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11화 (41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11화

89. 저주(9)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반응은 작곡가 배도빈과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의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불면증이 나았다.

시험을 망쳤다.

인생이 달라졌다.

밤마다 보채던 아기가 얌전히 자서 살 것 같다 등 여러 경험담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 재생 수가 단 일주일 만에 1억 뷰를 돌파하였고.

디지털 앨범 구매 수는 현재 판매 중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모든 곡 중 에서도 가장 가파르게 오르는 중이었다.

비록 곡 전체를 들은 사람은 몇 없었고 예술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은 적었으나 ‘잠자는 숲속 의 공주’로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느꼈다고 하니 배도빈이나 나윤희도 만족스러웠다.

그와 같은 인기에 힘입어 명실상부 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입지를 굳힌 나윤희에 대한 러브콜이 잇따 르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우왕의 전 소속사이자 세계적인 레코드사 도이치 오퍼, 도이치 그라 모폰을 비롯한 여러 업체가 나윤희 에게 솔로 활동을 제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인터스코프 레코드의 참전은 큰 화제를 끌었다.

인터스코프 레코드는 힙합, 록, 팝 등 여러 음악을 다루며 세계 최고의 레코드사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클래식 음악 시장 확대에 따라 그에 맞는 진출 계획을 세운 미국의 거대 자본이었다.

그런 그들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 장 나윤희를 스카우트하길 바라니 음악계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인터스코프 레코드, “바이올리니스 트 나윤희를 주목하고 있다.”】

【매니 빅머니. “최근 가장 인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가 뭐래도 나윤희.]

[인터스코프 레코드 “나윤희를 위 해 천만 달러를 준비했다.]

ㄴ 나윤희 대박;;

ㄴ 나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무슨 운동선수도 아니고 저렇게 다른 회사 소속 사람에게 대놓고 얼마 줄 테니 오라는 게 말이 돼?

ㄴ 니 말대로 저렇게 언론에 대놓고 말하는 게 엄청 특별한 경우임.

ㄴ 그렇긴 해도 문제는 없는 게 어 차피 다들 기간제 계약이잖아. 나윤희가 올해로 계약이 끝나긴 할 테니 다른 곳에서 제안할 수도, 나윤희 본인이 더 좋은 조건 찾아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선 인터스코프 레코드는 그들이 나윤희를 얼마나 바라는지 대중과 나윤희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에 각 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나윤희와 접촉하였는데.

인터스코프 레코드의 매니 빅머니 실장의 제안에 나윤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갑습니다. 매니 빅머니라고 합니다.”

나윤희는 본인의 몸통보다 두꺼운 팔뚝과 비대한 흉근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곤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어려서 부 모님께 혼날 때와 같이 바닥의 문양 이 무엇과 닮았는지 찾아야 했다.

“올해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계약이 끝나고 우리와 함께하는 조건으로 2 천만 달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네, 네?”

언론을 통해 밝힌 금액의 두 배.

기대치를 만들고 그것을 한참 웃도는 금액을 제시하는 고전적인 협상 스킬이었다.

매니 빅머니가 더할 나위 없이 훌 륭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서워.’

그러나 나윤희는 위협적인 체격에 험상궂은 얼굴의 매니 빅머니의 미 소에 겁을 먹고 있었다.

“솔로로 활동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에 있을 때와는 비 교할 수 없을 겁니다. 수익은 공평 하게 분배될 거고 당신의 콘서트는 최고 수준으로 보장할 겁니다. 지금

보다 팬들과 교류하는 것도 원활해 질 겁니다.”

매니 빅머니의 말을 들은 나윤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계약서 사본을 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매니 빅머니는 나윤희 영입이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단칼에 거절될 거라고는 예상 치 못했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스타성을 갖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베를린 필하모닉이 최정상의 오케스트라라고는 해도 개인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기에는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배도빈, 찰스 브라움, 가우왕 등 몬스터 파워의 비르투오소들이 함께 있는 한 기회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매니 빅머니는 진심으로 그것이 안 타까뭤다.

