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14화 (414/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14화

90. 사랑과 전쟁 in 푸르트벵글러호(3)

자존심 하나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선 남자는 오늘 있을 경연에서 결코 질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프란츠 페터가 다가가 공연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가우왕 수석님, 이제 자리 옮기셔 야 할 것 같아요.”

가우왕은 반응하지 않았다.

혹시 못 들었나 싶어 프란츠가 몇 차례 더 부르자 딴소리를 하였다.

“꼬맹이.”

“네, 네?”

“너도 피아니스트니 알겠지.”

가우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프란 츠 페터가 망설이는 사이, 그는 아 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말을 이어나 갔다.

“배도빈은 피아노를 해야 해. 더 많은 피아노곡을 써야 해. 그렇지?”

“어……. 네. 하지만 형은 바쁘니까.”

“그렇지?”

기세에 눌린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대체 몇 년째야. 나는 녀석이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부터 기다렸다고.”

젊고 열정적이며 동시에 오만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기량을 뽐내기에 현대 작곡가들의 수준이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했다.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리스트, 드 뷔시,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위대한 이들이 펼쳤던 찬란한 시대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완벽한 연주를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과거 천재들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작곡가로서의 그는 처참했다.

그래서 늘 화가 나 있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한 갈망과 혼자서는 이를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기다릴 뿐이었다.

피아니스트 가우왕에 어울릴 완전한 곡을 애타게 바랄 뿐이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조급해졌다.

차라리 온전한 곡을 쓸 수 있었다 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을, 완벽한 곡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원 망했다.

자연스레 그의 못된 성격은 더욱 예민해졌다.

그렇게 지쳐갈 즈음 만난 보석과도 같은 존재.

배도빈의 곡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요동쳤다.

가우왕에게 배도빈은 희망이었다.

현대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자신이 만들지 못했던 일을 해낼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 아이와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도빈과 함께라면 스승조차 이를 수 없었던 저 위대한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배도빈이 어렸을 적부터 그와 함께 작업하길 바랐고, 그 때문에 웃기지도 않은 경연을 벌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배도빈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을 듣고는 틀리지 않았다고, 자신의 귀와 눈이 정확했다고 확신했다.

피아노의 신약 성서라 불리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배도빈은 세상 그 어떤 이보다 완벽히 연주해냈고, 그것은 오만한 피아니스트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가우왕은 그제야 납득했다.

‘부족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여실히 깨달았다. 배도빈이 협 업을 거절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해내주지.’

즐거웠다.

막연하기만 했던 그의 길 앞에 그 무엇보다 밝은 빛이 생겨난 것이었다.

오만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한계를 맞이해 좌절하기를 반복, 끝내 벽을 무너뜨렸다.

동시에 배도빈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이것은 운명, 필연, 숙명이다.

배도빈의 두 번째 앨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마치 가우왕의 성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대체 어디까지 보여주려는 걸까.

가우왕은 끝없이 나아가는 찬란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마치 사랑에 빠 진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 설렜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듯, 진심으로 배도빈이 피아노계로 돌아오 길 바랐다.

그랬건만.

“빌어먹을. 피아노곡은 대체 언제 만들고 언제 연주하는데? 취미야? 어? 취미냐고!”

“저, 저, 저는 그만 나가볼게요.”

가우왕의 이상행동에 프란츠가 문을 열고 후다닥 도망쳤다.

그러나 이미 그는 프란츠 페터에게 관심이 없는지 오래였다.

“빼앗길 줄 알아?”

그는 오래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에 배도빈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빠 져 있었다.

그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베를린 필하모닉도, 캐논도 모두 싫었다.

유일한 희망을 앗아간 이들로 비칠 뿐이었다.

참아 왔건만.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받고 나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를 데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배도빈의 곡으로 또 한 번 나아갈 수 있었다.

오래 참아 왔던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놈이 문제야.’

문제는 베를린 필하모닉.

특히나 가장 재수 없는 찰스 브라움이었다.

찰스 브라움이 합류하면서부터 배도빈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더욱 열중했다.

심지어 자신보다 먼저 헌정곡을 주 기도 했다.

까드득.

가우왕이 이를 갈았다.

그것은 집착이자 광기이자 음악을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한편.

찰스 브라움 역시 공연에 앞서 몸과 정신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차를 마시던 그는 자꾸만 치미는 분노를 다스려야 했다.

‘아니꼬운 놈.’

