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13화
90. 사랑과 전쟁 in 푸르트벵글러호(2)
‘세 명 다 돈을 바라진 않을 텐데.’ 세 사람의 재산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20년 가까이 세계 최정상 연주자 로 활동했던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 의 재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찰스 브라움은 데이비드 개릭.
가우왕은 막심 에바로트라는 라이 벌이 있었을 뿐, 두 사람 모두 콘서트마다 매진을 이어가며 최고의 티 켓 파워를 보여 왔다.
‘나윤희도 지금은 괜찮을 테고.’
나윤희의 경우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하고 나서야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전 소속사가 나윤희가 올린 매출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떼고 정산하였기 에 입단 전에는 그녀의 통장은 바닥 난 상태였다.
이후 그녀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재무팀이 담당한다 해도 그녀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벌고 있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존심 때문에 벌어진 행사.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이 상금에 연연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뭔 상관이야.’
배도빈은 여전히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두 사람이야 그런 것 없이도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나 있고 문제는 나윤희였다.
원치 않은 싸움에 휘말린 그녀가 무엇을 바랄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이 나윤희가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단원과 직원, 푸르트벵글러 까지 재밌을 것 같다며 호응하니 그 녀로서는 배도빈이 말려도 어쩔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움 되는게 좋겠지.’
배도빈은 나윤희가 필요로 하는 것 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평소 단원들 이 틈만 나면 꺼내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휴가는 어때요? 3일.”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어.”
그러나 인원확충으로 살 만해진 찰스 브라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살 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한 적 없는 가우왕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 니었다.
중요한 건 나윤희의 반응이었는데 그녀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좋아.”
의례적인 대답이라 배도빈은 다시 한번 고민했다.
‘곡을 만들어주는 건 힘든데.’
2032년 서울 하계 올림픽 주제곡 과 대교향곡에 집중하고 싶었다.
여러 곡을 작업하다 보면 작업 기 간이 겹치는 일이야 흔하지만 오케스트라 대전에 맞춰 대교향곡을 준비하고 싶은 탓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 없네.’
그러나 아무래도 마땅한 상품이 생 각나지 않았던 탓에 물어보았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아무 거나 괜찮은데.”
“그러지 말고요.”
배도빈이 거듭 물었지만 나윤희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지금 삶에 만족하고 있고 더욱이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을 상대로 자 신이 우승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 최지훈이 배도빈의 자리에서 티켓 하나를 발견했다.
“데이비드 개릭 콘서트 티켓이네? 로얄석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영화 파가니니의 주연 배우이자 독일 출신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개릭이 언급되자 그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찰스 브라움이 움 찔했다.
“보내주더라.”
그러나 상품으로 무엇을 줄지 결정 하지 못한 배도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하곤 고민을 이어나갔다.
말 그대로 흔한 일이었다.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작곡가이자 세계 최고의 악 단 베를린 필하모닉을 소유함과 동 시에 최정상급의 지휘자로 활동하는 배도빈은 어떤 단체든 모시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데이비드 개릭뿐만이 아니라 유명 음악인, 단체 심지어는 다른 업계에 서도 그들의 중요행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렇기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갈래!”
나윤희가 반응했다.
방에 있던 사람 모두 그녀를 보았고 갑작스레 주목을 받은 나윤희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 아니, 그게. 상품으로 좋을 것 같다는 말이었어. 응. 좋은 것 같아.”
방금까지 내키지 않아 하던 나윤희가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 뭐야.’
배도빈은 그런 상황을 의아하게 여기다가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연습벌레지만.
오케스트라 대전을 준비할 무렵,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제2바이올린 수석을 맡은 나윤희는 부담감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 해 나윤희의 방을 찾았던 배도빈은 장식장을 가득 채운 데이비드 개릭의 앨범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너무 좋은 거 같아.”
배도빈이 반응하지 않자 나윤희가 다급해졌다.
데이비드 개릭 특별 콘서트 티켓을 자꾸만 보며 자신의 입장을 어필했다.
블러드 와인을 만났을 때와 같은 반응.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주기 싫은데.’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윤희가 바란다면 공연 티켓이야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마침 찰스 브라움이 끼어들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놈 티켓을 걸고 경연을 해? 다른 걸로 해!”
솔로 때부터 항상 비교되었던 라이 벌의 티켓을 걸고 싸우라니,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지들이 이기는 걸 아주 깔고 말하네? 티켓 보자마자 간다고 하질 않나, 꼴에 라이벌이라고 자존심 상한다고 하질 않나.”
“그야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윤희 너까지 그리 생각할 줄은 몰랐네. 그게 진심이었나?”
“아니 그게……. 아, 아무튼 상품으로 따, 딱 적당한 것 같아요.”
가우왕 대 찰스 브라움의 구도에 나윤희까지 참전하면서 배도빈의 머리는 더욱 지끈거렸다.
최지훈이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힘들었겠다.”
“성가셔.”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이 서로를 씹어 먹을 듯이 대했고 나윤희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자기 생각을 또박 또박 말하는 끝에.
배도빈이 지긋지긋한 이 상황을 끝냈다.
“이걸로 해요.”
배도빈이 데이비드 개릭 특별 콘서트 티켓을 테이블에 놓았다.
“ 필요없다고!”