“당신은 정말 빛나는 재능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 날개를 좀 더 자유롭게 펼쳤으면 합니다.”

‘좋은 사람인가……

그의 진심에 나윤희도 조금 안정하 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계약서 사본을 한 번 더 밀었다.

“감사합니다만 죄송합니다.”

완전한 거절이었지만 영업을 하는 이로서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매 니 빅머니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 역시 무서워.’

“혹시 계약금이 부족하다 생각하신 다면 얼마든지 조절 가능합니다. 백 만 달러를 얹죠.”

나윤희는 단 한 마디 말로 10억 원이 넘는 돈이 늘어나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고는 바로 저번 달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받는 연봉은 한화 약 2억 5천만 원.

각 연주회로 벌어들이는 인센티브는 때마다 달랐지만 보통 1년간 연 봉의 400퍼센트를 넘지는 않았다.

인터스코프 레코드가 제시하는 계약금과 추후 보장하는 내용과는 차 이가 컸다.

그러나 나윤희는 단호했다.

“돈은 지금 버는 걸로도 충분해요.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게 더 중요 하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그녀의 대답에 매니 빅머니는 그녀를 설득하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 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오직 음악만을 쫓는 외골수 같은 면이 그녀 가 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멋진 마인드네요.”

매니 빅머니가 아쉬움을 담아 악수를 청했다.

나윤희는 흠칫 놀랐지만 곧 조심스 레 그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같은 날.

‘너만 모름’에 초대받은 나윤희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오전에 만났던 매니 빅머니도 그렇고 자신을 향한 관심이 너무도 과열 된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제 한 알로는 안 되는데.’

잦은 청심환 섭취로 내성이 생겨 버린 나윤희는 스튜디오에 오르기 전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디 불편하세요?”

오늘 그녀의 보좌를 맡은 죠엘 웨 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 아뇨. 네.”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던 죠엘 웨인은 초조해하는 나윤희를 살피다가 입을 뗐다.

“악장께서는 멋진 음악을 하는 걸 꿈꾸셨죠?”

나윤희는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다. 이미 꿈을 이뤄 나가고 계신 거네요.”

“……흐. 그렇지 않아요.”

“이런 자리 불편해하시면서도 꿈을 계속하기 위한 일이니까 나오신 거잖아요. 정말 멋있는 것 같아요.”

나긋나긋한 호의에 나윤희는 쑥스러워 청심환 포장지를 만지작댈 뿐 이었다.

죠엘이 웃으며 말했다.

“오전에 그 무서운 사람 앞에서도 소신 있게 말씀하시는 것도 멋있었어요.”

나윤희가 고개를 들자 죠엘이 과장 하여 몸서리를 쳤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주는 듯해, 나윤희는 또 한 번 힘을 내 스튜디오로 향했다.

“최근 전 세계를 잠재우신 분이죠.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 씨를 모시겠습니다.”

사회자 우진의 멘트에 맞춰 나윤희 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청객들이 크게 호응하였고 나윤희는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하고 자 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나윤희 씨. 발음이 어 렵네요. 주변 사람들은 나윤희 씨를 어떻게 부르나요?”

“윤희라고……

우진과 나윤희가 시선을 마주한 채 눈을 깜빡였다.

“하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나오신 분들은 정말 하나같이 만만치 않으시네요. 베를린 필하모닉이 우리 방송 싫어하시는 건 아니죠?”

“흐. 조금요.”

나윤희의 대답에 우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그게 아니라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었어요.”

“그 말씀은 좋아하지 않은 분도 계 시다는……

“세프, 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지 휘자께서 싫어하세요. 케르바 슈타인 감독도 싫어하시고. 승희 언니랑 도빈이, 아니, 보스도. 아, 소소랑 찰스 악장도.”

나윤희의 발언에 방청석이 터져 버렸다.