찰스 브라움은 자신의 견고하고 우아한 성을 망치려 드는 가우왕을 눈 엣가시로 여겼다.

소중한 성주를 납치하려는 무뢰배로 보일 뿐이었다.

‘배도빈.’

처음에는 그저 건방진 꼬마였다.

그가 스트라디바리우스 파이어버드를 쥐지 않는 순간, 파이어버드를 구하기 위해 기다렸던 시간 모두를 부정받는 듯했다.

그래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자신과 파이어버드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 오기로 찰스 브라움은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바이올린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제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오디션을 통해 그에게 자신과 파이어버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줄 차례였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피와 땀으로 일군 지난 몇 년간의 오기가 허탈해지는 순간이었고.

배도빈이라는 남자의 진면목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아름답기 위해.

음악이 아름답기 위해 행동할 뿐, 그는 그 이외 일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얼마나 고결한 자세인가.

지독한 나르시스트는 처음으로 타인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으로 유학 온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 매진하던 그에게 배도빈은 너무나 고마운 조력자였다.

인터플레이를 비롯한 이들이 그를 압박할 때 손을 내밀어 준 것도.

‘찰스 브라움 협주곡’을 넘겨준 것도 모두.

그는 배도빈에게서 왕의 면모를 들여다보았다.

이자라면 함께할 수 있다고.

배도빈이 만든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에서 파이어버드와 함께 가장 고운 소리로 노래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불쌍해서 구해준 들개가 성주의 마 음을 빼앗고 말았다.

이렇게나 열심히 노래하고 있는데 성주는 들개의 간교함에 빠져, 파이어버드와 자신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에 한눈을 판 사•이, 재 능이 보여 아껴주었던 후배가 자신을 앞지르고 말았다.

‘내 자리다.’

성주의 옆자리.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왕궁 음악가는 나라고. 그 자리는 내 것이라고 외쳐야만 했다.

아니, 품위를 잃을 수는 없지.

“그렇지?”

찰스 브라움이 파이어버드를 쓰다듬다가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대기실이 부족하여 세 사람을 한곳에 두었더니 지치지도 않고 보자마 자 으르렁댄다.

“네 알량한 자존심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건방진 콧대 세우지 마. 부수기 딱 좋아 보이거든.”

염병들 하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니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다.

“아, 나와 계셨군요.”

“멀핀.”

멀핀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함께 객석으로 향하는데 그녀도 이 말도 안 되는 이벤트에 관심이 많은 듯 조잘댔다.

“정말 흥미롭습니다. 최지훈 씨가 누구를 선택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악단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주자 세 명의 경합이니까요. 이승희 수석 께서 참가하고 싶다는 걸 말리느라 애먹었습니다.”

이승희까지 참가했다면 더 크게 번졌을 것 같다.

“보스께선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네요.”

“쓸데없는 짓이에요.”

말 그대로다.

애초에 실력을 겨루는 게 아니라, 누구와 가장 어울리는지 결정하는 자리.

가우왕이고 찰스고 서로를 인정할 리 없다.

현격한 차이가 있다면 또 모를까.

둘 사이에 그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할 리 없으니, 이런 일을 벌인다고 한들 저 둘이 얌전해질 리 만 무하다.

“그것도 그렇네요.”

불평을 하니 멀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의미하진 않은 것 같아요. 보스를 두고 다투는 형태이긴 해도 단원들에게는 자극이 되지 않을까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멀핀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투란도트, 오케스트라 대전, 피델 리오까지 최근 3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해 왔습니다. 신입이었던 B팀도 어느새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이 부끄 럽지 않게 되었죠.”

멀핀의 말대로 오케스트라 대전에 막 참가했을 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다.

“성공만 이어왔으니까요. 게다가 전처럼 일정이 빡빡한 것도 아니니 조금은 느슨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B팀이 위험한 시기에 놓인 것은 맞는 말이다.

대부분 젊은 음악가로 구성된 B팀은 여러 성공을 거두고 개인 기량으로도 점차 무르익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찬사만 받고 스스로도 발전했다고 느낄 테니 자만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

정신없이 돌아가던 스케줄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해이해지는 것도 무 리는 아니리라.

“세프께서 악장직을 항상 경쟁시켰 던 이유도 그 때문이라 들었어요.”

니아 발그레이, 케르바 슈타인, 파울 리히터, 헨리 빈프스키 그리고 레몽 도네크 이야기다.