“두 사람은 없어도 할 거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
나윤희가 뒤에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흐흐흐홍흐흥.”
진달래와 차채은은 수영장에서 일 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뜨거운 햇살 그리고 일상을 벗어난 여유를 맛본 두 사람은 썬베드에서 좀처럼 일어 날 수 없었다.
“이러고 있어도 돼?”
“엉. 오늘은 공연 없어.”
“ 있던데?”
“아 세 사람만 나가. 윤희 언니랑 찰스 아저씨랑 가우왕 아저씨.”
“이상한 조합이네.”
“협주 아니고 경연이래. 도빈이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연주자가 누구냐고 싸우다가 하기로 했어.”
“당연히 지훈 오빠 아니야?”
“지훈이가 심사 본대.”
“헐.”
늘어져 있던 차채은이 벌떡 일어났다.
“이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고?”
“팸플릿에 적혀 있지 않아?”
북해를 가로지르는 호화 유람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 몇 시?”
“7시부터. 어, 가게?”
“이따 봐!”
차채은은 서둘러 카디건을 챙기고는 대충 몸을 씻고 배도빈의 방을 찾았다.
“오빠! 오빠! 배도빈!”
잠시 뒤 배도빈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문 안 열었으면 야라고 했겠다?”
“잤어? 깼네? 아무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왜 나만 빼놓고 재밌는 거 하려 했어. 빨리 앉아 봐.”
차채은이 소파를 팡팡 두드리며 앉기를 재촉했다. 배도빈이 하품을 하며 응해주니 곧장 수첩과 펜을 꺼냈다.
“자, 배도빈 씨.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 뭐야.”
배도빈이 눈썹을 모으자 차채은이 주먹을 쥐고 검지만 들어 올린 채 간청했다.
“요즘 오빠 이야기 뭐 쓸지 고민하 고 있었단 말이야. 한 번만 도와주세요.”
"누구긴 누구야. 나지.”
배도빈의 대답해 주자 차채은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오빠 그런 사람인 거 누가 몰라. 그래도 그중에 누가 제일 어울리는 것 같냐구. 역시 지훈 오빠? 윤희 언니? 찰스 브라움? 가우왕 아저 씨? 아, 푸르트벵글러 할아버지?”
“왜 이렇게 신났어?”
“내리기 전까지 신나 있을 생각이야.”
배도빈이 고민을 이어가다가 대답했다.
“사카모토?”
여러 사람이 있지만 배도빈은 틀이 없이 자유분방한 음악을 추구하는 사카모토와 작업하는 것이 가장 즐 거웠다.
서로의 생각은 달라도 결국 음악을 하면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죽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차채은이 손뼉을 쳤다.
“호흡 맞춘 것도 오래되었지. 어려 서부터 만나서 그런가 보네.”
“재밌잖아.”
“SNS에 이상한 코스프레하고 올리는 사진?”
“아니. 그건 나도 좀.”
차채은이 입을 내밀고 상황을 정리 해 메모하였다.
“그럼 가우왕 아저씨랑 찰스 브라움은?”
“좋아. 입만 안 열면.”
“핰핰핳핳핰핳핰!”
차채은은 한참을 웃은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근데 좀 의외다. 난 당연히 지훈 오빠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차채은의 말에 배도빈이 잠시 고민하더니 최지훈이 며칠 전 넘겨주고 간 악보를 찾았다.
“이게 뭐야?”
“나 생각하며 만든 거래.”
“지훈 오빠가?”
차채은이 악보를 받아 살피기 시작 했다.
“볼 줄은 알아?”
“나 요즘 공부 엄청 하거든.”
차채은이 더듬더듬 악보를 보다가 이내 웃었다.
“히. 연주해 봐야겠다.”
그러고는 단장실에 마련된 신시사 이저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몇 번 가늠해 보더니 최지훈이 배도빈에게 선물한 ‘너울’을 연주했다.
별 생각 없이 있던 배도빈은 차채은의 연주에 이끌려 어느새 곁으로 다가가 있었다.
‘정말이었어.’
아무리 큰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과 배움 없이 이런 연주가 가능 할 리 없었다.
배도빈의 기준으로는 턱없이 부족 했지만 초견이라는 걸 감안하면 합 격점을 줄 만했다.
“아, 어렵다.”
3분 정도의 짧은 연주가 끝났다.
“엄청 따뜻하다. 오빠 같은 느낌인 데? 언제 이런 곡을 만들었대?”
차채은의 질문에 배도빈은 미련을 애써 숨기고 말했다.
“나랑은 안 어울려.”
“아냐. 딱 오빠야.”
배도빈은 최지훈과 차채은이 대체 무엇을 보고 자신과 닮은 곡이라 하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거 연습해 봐야지. 지훈 오빠한테 나도 악보 달라고 해봐야겠다.”
“그래.”
짐을 챙겨 나가려던 차채은이 아 하고 후다닥 다시 들어왔다.
“윤희 언니는? 윤희 언닌 어떻게 생각하는데?”
“뭘 어떻게 생각해.”
차채은이 배도빈을 노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가우왕 아저씨랑 찰스 브라움 이길 거 같아? 요즘 앙케트에서도 제일 높잖아.”
배도빈이 입을 샐쭉거리더니 무심하게 답했다.
“아니. 3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