그녀가 언급한 인물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의 핵심 인력이었고 누가 들어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상처받은 우진이 멍한 표정으로 카 메라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더 웃겨 시사 교양 프 로그램으로서의 ‘너만 모름’의 정체성이 흔들렸다.

담당 PD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 번 배도빈이 출연한 방송분이 ‘너만 모름’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유머가 필요하다고 판단 한 그의 대본이 먹혀 들어간 것이었다.

짜고 치고, 보는 사람도 농담이라 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 만 긴장한 나윤희가 말을 더듬는 바 람에 그 효과가 더욱 좋아졌다.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것처럼 꾸미면 되지. 다들 웃잖아?’

담당 PD는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 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엄청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불면증이 있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보스가 그걸 보더니 며칠 뒤에 악보를 줬어요.”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실제로도 보스라고 부르시나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럼 사적인 자리도 있다는 뜻이겠네요?”

“아.”

대본에 없던 질문이라 나윤희가 당 황하고 있는 사이, 우진은 오프닝 때 당한 것을 갚아줄 생각으로 음흉 한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알기로 마에스트로 배도빈과 동거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담당 PD는 당장 녹화를 끊고 대본 대로 하지 않냐고 소리 치고 싶었지 만 방청객과 스태프들의 반응은 그 러지 않았다.

“어머. 어머.”

“세상에. 세상에.”

지금까지 최지훈 이외에는 열애설 이 없었던 배도빈의 사생활을 궁금 해하는 것이었다.

배도빈의 출연으로 자본주의의 참 맛을 맛본 담당 PD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 네. 작년까지 하숙하다가 올해 숙소로 옮겼어요.”

“••••••왜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우 진이 진심으로 물었다.

“수, 숙소가 있으니까요.”

할 말이 없어진 우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럼 그렇지.’

담당 PD는 해당 부분을 편집하기로 마음먹고는 오늘이야말로 우진의 돌출 행동을 교정하기로 다짐했다.

“또 한 번 화제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로운 바이올린을 구하셨다고 하는데 이야기 좀 들려주시 죠.”

블러드 와인 이야기가 나오자 나윤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로렌초 조반니라는 분께서 1998 년에 만드신 바이올린이에요. 이름은 블러드 와인이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 이 아이다 싶었어요. 새 침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잘 따라줘 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머리에 무늬가 엄청 진한데.”

방언이라도 터진 듯 이야기를 시작 한 나윤희는 우진이 웃으며 진정시킨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네. 흐흐흐하핫. 네. 제가 로렌초 조반니란 분이 대단하시다고 들었는데요.”

“네. 신창연 명장께서도 인정해 주셨던 분이세요.”

우진과 독일인 방청객도 신창연이 란 이름이 나오자 감탄했다.

신창연은 바이올린 제작자로서 안 토니오 스트라디바디에 가장 근접했다알려진 대한민국의 명장으로서 타계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회 자되는 인물이었다.

바이올린 제작자의 이름이 알려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신창연이라는 이름만큼은 일반인도 대부분 알고 있었기에 로렌초 조반니를 설 명하기로는 좋은 시작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이에서는 유명하신 분이세요. 니아 발그레이 고문과 스노우 한 선생님도 로렌초 조반 니 씨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계시고요. 깊고 진한 음색이 정말 좋아요.”

“그렇군요. 이거, 설명을 듣다 보니 안 들을 수가 없는데요?”

“아, 네. 그럼……

보조 연출자가 블러드 와인의 케이스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받아든 나윤희가 케이스를 열자 방청객들이 크게 호응하였다.

블러드 와인의 진홍색 외관은 화면을 통해 본 것 이상으로 타오를 것 만 같았다.

“자, 모두 채널 고정하시고 베를린 의 푸린, 나윤희 씨의 연주를 감사 하겠습니다. 잠들 수 있으니, 에어컨 과 가스는 지금 바로 끄시길 바랍니다.”

우진의 소개에 나윤희는 얼굴이 화 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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