집중을 하면 효과가 덜하다곤 하지 만 심사를 맡은 최지훈도 적게나마 영향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이길 거야.’
편법을 쓰더라도 이겨내고 싶었다.
나윤희가 블러드 와인을 받쳐 들었다. 잠시 숨을 내쉬고 이내 전 세계를 잠재웠던 저주받은 곡을 전력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쾌한 도펠그리프.
공주의 탄생을 알리는 블러드 와인은 손을 뻗어 관객들의 뺨을 어루만 졌다.
그 고혹적인 손길에 천천히 최면에 걸리듯.
관객들은 몽롱한 상태로 빠졌다.
“반칙이잖아!”
대기실에 있던 가우왕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어느새 꿈뻑꿈뻑 졸고 있던 찰스 브라움이 그 소리에 깨 태연한 척 조롱했다.
“흥. 자신 없으면 꼬리를 내리면 될 뿐이다.”
“그 침이나 좀 닦고 말하지?”
가우왕의 일침에 찰스 브라움이 당황하여 입가를 닦았지만 묻어나오는 침은 없었다.
한편.
나윤희의 연주를 듣던 최지훈은 감탄했다.
평소에는 듣다가 졸아서 알지 못했던 부분도 심사를 위해 집중하니, 배도빈이 왜 나윤희에게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얌전하기만 한 곡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배열된 화음들이 추위와 공포를 만들었고 그 탓에 주 멜로디 가 주는 안락함이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찰스 브라움의 부드러움도 왕소소의 상냥함 도 한스 이안의 날카로움도 아닌, 나윤희의 명석함이 제격이었다.
작곡가의 의도와 곡을 깊이 이해하 여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총명함을 갖춰야 했다.
‘졸려.’
최지훈이 눈을 비빌 때에 맞춰 나윤희가 연주를 마쳤다.
지나치게 적었던 박수 소리가 이내 그 소리에 깬 사람들이 합류하여 환호로 이어졌다.
졸고 있던 마누엘 노이어가 보조 요원에게 옆구리를 찔려 행사를 진행했다.
“다음은 한동안 서서 연주를 했던 사람이죠? 영국 왕립 음악대학 졸업, 오랜 솔로 활동으로 황태자에서 황제로 등극한 찰스 브라움입니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로도 찰스 브라움은 얼마간 앉아서 연주하질 못했는데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의 반 응이었다.
집착을 불태우며 준비하던 찰스 브라움이 흥분하고 말았다.
고귀한 혈통의 자신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온 뒤로 자꾸만 우스워지는 것 같았다.
‘두고 봐라.’
그가 무대 위에 올라서자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평소와 같이 열렬하지 못했는데 찰스 브라움은 앞서 연주한 나윤희를 떠올렸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거겠지.’
사자 새끼를 키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가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성주의 옆자리를 양보할 수 없기에 찰스 브라움은 파이어버드를 어깨에 받쳤다.
어깨를 들어 자연스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살짝 위로 향한 그의 콧날 과 턱선이 조명을 맞이해 아름답게 빛났다.
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각도였다.
그리고.
이번 이벤트를 위해 직접 독주곡으로 편곡한 배도빈 바이올린 협주곡 13번, D장조 ‘찰스 브라움’을 연주 하기 시작했다.
철없는 산새의 사랑.
산새는 단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연모했다.
산새는 매일 노래했다.
현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빼고 활을 움직이자 마치 새의 노랫소리처럼 높은 음이 퍼져나갔다.
태양을 향한 산새의 교태가 숲에 울렸다.
‘ 아아.’
당신은 어쩜 그렇게 밝은가요.
매일 밤마다 어딜 그렇게 가시는 건가요.
나와 같이 놀아요.
찰스 브라움이 현을 마찰할 때마다 퍼지는 청명하고 순수한 멜로디가 관객들을 미소 짓게 하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악장 오디션을 반복할 순 없지.’
찰스 브라움은 배도빈과 경쟁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을 잊지 않았다.
배도빈의 너무나 격렬한 연주 뒤에 얌전한 곡을 연주하면서, 더욱 뛰어 났음에도 적은 점수를 받았던 경험.
비극이 시작되었다.
산새는 절망했다.
눈이 부셔 온전한 모습조차 담을 수 없었지만.
너무나 높은 곳에 있어 아무리 날 갯짓을 해도 닿을 수 없었지만 그럴 수록 산새는 애달파질 뿐이었다.
찰스 브라움이 손가락을 떨 때마다 파이어버드가 처연히 울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산새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파이어 버드의 음색이 표독스러워졌다.
태양을 만나고 싶어 아무리 날아올 라도 결국에는 지쳐 떨어지길 반복 했던 날 뒤에.
비장했던 원곡과 달리 집착으로 점 철된 비극은 결국 산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날카롭게 우는 목소리.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 다고 외치는 파이어버드의 소름 끼치는 절규에 관객들이 아연실색하였다.
기분 나쁜 와중에도 자꾸만 집중하 게 되는, 도대체 결말이 어떻게 이루 어지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비극!
찰스 브라움이 활을 길게 들어올리 며 끝을 고하자.
“브라보!”
언제 졸았냐는 듯.
관객 모두 빠짐없이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찰스! 찰스!”
바이올린의 황제를 찬양하는 목소 리가 ‘빌헬름’ 콘서트홀을 가득 채 웠고.
심사위원 최지훈은 그의 뛰어난 편 곡 능력과 절륜한 연주에 감탄하면서.
‘도빈이 곡 아니잖아.’
찰스 브라움 이름 옆에 숫자 3을 적었다.
나윤희: 9점
찰스 브라움: 3점
가우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