10년 전만 해도 다섯 명 모두 적어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찰스 브라움에 밀리지 않았다.

“매년마다 경쟁해서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하다 보니 어느새 그 다섯 명만 남았다고 해요. 악장들이 그렇게 노력하니 나머지 단원들도 당연 히 영향을 받았고요.”

멀핀은 즐거운 듯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찰스 브라움 악장과 가우왕 수석이 먼저 나서서 해 주니, 저는 보스가 복 받은 지휘자 같아요.”

듣다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두 사람이 그런 일까지 신경 쓸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르트벵글러호는 베를린 필하모닉 이 자랑하는 세 명의 음악가의 경합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당일 공연권이 없는 승객들을 위해 배 이곳저곳에 관람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둬야만 했다.

푸르트벵글러호가 자랑하는 호화 콘서트홀 ‘빌헬름’에 모인 승객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를 응원하고 나섰다.

“당연히 가우왕이지! 중국에서 경 합한 뒤로 대체 몇 번을 함께했는 데.”

“오래 했다고 잘 맞는 게 아니야. 찰스 브라움 협주곡 몰라? 파이어버 드의 음색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곡이잖아. 상성과 유니크함을 봐야지.”

“그럼 더더더더 가우왕이지.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연주할 수 있는 사람 가우왕 말고 또 있어? 찰스 브라움 협주곡은 저번에 한스 이안 도 연주하더만.”

“다들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나윤희만 한 사람도 없지. 하나의 곡으로 전 세계를 잠재웠잖아.”

“아니지. 아니지. 임팩트가 있어서 그렇지 나윤희 이번에 처음이라고. 솔직히 여기 낄 짬은 아니잖아. 불새 도 애초에 찰스 브라움이 하려던 거였고. 역시 찰스 브라움이라니까?”

“짬으로 따지면 가우왕이지! 이게 자꾸 말을 바꾸네?”

열렬한 팬들의 대화는 조금씩 감정 적으로 홀렀으나 대부분의 관객은 그저 하나의 이벤트라 여길 뿐이었다.

한편 ‘푸르트벵글러호’ 특집 기사를 놓칠 수 없었던 ‘관중석’의 정세 윤 기자는 차채은과 함께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 들은 거 없어?”

“알았으면 말했죠.”

“그러지 말고 사소한 거라도. 알려 주라〜”

“으음. 일단 오빠는 진짜 싫어 했어요. 무슨 짓이냐고.”

“그래? 내가 아는 성격으로는 왠지 흐뭇하게 보면서 더 싸우라고 했을 거 같은데.”

“기자님, 진짜 오빠 마왕처럼 생각 하는 건 아니죠?”

“아니야?”

차채은은 정세윤 기자의 생각을 고쳐주려다가 작년까지만 해도 앓아 누었던 단원들을 떠올리면 아주 틀 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입을 닫았다.

“누가 이길 거 같다고는 말 없었고? 그럼 다음 곡이 뭔지 조금이라 도 알 수 있을 것 같잖아.”

“그런 말은 없었고 윤희 언니가 꼴찌 할 것 같다고는 했어요.”

“흐음. 하긴, 두 사람에 비하면 경력이 짧은 편이니까.”

차채은과 정세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오늘의 사회를 자진해서 맡은 마누엘 노이어가 단상에 올라 섰다.

저번 방송으로 인해 원형 탈모인 것이 공개되어 이제는 맨질맨질한 두피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신사숙녀 여러분, 푸르트벵글러호 에 탑승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무대, 아름답고 신기한 무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서커스야?’

‘서커스네.’

어디선가 들어본 저렴하고 친근한 멘트였다.

“이름하야 배도빈을 잡아라! 아니 지. 콩을 차지하라! 찰스 브라움 악장, 나윤희 악장 그리고 가우왕 수석 이 경쟁하여 누가 음악가 배도빈과 가장 어울리는 연주자인지를 가리는 일입니다. 오늘 심사위원을 맡아주실 분을 소개합니다. 최! 지! 훈!”

마누엘 노이어의 소개에 맞춰 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인사하였다.

‘심사위원이 최지훈?’

사실 누구보다도 참가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심사위원이라니, 정세윤 기자는 깜짝 놀라 차채은을 보았다.

“며느리 뽑는 거야?”

“컇합!”

그녀의 질문에 웃음이 터진 차채은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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